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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전곡리 유적, 구석기시대 생활모습
▲ 연천 전곡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 구석기시대 생활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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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 없는 우리나라 가을하늘은 한 폭의 그림이다. 어떤 풍경도 맑고 투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하면 예술 그 자체이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작품이 된다. 가을 날씨 좋은 날 코로나19로 인해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지만 야외에 있는 문화재 답사는 할만하다. 9월 마지막주 주말에 경기도 연천의 구석기시대 전곡리유적지와 고구려성인 호로고루성을 답사했다.
 
연천 전곡리 유적, 아슐리안 주먹도끼
▲ 연천 전곡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 아슐리안 주먹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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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리유적지 발견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1978년 3월 고고학을 전공한 주한 미군 병사인 그렉 보웬이 한탄강에 놀러와 우연히 아슐리안형 석기를 발견했다. 한눈에 이 유물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해 사진과 발견 경위를 적어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전문가인 보리드 교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리드 교수는 "이 유물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면 분명히 아슐리안 문화의 석기라 말하겠으나 직접 가보고 싶을 정도로 중요한 발견입니다. 서울대학교 김원용 교수를 찾아가도록 하십시오"라고 권유했다. 석기를 살펴본 김원용 교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곧바로 전곡리 일대에 대한 조사계획이 수립되었고 5월에 조사단이 구성되어 지표 조사가 실시되었다. 전곡리유적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연천 전곡리 유적, 왼쪽부터 투마이, 루시앙, 호두까는 사람, 루시, 상기란인, 베이징원인,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만달인
▲ 연천 전곡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 왼쪽부터 투마이, 루시앙, 호두까는 사람, 루시, 상기란인, 베이징원인,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 만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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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슐리안 석기가 중요한 것은 아슐리안은 전기 구석기시대의 석기문화로 동아시아는 찍개 문화권이라는 모비우스의 망언을 공중 분해시킨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기 때문이다. 1940년대 초반 하버드대학교의 모비우스 교수는 당시의 고고학 자료를 분석한 후 세계 구석기문화를 인도 동북부 지역을 경계로 서쪽의 아슐리안 주먹도끼 문화권과 동쪽인 동아시아의 찍개 문화권으로 구분했다.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기술적으로 발달한 주먹도끼가 없는 것은 구석기시대의 동아시아 지역이 문화적으로 정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이며 서양인의 인종적 우월성은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결정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연천 전곡리 유적, 의자에 앉아 생각하는 구석기인
▲ 연천 전곡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 의자에 앉아 생각하는 구석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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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에 사로잡힌 학자로부터 배운 수많은 학생들은 동양에 비해 서양이 우월하다는 인종 우월적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병도에게 식민사학을 배운 수많은 학생들 때문에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뿌리 깊은 식민사관이 오늘날까지 해악으로 작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호로고루성은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 고구려성이다. 임진강변에 형성된 28m 높이의 현무암 수직절벽을 이루는 긴 삼각형 대지 위에 조성된 강안평지성(江岸平地城, 강기슭 평지에 쌓은 성)이다. 평양을 출발한 고구려군이 백제 수도인 한성으로 진격하는 최단코스는 호로고루 앞의 여울목을 건너 의정부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구려 호로고루성, 안쪽은 고구려, 밖은 신라가 쌓은 것이다.
▲ 고구려 호로고루성 고구려 호로고루성, 안쪽은 고구려, 밖은 신라가 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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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의 전체 둘레는 401m 정도 된다. 임진강변의 특이한 구조로 인해 성의 남쪽과 북쪽은 현무암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했고 평야로 이어지는 동쪽에만 너비 40m, 높이 10m, 길이 90m 정도의 성벽을 쌓았다. 동쪽 성벽은 여러 번에 걸쳐 흙을 다져 쌓은 위에 돌로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려 석성과 토성의 장점을 적절하게 결합한 축성술을 보여준다. 호로고루성은 551년 나제연합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상실한 고구려가 임진강유역의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면서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안쪽 모습, 성 뒤로 임진강이 흐른다
▲ 고구려 호로고루성 성 안쪽 모습, 성 뒤로 임진강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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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성은 고구려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지만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신라가 점령해 사용했다. 신라군은 곳곳이 무너진 동벽을 보수했는데 고구려 성벽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새로운 성벽을 덧붙여 쌓았기 때문에 고구려 성벽과 신라 성벽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성 안에서 바라본 성벽 모습
▲ 고구려 호로고루성 성 안에서 바라본 성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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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성벽은 95% 이상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으로 쌓았는데 신라 성벽은 주변에서 구하기 어려운 편마암으로 쌓았다. 현무암은 돌이 질기고 깨기가 힘들어 다루기가 쉽지 않지만 오랜 기간 임진강 일대를 지배하며 현무암을 다루는 기술을 터득한 고구려 석공들은 쉽게 쌓았을 것이다. 이에 비해 새로 임진강 지역을 차지한 신라 석공들은 돌 다루는 기술을 단기간에 익힐 수 없어서 다루는데 익숙한 편마암을 멀리서 조달해 성벽을 쌓은 것이라고 한다.
 
성 밖에서 바라본 성벽
▲ 고구려 호로고루성 성 밖에서 바라본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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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원화성은 전통적인 축성 기법과 동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처음부터 계획하고 거주지로서의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하여 신축한 성곽이라는 특징이 있다. 주변의 지형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해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성 밖에서 바라본 호로고루성
▲ 고구려 호로고루성 성 밖에서 바라본 호로고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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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은 주변인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 권동에서 성돌을 조달해서 성벽의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거나 흙을 돋우는 외축내탁 방식으로 쌓았다. 고구려성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호로고루성의 동쪽 성벽 축조상태를 보면 성의 기단부와 중심부는 점토와 마사토로 판축을 하고 성벽의 내, 외면은 석축을 해 내구성과 방어력을 높여 고구려성의 특징적인 축성기법을 보여준다. 또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이용해 축성했기 때문에 풍광이 수려하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에서 용연과 광교산을 바라보면 아름답고 장쾌한 경관이 펼쳐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용연 뒤로 보이는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풍광이 수려하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원화성 용연 뒤로 보이는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풍광이 수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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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비교답사는 아는 만큼 보인다. 답사 전에 충분히 공부를 해야만 유물 본래의 모습과 그 이면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무조건 수원화성이 최고라는 식은 곤란하다. 역사적이고 과학적이고 수평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봐야만 수원화성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의 호로고루성과 수원화성 이야기는 e수원뉴스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연천 문화재답사, #전곡리유적, #구석기유적, #호로고루성, #수원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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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가슴에 안고 살면서 고전과 서예에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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