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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겠다."

주말 오전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장인어른이셨다. 밤새 장모님의 고열 때문에 전전긍긍하시다 큰 딸인 우리 아내에게 전화를 하신 거였다. 보통은 쉽게 갈 수 있는 병원을 왜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셨을까. 장모님은 중증 장애인이시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부터 장모님은 뇌출혈에 의한 뇌병변장애인으로 지내오셨다.

간단히 몇 마디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의 인지능력과 우측 편마비로 거의 15년을 넘게 보내셨다. 재활병원을 전전하다 퇴원하셨는데, 그 이후엔 감기 증세가 있어 병원에 가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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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엔 빌라 2층에 거주하고 계셨다. 휠체어로 계단을 내려오는 일은 고령이신 장인어른 홀로 감당하시기엔 매우 어려웠다. 가족들이 달려가 장모님을 모시고 계단을 내려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진빠지는 일이었다.

그러다 몇 년 후 아파트로 집을 옮기면서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 이동의 제약은 한결 나아졌다. 그렇지만 집에서 내려온다고 병원을 쉽게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인근 의료기관들이 건물 2층이나 3층의 엘리베이터 없는 곳에 있는 까닭에 역시 장벽처럼 느껴졌다.

결국 고열이 나면 종합병원으로 가야했다. 인근 1차 의료기관은 장애인이 접근하기에 너무도 큰 장벽과 같았다. 단순 감기로 아플 때마다 종합병원으로 향하는 번거로움과 진료비 부담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에 세계가 극찬한다는 한국 의료시스템조차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의료기관 이용에 어려움을 느끼던 찰나, 장애인주치의제도가 생겼다. 방문진료와 방문간호를 할 수 있도록 한 게 골자였다. 전국에서 장애인주치의 제도에 참여하는 의원들이 생겨나면서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장모님처럼 방문진료가 절실한 중증장애인에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개원의 한 명이 운영하는 의료기관이 대부분인 동네 의원에서는, 방문 진료가 공염불에 불과했다. 방문진료로 자리를 비우면 내원하는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는 없다. 상대적으로 장애인주치의 방문진료 수가가 낮은 것도 진료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요인 중 하나였다. 결국 여건상 방문진료가 가능한 일부 극소수 의원만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장모님 댁까지 방문진료를 올 수 있는 의원이 있었다. 여러 매스컴에 등장했던 방문진료만 하는 '건강의 집' 의원이 그곳이다. 장모님을 '건강의 집' 의원에 장애인주치의로 등록시켜드린 후 병원 이용에 어려움이 많이 줄었다.

코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삽입한 비위관을 교체할 때도, 혈압약이나 혈관성치매약을 처방받을 때도, 방문진료하는 건강의집 의원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특히 코로나 감염상황에서 의료기관을 방문하기 어려운 지금, 방문진료가 정말 고맙다.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 위한 의사 성장기

서울에서 장애인주치의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의원으로 '건강의 집' 말고도, 은평구에 위치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이라는 곳이 있다. 2012년에 설립된 협동조합 의원으로 지역주치의를 표방하는 1차 의료기관이다. 최근 살림의원 추혜인 원장이 그간의 지역주치의 경험을 살려 책을 출간했다.

책 이름은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여성주의를 표방하며, 장애인, 성소수자, 노인 등 성별과 직업을 가리지 않고 평등한 진료를 위해 노력하는 추혜인 원장의 뜻이 책 제목에 고스란히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지역주치의로서 활동한 경험을 담은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지역주치의로서 활동한 경험을 담은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 심플라이프
 
추혜인 원장은 그의 책에서, 공대를 다니다 여성주의 운동을 하며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일하는 의사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의대로 진로를 바꿨다고 밝혔다. 그 후 협동조합과 지역주치의에 꽂혀 뜻이 있는 몇몇 동료들과 힘을 모아 지금의 은평구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의대를 진학하게 된 배경과, 의대를 거쳐 전공의 젊은 시절 '의료의 사회적 가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들을 열거해 놓았다.

또한 지금 지역주치의로서 어떻게 지역주민들과 관계를 맺었는지, 지역의사로서 어떤 어려움과 고민, 깨달음이 있었는지 경험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이 책은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 위한 의사로서의 성장기로 봐도 무관할 것 같다. 더불어 평소 '장애인주치의' 혹은 '일차보건의료'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내게도 큰 길잡이가 되었다.

'진료'라는 단어를 떠올려보면 자연히 병원이 연상된다. 하얀 가운의 의사가 어디가 아픈지 묻는 것부터 시작해서, 주사가 떠오르고, 처방전의 이미지가 뒤따른다. 진료실이라는 공간은 '질환' 중심으로 의사와 환자가 관계 맺기에 최적화된 곳이다.

