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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평생을 다른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에스토니아에서 만났던 한 화가는 소련 시절 생활에 대해서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게 서로 다른 사람처럼 살도록 요구됐다고. 마음속에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욕구와 열망이 넘치고 있었으나, 말로는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조종당하고 있었고, 인격과 개인적 성격을 박탈당한 채 창살 없는 감옥 속에 살고 있었다고 말이다.   

이번 연재를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건 바로 그러한 사회적 강압을 몸으로 휘어감아 바수어버린 거대한 용처럼 세상에 나타난 사건에 대해서다. 현대사가 '발트의 길(The Baltic Way)'라 부르는 인간 띠 말이다. 
 
1989년 8월 23일 오후 7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세 나라 국민들이 함께 손을 잡고 자유를 외쳤다. (에스토니아 인민전선 박물관 제공)
▲ 발트의 길 에스토니아 구간  1989년 8월 23일 오후 7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세 나라 국민들이 함께 손을 잡고 자유를 외쳤다. (에스토니아 인민전선 박물관 제공)
ⓒ Rahvarinde Mu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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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것은 내가 2년 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작업이었다.  

1989년 열렸던 발트의 길 행사의 30주년이 되던 2019년을 맞아, 나는 내 재능에 걸맞은 성과를 내고 싶었다. 그래서 2018년부터 나는 발트의 길 행사에 참가하였거나 그 행사를 추진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당시 경험을 들어보고 그것을 모아 글로 엮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리투아니아어, 라트비아어, 에스토니아어를 모두 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한국에 기여할 만한 일로서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남들이 찾지 못하는 새 정보를 얻는 데 효과적인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어 구사 능력은 생각보다 효과를 보여주지 않았다. 먼저 발트의 길을 주도했던 주요 인물들을 섭외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계 전체를 놓고 보아도 흔치 않은 발트 3개어를 모두 할 줄 아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현재 각국 정치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장본인들이 모든 걸 마다하고 흔쾌히 시간을 내어 인터뷰해줄 정도의 매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 역사적인 행사가 세상에 나오는 데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한 분은, 무슨 방법을 써서 연락을 시도해 봐도 도무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나중에 듣자 하니 병환으로 인해 다리를 절단, 현지 언론에도 두문불출하고 계시던 참이라 했다. 

다행히도 나름 여러 사람이 내 인터뷰에 응해주었고 더 인터뷰해야 할 사람들 연락처를 주거나 그와 연락이 닿을 사람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발트의 길이 성사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도 있고, 나름 그 역사적인 자리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을 공유해준 예술가 분도 계셨다.  

아직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지만, 2018년부터 시작한 이 작업을 너무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정리해서 공유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어 나에게 귀한 경험을 공유해주신 그분들께 너무 큰 죄를 짓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금씩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면 더 많은 사람과 이 역사적인 사실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는 자그마한 희망도 들었다.

이번에 진행하는 단독 프로젝트는 이 '발트의 길' 위에 섰던 사람들을 만나 다시 한 번 당시의 감동과 전율을 느껴보는 것이다. 그들이 섰던 길을 따라 타박타박 같이 걸어가는 프로젝트다. 그런데 과연 내 작은 발, 최근 무릎과 발목이 아픈 발로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그래서 나름 2년 걸린 프로젝트 결과물을 여기 내어놓게 된 것이다. 
 
발트의 길

'발트의 길'이란 영어로는 Baltic Way라고 쓰고 리투아니아어(Baltijos kelias)와 라트비아어(Baltijas Ceļš)는 그 영어단어에 해당하는 표현을 자기네 언어식으로 번역하여 사용하는데, 에스토니아만 특별하게 영어로 Baltic Chain 즉 '발트의 사슬(Balti kett)'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사실 에스토니아는 처음엔 '발트의 띠(Baltic Belt)'라는 표현을 사용하려고 하였으나 사슬이라는 표현이 인류의 통합을 표현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서 이 표현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한국어에서 '사슬'이라는 단어가 갖는 이미지는 에스토니아어에서의 느낌과 상당히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이 사건은 그러니까 1989년 8월 23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까지 이르는 약 600km의 거리를 200만 명이 손에 손을 잡고 만든 거대한 인간 띠다.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면 서울에서 전라도 광주를 두 번 왕복하는 거리를 사람들이 빼곡히 손을 잡고 서 있었다는 것이다.  
 
발트의 길(Baltic Way) 중 인간띠를 만든 사람들.
 발트의 길(Baltic Way) 중 인간띠를 만든 사람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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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은 발트 3국이 소련 지배하에 들어가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독소 불가침 조약이 조인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였으며, 당시 이는 그 소련 지배 부당함을 만방에 천명하기 위해 기획된 행사였다. 1939년 독일과 소련 외무부 장관들이 서명한 이 조약은 2차 대전의 불씨가 되었고 이후 소련의 강압적인 내부간섭과 사회주의 경제화 등으로 발트3국 전체가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였다. 결과 2차 대전 종전 뒤, 1차 대전 전 노르웨이와 GDP를 나란히 하던 발트3국은 소련의 일개 공화국으로 전락하여 전 세계에서 잊히고 말았던 것이다. 
 
'발트의 길' 이 사건으로 인하여, 온 세계가 망각했거나 부인해왔던 이 작은 나라들 존재가 서방의 뉴스를 통해서 온 천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단신이긴 했지만, 심지어 한국 뉴스에 소개되기도 했다. 
 
