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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터크만(Gaye Tuchman)의 말처럼 오늘날 우리는 뉴스라는 "창"을 통해 사회를 바라봅니다. 더욱이 소셜네트워크의 등장과 확산 속에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의 모든 것들은 뉴스거리가 되곤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들 혹은 이야기는 뉴스라는 창 밖에 머무르며 충분하고도 적절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대 사회과학연구소의 연구진들은 노숙인, 입양인, 난민, 유학생, 청소년, 참사피해자, 여성, 이주민, 비인간적인 것(nom-human) 등 그동안 손쉽게 지나친 혹은 잊혀진 다양한 뉴스 밖 사회의 풍경들에 관심을 갖고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총 8분의 사회학 전공자 및 연구자가 아래와 같은 주제로 글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 기자 말.

민족대명절 추석이 지났다. 오랜만에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많은 이들은 명절만이라도 모두가 행복한 마음으로 서로의 안부도 물으면서 가족과 함께 풍성한 날을 보냈길 기원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본인의 존재 자체가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옆에 실재하고 있는 수많은 해외입양인이 있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불쌍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낯설기만 한 존재이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지 않고, 더욱이 '(재외동포의 범주에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반적인 사회인식은 해외입양의 구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단지 불가피한 상황에 처한 아동이 새로운 가족을 찾아 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선택을 하게 된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

그렇기에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간혹 등장하는 해외입양인은 '불쌍하게' 자랐으며 '도와줘야' 하는 존재로 감성적인 측면을 강조하곤 한다. 이것은 심심치 않게 언론에 등장하고 있는 가족상봉을 '미담'으로 활용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생존의 위협에 직면했지만 해외로 입양되어 '좋은' 양부모를 만나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잘 성장하여 성공한 해외입양인은 '힘들어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을 이해'하고 낳아주신 가족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는 스토리는 해외입양인을 묘사하는 하나의 '전형(典型)'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언론의 논조는 해외입양의 구조를 은폐하고 입양을 바라보는 일반적 인식을 왜곡시키는 한 요인이 된다. 이렇듯 깊숙이 각인된 인식은 현재 입양특례법을 둘러싼 논쟁에서 요보호아동을 위해 입양특례법의 절차적 복잡성 등을 이유로 해외입양이 힘들어진 상황을 비판하며 해외입양은 지속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과 관련된다.

해외입양의 출발은 전쟁으로 인한 폐해로 발생한 전쟁고아를 위해 부득이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일견 이해할 수 있지만, 이와 함께 더 나아가 혼혈아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민족주의와 깊숙하게 관련된다. 일국일민주의를 내세웠던 이승만 정권은 혼혈아동은 '아버지'의 국가로 보내는 것을 정당한 행위로 받아들였고 해외로 입양 보내는 것으로 실행시켰다.

그들은 혈연주의가 강한 한국사회에 동화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로 아동을 위해서라도 해외의 새로운 가족에게 보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방침과 시간의 경과로 혼혈아동이 감소하게 된 산업화 시기 국가는 역설적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해외입양을 장려했다.

이는 1968년 호주 방문 당시 영부인 육영수의 '한국에는 땅은 적고 인구가 많아 아직도 많은 고아가 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외국으로의 입양장려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언술에서 사회적 인식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은밀한 사적영역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입양은 하나의 사업이 되면서 국가가 일종의 산업정책으로 주도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사회는 가족에 대한 강한 '표준적' 규범이 작동하면서 이른바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정상 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난 경우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출산한 '미혼모' 가족이 대표적인 예인데, 현실에서 발생하는 차별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안으로 엄마와 자녀를 분리하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현재 입양의 발생 유형에서 미혼모가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결국 사회의 지탄과 멸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유가 발생할 경우 해외로 보내질 개연성이 높아진다. 입양, 특히 해외입양은 국가의 책무를 방기하며 입양기관의 이익을 위한 조치였음은 입양의 절차를 간소화하였던 것에서도 이미 드러난다.

입양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차원에서 입양절차를 강화하기 보다 완화하였던 움직임은 현재 입양특례법 개정을 요구하는 진영의 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 입양특례법이 오히려 입양을 방해함으로써 보호가 필요한 아동의 이익을 국가가 외면하고 있다는 주장은 입양에 대한 일반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입양정책은 일관성을 갖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데, 초기 고아와 혼혈아동의 해외입양의 법적 근거를 위한 특례법이 제정되었고, 이후 국내입양활성화를 위한 방향으로 전환하였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해외입양을 금지하는 계획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입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고 귀환한 해외입양인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해외입양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강조할 필요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모든 아동은 태어난 가정에서 친부모에 의해 자랄 수 있도록 '국가가 노력'을 해야 하며, '해외보다는 가능한 태어난 나라에서 가정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의견을 피력하는 등의 입법활동도 활발했다.

