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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테일러, <결혼하면 사랑일까>, 하윤숙 옮김, 부키, 2012.
▲ <결혼하면 사랑일까> 책표지 리처드 테일러, <결혼하면 사랑일까>, 하윤숙 옮김, 부키, 2012.
ⓒ 이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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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악한 책

<결혼하면 사랑일까>는 불륜(외도)을 다룬 책이다. 미국에서 발간된 책의 원제는 'Love Affairs: Marriage and Infidelity'다. 지은이 리처드 테일러 교수(철학박사)는 개정판 머리말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1982년), 제목만 보고는 읽지 않아도 내용을 다 알 수 있다고 여긴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이 책이 도덕을 뒤엎는 사악한 책이라고 확신했다.  -8쪽

이 책은 어떤 이들에겐 '사악한' 책일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머리말' 한 장을 넘기기 무섭게 도발(?)을 마주하게 된다. 테일러 교수는 부부간의 배신행위로 성적인 일탈만 중요한 것은 아님을 지적한다. 성적(性的)인 일탈만 문제삼으면 부부관계의 파탄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륜관계에 적합하게 대처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성적인 일탈이 제일 중요하지, 뭐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이냐?'하는 반발심이 올라오면, 기분이 상해서 이 책을 더 읽어나갈 수가 없다. 불륜에 대한 '나의 결론(결심)'의 가설과 근거들을 '다시 생각해볼까?' 하는 마음을 먹지 않으면 이 책은 순조로운 독서 자체가 힘들다. 원저자의 문장과 번역자의 번역문이 다같이 간결, 명료하여, 메시지 이해를 훌륭하게 인도함에도 불구하고. 

테일러 교수에 따르면, 부부 사이에 신뢰를 저버리는 '모든 행위'가 배신이다. 재산이나 동료에 관한 사실을 배우자에게 알리지 않는 사람, 자신의 사회활동을 배우자에게 감추는 사람, 배우자에게 무관심하고 무덤덤한 사람, 배우자 몰래 은행계좌를 관리하는 사람 등 모두가 배신한 배우자들이다.

우리 주위엔 이런저런 형태로 배신한 배우자와 함께 사는 부부들이 제법 많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부 사이에 외도 같은 배신만 없으면 부부관계는 큰 문제 없이 그래도 지속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 와중에 불륜은 다만 성적 일탈 문제로 축소돼 다루어진다. 성적 일탈은 관심을 초집중시키는 힘을 지닌다. 요즘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중인 것도 그런 면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부와 불륜과 성(性)

그런데, 불륜이 꼭 성적 일탈 사건이기만 한 건 아니다. <결혼하면 사랑일까>는 1979-1981년에 걸쳐 3년 동안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불륜 당사자들이 관계를 시작하고 또 지속하려는 의지를 공유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야말로 일회성 성적 일탈 행위는, 이 책이 논의하지 않았다.)
 
실제로 성관계는 불륜의 한 요소일 뿐이며, 불륜 당사자들에게도 부차적인 의미밖에 갖지 못한다. 사람에게는 성과 무관한 갖가지 욕구가 있다. 사람은 애정을 원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며, 존중감과 단순한 우정을 필요로 하고, 외로움을 달래줄 사람을 원한다. 이런 욕구 중 어떤 것이든 불륜의 강력한 토대가 될 수 있다. -77쪽

부부관계에서 성관계가 중요한 만큼 불륜관계에서도 성관계가 중요하다. 성관계를 떠나서는, 부부관계도 불륜관계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부관계가 오직 성관계로만 전개되는 게 아닌 것처럼, 불륜관계도 똑같다.

성적 욕구 외에 다른 욕구들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부부의 성관계가 지니는 의미는 줄어드는데, 불륜에서의 성관계도 마찬가지 현상을 보인다.
 
부부는 황홀한 느낌으로 서로의 품에 안길 수 있다. 이들이 누리는 황홀경은 다른 어떤 기쁨에도 비할 바 아니다. 그러나 비록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다른 욕구들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는 성관계의 기쁨도 오래가지 못한다. -61쪽

불륜관계는 말하자면 부부관계의 '짝퉁'을 표방한다. 성관계에만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까지도 부부관계를 복사한다. 그러나 짝퉁은 짝퉁일 뿐이다. 불륜이 부부관계의 짝퉁인 이유는 딱 하나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열정'으로 유지하는 관계라는 점.

불륜, 일탈의 기쁨?

