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23 18:55최종 업데이트 19.10.2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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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의 20년 후를 보려면 그 사회의 20대를 보면 된다. 사진은 패션디자이너를 꿈꾸는 청년들이 봉제장인들과 의상을 제작하고 있는 모습. ⓒ KT&G


[이전 칼럼] '함정'에 빠진 세계 경제, 다음 쓰나미에 준비됐나

청년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회

우리에게 몰려오고 있는 쓰나미에 대한 대비를 하려면 최소한 쓰나미가 어디에서 오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려면 환자가 겪는 고통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야만 가능하듯이 말이다. 즉 정부는 마음 착한 의사보다는 실력 있는 훌륭한 의사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의 병이 무엇인지 진단하는 것이 이번 칼럼의 목적이 될 것이다.


우리 경제의 병을 진단하는 방법 중 하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이 일본의 20대인 사토리(得道) 세대를 닮아가는 청년층의 아픔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현재 우리 경제의 문제는 (다수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 산업화 모델의 수명이 소진된 반면 그 다음 단계로 나갈 새로운 모델이 부재한 상황이 지속하는 데서 비롯하고 있다.

물이 계속 흘러야 하는데 물이 고인 연못과 같은 상황이 우리 경제와 비교할 수 있다. 새로운 기회를 기대할 수 없고 기존 자원은 이미 기성세대가 모두 장악한 상태에서 청년층은 질식사 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고여 있는 연못에서는 부모의 위치를 물려받거나 부모의 지원으로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강이나 바다로 진출하는 것인데 이것은 대다수 청년들에게 '꿈'에 불과하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도 번 돈을 건물주(기성세대나 금수저)에게 갖다 바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대다수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 청년층의 가장 큰 불만으로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는 배경이다.

한 사회의 20년 후 미래를 보려면 그 사회의 20대를 보라는 말이 있다. 20대가 어떤 꿈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그들이 40대가 되는 20년 후의 사회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경제의 현 상황은 불공정과 그와 맞물린 승자독식 구조로 사회 갈등이 심화되고 있고, 무엇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으로 압축된다. 왜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일까?

박정희 모델로 성장을 추구한 결과

산업화 시대의 목표는 성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장을 주도하는 산업생태계가 활력을 갖는 한 성장 과정에서 대다수 사람은 균등하지는 않아도 혜택을 입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선진국들은 중산층 사회를 만들어냈다. 우리 경제의 성장 방식은 선진국들과 두 가지 점에서 크게 차이를 갖는다.

첫째는 식민지형 '선택적 공업화' 방식에서 비롯한 서비스 부문의 구조적 취약성과 부품·소재·장비 산업의 구조적 취약성이다. 제조 제품의 생산과정은 크게 제품의 개념설계 역량, 부품·소재·장비 기술, 제조 기술 등을 요구한다. 그런데 후발주자였던 우리는 '축적의 시간'이 필요한 개념설계 역량이나 기초과학 연구의 뒷받침이 필요한 부품·소재·장비 기술의 확보 등은 선진국에 의존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제조 과정에 집중을 하였다.

기간별 성과를 중요시한 재벌 기업의 경영 방식이나 정부 정책 등으로 산업지식의 축적(산업 학습)에 필요한 프론티어 R&D의 지원이나 기능-기술 인력이 경험(암묵지)을 축적할 수 있는 인사승진-임금제도 등은 소홀히 취급되거나 외면되었다. 특히, 한미일 군사안보협력 체계를 위해 대미 수출과 연계된 일본의 부품·소재·장비에 대한 의존은 만성적인 대일 무역적자 및 일본에 대한 기술 종속성을 구조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기능-기술 인력의 경험(암묵지) 축적 실패의 결과는 자동화를 가장 빠르게 진행시키고 있다. 한국은 (노동력 1만명 당 로봇 도입 규모인) 로봇밀도가 세계 1위인 나라다. 이는 한국 노동자가 가진 숙련이 자동화에 취약한 단순 숙련임을 의미한다.

로봇 기술 및 산업이 발전한 독일, 미국 등이 자동화가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이유는 이들 국가의 기능-기술 인력이 현재의 자동화 기술로 대체되기 어려운 노동력임을 의미한다. 향후 AI형 자동화로 인해 고용 대참사 및 그에 따른 초양극화가 예상되는 부분이다.

둘째,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 혹은 한국 경제체제를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라고 일컫듯이 다른 선진국과 달리 한국의 공업화 및 성장 과정은 어두운 면을 수반하였다. (국가 주도로 국가가 육성하려는 산업을 지원하는데 금융을 주요 수단으로 삼았던) '일본식 산업화 모델'을 모방한 박정희 모델에서 산업정책은 정경유착을 수반하였고,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던 금융의 배분을 산업정책 목표와 연결시킨 정책금융은 관치금융을 수반하였고, 그 결과 성장은 부패와 동전의 앞뒷면을 구성하였다.