헤인즈 발크 (Heinz Valk), 그리고 노래하는 혁명 

역사적 순간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 인물 중 에스토니아에서 내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바로 헤인즈 발크라는 노익장이었다. 나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와 같은 성을 가진 이분은 '노래하는 혁명(Singing Revolution)'이라고 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경구를 창조해낸 장본인이기도 한데, 당시에는 언론인과 유명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에스토니아 예술가 협회 총비서를 맡고 있었고 유명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 "노래하는 혁명"이라는 경구를 창조한 헤인즈 발크  당시 에스토니아 예술가 협회 총비서를 맡고 있었고 유명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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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발크 씨와는 이분 아내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 같다. 별로 어렵지 않게 연락이 닿아 탈린 시내에서 약속이 잡혔다. 탈린 구시가지에서 조금 벗어나 탈린 시청 쪽으로 오다 보면  단아한 도시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지하도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데, 바로 그 찢어질 듯한 지하도의 입구에 '인민전선 박물관(Rahvarinde muuseum)'이 자리 잡고 있었다(현재는 대규모 합창제가 열리는 노래 대전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 재개관을 준비 중에 있다). 

그분과 인터뷰를 했던 날은 월요일이었다. 보통 박물관들은 월요일에 문을 닫는데 그날은 박물관이 문을 닫은 날이었고, 박물관 측은 일부러 한국에서 온 손님을 위해서 특별히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혁명과 자유를 꿈꾸던 이들
  
인민전선(영어로 Popular Front)이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각 공화국에서 자주와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갔던 정치기구를 말한다. 이는 정당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국민들 사이에서 정당 이상의 지지를 얻어 20세기 후반기 냉전체제를 붕괴시키고 소련 공화국들의 독립을 주도했던 정치단체다. 에스토니아를 비롯하여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조지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에서도 인민전선이 결성돼 독립으로 가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으며 다른 나라의 인민전선이 결성되는 데 포문을 연 곳이 바로 에스토니아라고 한다. 그 박물관은 인민전선의 시작부터 노래하는 혁명, 발트의 길까지 인민전선의 창설과 주요 활동 관련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1980년에도 명목상 자유는 주어져 있었다. 제대로 튜닝(조율)되거나 방향이 잡히지 않은 그 자유라는 어휘는, 조율되지 않은 기타 줄을 튕기는 음악가의 심기를 건드리듯 여러 예술가의 귀를 간지럽혔고, 그 기타 줄을 튜닝해야 한다고 앞서서 말한 장본인 중 한 분이 바로 이 헤인즈 발크 씨였다. 

그분 첫인상은 탈린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수더분한 인상의 노익장이었다. 인터뷰는 에스토니아어로 진행됐으나 외국인을 의식한 탓인지 시종일관 일부러 더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로 인터뷰에 참여해 주셨다. 내 에스토니아어 실력이 벌써 이렇게 늘었단 말인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만큼 듣는 사람의 입장을 잘 고려해주는 달변가였다. 

헤인즈 발크는 소련 시절에도 에스토니아 인민공화국 예술동맹 총비서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소련 시절 스탈린이 살아있을 당시  예술 경향은 이데올로기와 정당 활동 홍보, 정치적 이념 확산이 최우선이었고 다수의 예술가는 예술의 완전한 자유를 원하며 이런 경향에 반기를 들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숙청되거나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탈린이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처음으로 서방 예술가들과의 소통이 시작됐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벨기에 등 사회주의뿐만 아닌 다양한 국가들과의 소통이 허락된 것이다. 그것은 예술가들의 오랜 꿈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 고르바초프에 의해 개혁과 개방 정책이 시행되면서 서방세계로 향한 숨통을 더 크게 틔워주었다. 

소련 시절 헤인즈 발크는 출판과 언론계에서 나름 이름난 인물이었다. 책 디자인이나 삽화 등을 주로 작업했으며 에스토니아 신문에 캐리커처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초기부터 정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일반적인 인간관계와 남녀관계, 사랑 등을 주제로 유머와 해학이 담긴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개혁정책 시작되며 '자유' 퍼지나 싶었지만...

고르바초프 개혁정책이 시작되면서 사회주의와 정치와 관련된 캐리커처도 제작했다.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고 국가의 간섭과 통제를 줄여서 경제적 효율성과 국가의 이익을 높이려 했던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이상은 여러 나라에 표현·집회의 자유라는 급물살을 타게 했고, 헤인즈 역시 그 물결을 타고 전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들을 종이 위에 구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를 비판한 캐리커처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의 반대로 그의 작품 개인전을 여는 것이 금지됐고 작품을 공공장소에서 전시할 수도 없었다.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이 오히려 사람들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변질된 현실을 깨닫자, 그는 한 일간지에 사람의 입을 누군가가 '자유(vabadus)'라는 단어로 바느질하는 캐리커처를 발표했다. 본질이 없는 자유에 대한 '항거'였다. 
   
에스토니아어로 '자유'라는 단어로 사람의 입을 꿰메고 있다. 개혁과 개방이라는 명목상 자유의 분위기가 불어닥쳤지만 정작 사람들은 소련이 주는 자유의 테두리 안에서만 머물도록 조종당했다.
▲ 본질이 없는 자유에 대한 항거  에스토니아어로 "자유"라는 단어로 사람의 입을 꿰메고 있다. 개혁과 개방이라는 명목상 자유의 분위기가 불어닥쳤지만 정작 사람들은 소련이 주는 자유의 테두리 안에서만 머물도록 조종당했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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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단지 그의 개인적 예술적 작품 표현만이 아니었다. 당시 제한된 자유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던 분위기에서, 연필과 종이를 통해서 거침없이 표현한 시도는 그에게 정치적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씌워주었다. 그러던 그가 인민전선을 통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 기회는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다. (다음 편에 계속) 

태그:#발트의 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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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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