허나 역설적이게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않은 열정이라는 속성 때문에 외도 즉 불륜은 '강렬한 매력'을 발산한다. 사회적으로 금지된 '짓'을 시도했을 때 그걸 성취했다면, 인간은 죄의식을 느낄 수 있지만, 반대로 내심 의기양양해지기도 한다. 우리 사회엔, 바람피운 사실을 은근히 자부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더구나 같은 짓에 참가한 파트너가 있으니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심정으로 인해 엉뚱하게 안도감 같은 것이 올라올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열정적인 사랑은 치명적인 파멸을 불러일으키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짜릿하고 즐거운 기쁨을 주는 것 또한 분명하다. -17~18쪽

결코 '불륜예찬'이 아니다. 이건, 부적절한 쪽으로 튈지라도 열정적 사랑의 기쁨을 갈구하는 일부 인간들의 욕구충족방식에 대하여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차마 파멸할지라도 사랑을 추구해야만 되겠다는 외고집, 혹은 자기대로 처절한 몸부림이 불륜이란 사건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겐 열정적 사랑에 대한 갈증이 있을 수 있는데 부부관계에서 그게 채워지지 않는다 해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두 불륜관계에 덜컥 들어서지는 않는다. 부부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불륜에 가담하지 않으려 절제하고 자제하며 스스로를 단속한다. 테일러 교수의 지적대로 그건 소심함 때문일 수도 있고, 양심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부부관계가 매우 행복하고, 매우 완벽한 경우도 불륜에 뛰어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완벽한 부부관계가 당연히, 충분히 많이 존재할 것이다. 물론 중년남녀가 서로의 걸음걸이를 얼마나 맞추는지, 식당에서 어떤 태도로 마주앉는지를 보며 부부인지 불륜인지 알아맞출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온 말도 아니겠지만.

<결혼하면 사랑일까>는, 존재론적 욕구로서 인간이 사랑의 문제를 다룰 때 얼마나 자주 실패하거나 좌절하는지를 파헤친다. 요컨대 이 책은 인간이 친밀한 관계에서의 욕구를 불건강하게 풀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륜의 문제를 다룬다.

불륜, 건강하게(?) 다루기

마지막으로 이 책은 불륜관계를 건강하게 끝내는 방안에 대하여서도 고민한다. '무조건 비난'도 아니고, '무조건 용서'도 아니며, '무조건 이혼'도 아니다.

테일러 교수는 제안한다. 먼저, 자각으로든 발각으로든 권태로든 무슨 이유로든 불륜을 끝내야 할 때에 불륜 당사자들은 서로를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을 이를테면 성중독자 같은 사람으로 치부한다고 해서 자기 불륜행위의 무게가 경감되진 않는다. 상대를 깎아내린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반면 배우자의 불륜을 알게 된 사람은 상대를 질투하고, 배우자를 공격하는 데에 시간을 쓰기 쉽다. 그러느라 좌절한다. 우울하다. 그보다는 자기자신의 품격과 생명력을 지키는 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용서하기로 결정했다면 불륜관계 뒤처리를 깔끔히 마무리하도록 배우자에게 여유를 주는 게 좋다. 용서하기로 했는데, 여유도 주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모순에 빠진 셈이다.

<결혼하면 사랑일까>는 그동안의 부부관계 안에 존재했었던 '건강한 근육과도 같은 사랑의 관계'를 꺼내어 긍정적으로 사용한다면 불륜의 상처가 치유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주의깊게 환기한다.  

또 이혼하겠다는 결심이 확고히 섰다면 다음의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변호사에게 이혼소송의 주도권을 전적으로 넘기지 말 것, 자신과 배우자의 필요를 스스로 분간할 것, 이혼에 따라붙는 부대사안들에 대하여 배우자와 합의할 것 등이다.

유책 배우자를 보란 듯이 벌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라도 벌주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유책 배우자를 벌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이혼소송을 진행하다가는, 적합한 벌을 상대에게 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공연히 자기자신이 더욱 무거운 심리적 상처 밑바닥에서 맴돌게 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불륜, 외면할 것인가? 이해할 것인가?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륜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토대를 확고히 지닐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불륜을 이해하면 (용납하거나 두둔하자는 게 아님!) 사는 동안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연루될지 모를 불륜관계를 건강하게 다룰 심리적 기반을 닦게 되기 때문이다.
 
불륜은 전쟁과 같다. 모든 사람이 이를 흥미롭게 여기지만 여기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심각한 파멸의 위험이 따른다. -352쪽

모든 사람이 흥미롭게 여길지라도 '나의 문제'가 되면 다만 흥미만으론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주제가 불륜이다. 배우자의 불륜이든 나의 불륜이든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제까지 맺어온 친밀한 관계를 다시 처음부터 검토해야 하는 지점에 봉착했다는 경계신호를 받은 것이다.

어떤 독자들은 '난 평생 불륜에 연루될 일이 없어!'라고 호언장담할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인생을 살지 모른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그렇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누가 내일 일을 장담할 수 있으랴?! 그러니, 외면하며 호언장담하기보다는 불륜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도모하고, 적합한 대응을 일별해두는 편이 좀 더 지혜로운 생활태도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기꺼이 첫 번째 안내서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하면 사랑일까 - 불륜에 숨겨진 부부관계의 진실

리처드 테일러 (지은이), 하윤숙 (옮긴이), 부키(2012)


태그:#결혼, #부부의 세계, #불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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