대표적인 '이익은 사유화, 손실은 사회화'시키는 방식의 공업화였다. 불공정 시스템의 구조화는 민주주의 결손에서 비롯한 것이었고, 민주주의의 결손은 냉전체제의 희생물이었던 한반도 분단의 산물이었다. 즉 군부독재 체제와 그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유신체제('민주주의 살해')와 '재벌 중심 경제체제'는 쌍생아였던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 체제가 권력의 정통성 결여를 물리력(신체적 폭력)과 금권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분단은 '한국식 경제력 집중'을 특징화하였던 것이다.
 

1992년은 한국 경제에서 제조업 인구가 처음으로 줄어드는 전환점이 되는 해이다. 사진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수출선적부두에 차들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압축적 탈공업화... 소득 상하위 10%가 대물림되는 사회

한국 경제는 (제조업 종사자 비중이 줄어드는) 탈공업화가 시작된 1992년 전환점을 맞이한다. 박정희 모델이 '압축적 공업화'였듯이 탈공업화 역시 압축적으로 진행된다. 즉 제조업 종사자 비중은 27.6%(1991년)에서 16.9%(2011년)로 감소하는데 20년이 소요된 반면, 일본의 경우 27.8%(1973년, 1974년 27.6%)에서 16.8%(2011년)으로 감소하는데 37~38년 소요되었다.

탈공업화는 일반적으로 일자리 증가율의 하락과 (중간 임금 일자리가 감소하는) '일자리 양극화', 즉 소득 양극화를 수반한다. 문제는 고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의 구조적 취약성으로 제조업의 일자리 감소가 저부가가치 서비스 부문으로 흡수되고, 그 결과 양극화도 악성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자영업 과당경쟁 및 자영업 영세성의 출발점이 된다.

게다가 1992년은 자본시장 개방과 한‧중 수교도 추진된다. 성장률 하락을 외국자본 유입으로 접근한 결과 외환위기의 단초가 마련된다. 그리고 중국 시장과의 연결로 저임금에 의존하는 소기업의 부도가 급증한다. 노동소득 비중의 하락과 그에 따른 내수 약화는 (세계화 흐름과 맞물려) 한국 경제를 수출 의존적 성장 방식으로 전환시킨다.

기업은 수출 경쟁력 확보와 인건비 절감을 위해 임금 인상 억제, 생산자동화로 고용 억제,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사용, 생산기지의 해외이전 등으로 대응한다. 대기업이 제조업 중간재를 해외로 외주화시키고 제조업 관련 서비스는 국내에서 외주화시킨 결과, 전자의 경우 국내 하청 중소기업의 수요 감소와 단가 하락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후자의 경우는 비정규직 노동력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국내 생산 공동화 및 일자리 감소를 우려한 정부는 환율과 법인세 인하, 규제 완화 및 노동시장 유연화 등 친기업 정책으로 대응하였다. 그 결과 내수는 더욱 취약해진다. 여기에 임금 불평등은 낮은 결혼율과 그에 따른 저출산 등 인구구조를 악화시키며 내수 취약성을 심화시킨다.

내수 취약성이 구조화될수록 수출은 절대선으로 자리를 잡는다. 경제의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격차 사회도 구조화된다. 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 격차, 임금근로자-자영업자의 소득 격차, 대기업-중소기업 종사자의 임금 격차 등이 그것들이다. 그 결과 오늘날 상·하위 10% 가구는 신분이 대물림되고 있다.

이처럼 1992년은 산업체계의 전면 개편에 대한 논의가 필요했던 분기점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세력은 '새로운 전환'보다 '신자유주의식 세계화' 전략('세계화를 통한 신한국' 건설)을 추종했고, 그 결과가 '외환위기' 및 (가계와 기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내수와 수출 등에서) 불균형 및 격차의 구조화였다.

즉 1992년은 '한국식 산업화' 모델의 분기점이라는 점에서 '97년 체제'(외인론)는 '87년 체제'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위험 공유와 불공정 분배' 시스템의 산물인 '박정희 모델'에 대해 민주화운동 세력의 해법은 정부 주도에서 시장 주도로 경제 운용을 전환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재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면죄부와 '사회적 자산'에 대해 배타적‧독점적‧절대적 재산권(미국식 사적 소유권)을 부여하는 오류를 범했을 뿐 아니라 '군부독재'를 '시장독재' 및 '자본독재'로 치환하였다.

즉 '87년 체제'는 낡은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시작을 필요로 했지만 '대안질서' 대신 '무질서'(예: 금융 시스템의 충돌과 외환위기)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눈으로 문제와 세상을 읽지 못했던 민주화운동 세력의 무능(예: 업종전문화, 부채비율 200% 룰, 동북아 금융허브 등)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반동의 시대'를 초래하였다.

즉 박정희 체제의 몰락으로 등장한 '87년 체제'가 '박정희 체제'의 부활로 이어진 역설에서 보듯이 '또 하나의 이식'된 근대 시스템인 '87년 체제'의 붕괴는 예고된 것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박정희 모델의 파산과 소득주도성장의 등장 배경에 대해 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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