하지만 왕진은 다르다. 추혜인 원장은 의사는 둘로 나뉜다고 한다. 왕진을 한 번이라도 가 본 의사,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의사. 진료실에 밖에서의 생활은 어떤지, 진료실에 못 오는 환자들의 모습은 어떤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하였다.
 
살림의원 왕진 알림 매주 수요일 오후, 왕진가는 날임을 알리기 위해 의원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살림의원 왕진 알림매주 수요일 오후, 왕진가는 날임을 알리기 위해 의원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 살림의원
 
질환 중심에서 벗어나, 환자의 생활 전반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아마 우리 장모님같은 중증 장애인을 병원에서 진료한다면 단순히 겉으로 나타나는 양상에만 포커스를 둘 뿐, 집안에서의 침대 위치와 자세, 방안의 환기상태, 주위 청결도 같은 부분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장애인에게 나타나는 대부분의 만성질환과 2차 장애는 평소 집에서 관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의료기관에 접근하지 못하는 장애인에겐 왕진이 너무도 중요하다. 추혜인 원장은 왕진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나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간다. 의원에서 출발해서 마을 가게를 들러, 아는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르막을 올라 땀을 훔치며 집에 들어간다. 이렇게 가면 동네가 더 잘 보인다. 얼마나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는지도 보고, 집까지 가는 길에 싱싱한 식재료와 생필품을 구할 곳이 마땅한지도 본다. 집에 도착해서는 고혈압, 당뇨 교육도 하고, 무좀 상태도 본다. 소리를 잘 못들으시는 것 같아 귀안을 들여다보면 귀지가 가득 찬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땐 기구를 넣어 살살 빼내기도 한다. 근육위축이나 관절구축이 더 진행되지 않았는지도 살피고, 방 안의 가구 배치도 본다. 방에 볕과 바람이 잘 들어오는지도 확인한다." - 28p
 
보호자의 건강도 중요해

장애인을 돌보는 건 주로 가족들의 몫이다. 우리 처가도 가족들이 장모님을 돌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요양보호사'가 와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가족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뇌병변장애인 가족 뿐만아니라, 하루 많게는 24시간 눈을 뗄 수 없는 발달장애인 부모도 마찬가지다. 어떤 발달장애인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서 만성질환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한 순간도 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정작 보호자의 건강관리는 소홀해진다. 마치 장모님을 돌보다가 관절 여기저기 통증을 호소하셨던 장인어른처럼 말이다. 나는 장애인주치의 방문진료를 할 때, 가족에 대한 건강관리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동을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을 돌보는 경우 근골격계 질환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 이에 대한 적절한 스트레칭이나 관절보호 방법을 교육해야한다. 또한 심리 지원을 위해 상담도 함께 병행하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추혜인 원장도 본인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살림의원과 함께 있는 살림치과의 치과위생사인 졔졔 샘과 함께 왕진을 간 날이었다. 원래는 환자분의 치아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콧줄로 영양을 공급받는 분이라 치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환자분인 어머니의 치아 상태를 확인하는 걸 지켜보던 보호자 따님이 자신의 치아도 아프다고 얘기했고, 졔졔 샘은 보호자분의 치아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보호자분의 치아 상태가 몸시 안 좋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어머니 호흡기가 가래에 막혀 숨을 잘 쉬지 못하실까봐 가래를 뽑아드리느라 두 시간 이상 깊은 잠을 못잔 지가 10년이 넘는다고 했다. 이러니 치아가 안 좋을 수밖에 없지. 얼른 치과를 방문하시도록 권유했더니, 어머니 곁을 떠나기가 어려워 치과를 찾아오기 힘들다는 답이 돌아왔다" - 276p
 
장모님의 경우 운이 좋게 방문진료하는 장애인주치의를 만났지만, 실제 방문진료가 필요함에도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많다. 계단이 많은 빌라에 살거나, 의료기관 출입이 용이하지 않아 가까이도 갈 수 없는 경우들. 이럴 땐 '방문진료' 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제도적으로도 부족하고, 의사의 장애인 진료에 대한 경험도 많지 않아 참여율이 저조한 실정이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방문진료 수가'를 현실적으로 조정함과 동시에, 의대시절부터 장애인 방문진료에 참여하며 관계 맺기를 하는 등 다양하게 경험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장애인 건강은 하루아침에 이뤄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 분야, 특히 지역 의료진의 관심과 노력이 시간과 비례해 쌓이면서 점차 좋아질 거라 믿는다.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 동네 주치의의 명랑 뭉클 에세이

추혜인 (지은이), 심플라이프(2020)


##장애인주치의##살림의원##추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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