그렇지만 그 목적은 계속해서 유보될 수밖에 없었으며 해외입양의 절차적 조건을 강화한 제도적 조치를 오히려 아동유기의 증가, 열악한 아동양육시설 등 요보호아동의 인권이 더욱 침해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주장을 기초로 해외입양이 가능하도록 완화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한편에서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가장 많은 해외입양인을 보유한 국가이다. 그럼에도 해외입양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낮은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 본인과 무관한 사안이며 그저 개인적 상황에 의해 개인간 이루어지는 사적 영역의 일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런 현실은 입양과 관련된 이들만 관심을 갖는 영역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당사자인 해외입양인과 국내 입양부모 간 인식의 차이가 발생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아이들 파는 나라>(전홍기혜 외 지음)는 해외입양은 국가에 의해 발생한 처참한 인권유린의 폐단을 고발하고 있으며 <왜 그 아이들은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나>(아리사 H. 오 지음)는 아동의 최선의 이익이라는 가치를 내걸고 해외로 보내는 담론 이면에 숨겨진 욕망을 폭로하고 있다. 스파(Debora L. Spar)는 <베이비 비즈니스>(2007)에서 '우리는 분명히 아이들을 매매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해외입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해외입양 구조의 한 축의 역할을 하는 국가가 가장 중요한 책무가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애써 잊고 지낸, 그리고 부정하려고 한 해외입양의 실태는 국가의 폭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규모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사회는 해외입양의 본질적 속성은 은폐한 채 인류애를 실천하는 사랑의 한 행위라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입양은 사랑의 행위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입양은 나락에 떨어진 한 아동에게 긴급구호를 위한 조치일 뿐 아니라, 온전히 아무런 대가 없이 타인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그렇기에 입양, 특히 해외입양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시각은 복합적이다. '성공'해서 돌아온 입양인에게 자기 일처럼 기쁨을 표현하기도 하고, 입양인의 자살 등 안타까운 사연에는 슬픔과 미안함을 표현하곤 한다.

이런 현실은 감정적 동화가 강한 우리 사회의 한 측면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감성적이고 동정적으로 바라보는 일반적 상황은 입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입양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지 못한 채 각 사례마다 다르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해외입양 역사를 돌이켜보면 국제사회에서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겨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세계 경제의 주도적인 위치에 있으면서도 해외입양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 해외입양을 부끄러운 사건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깔려있지 않다. 단지 개인의 불가피한 사정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 해외입양을 인식하는 것이 주류적 시각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책임은 막중하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외면하였던 해외입양인이 가시적 존재로 부각된 것은 해외입양인이 정체성을 찾아 한국을 찾으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안에서 인권 대통령을 자임했던 김대중 정부는 처음으로 해외입양인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국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여전히 국가는 해외입양으로 인한 문제를 외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성공한' 해외입양인을 중심으로 민간차원의 외교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오히려 한국인의 정체성과 민족성을 강조하며 양국의 관계를 매개하는 가교의 역할을 담당하는 민간대사로 활용하고자 함으로써 해외입양인의 삶에 가닿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우선 고려할 뿐이었다.

그 결과 이후에도 해외입양은 지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해외입양을 바라보는 단편적이고 왜곡된 인식은 감소하지 않고, 국내입양인식의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근태는 해외입양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고, 박근혜 정부에 이르러서는 헤이그아동협약에 서명하는 등(비준은 아직 하지 않음) 변화의 움직임은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2017년 이낙연 국무총리는 해외입양 관련 기관에 감사의 편지를 보내는 등 현재까지 해외입양이 지속되는 현실을 타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기인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입양된 국가에서 추방되어 돌아온 해외입양인이 해외입양의 구조에서 일차적 책임은 국가에 있음을 제기하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에 사법부는 어떤 판단을 내리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국가는 아이의 미래를 위한 조치였다고 책임을 회피하지만 이로인한 피해는 상상하기가 힘든 엄청난 규모이다. 모두가 행복한 입양문화를 정착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진정 어린 사과가 필요하다. 그럴 때 모두가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선에 설 수 있지 않을까.

저출생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정책과 예산을 확대하는 현실에서 가족의 가치를 되돌아보고 국가에 의해 가족과 분리된 존재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친가족과 분리되어 입양을 가게 된 상황이 잘못된 것임을 뜻하지 않는다. 왜 해외로 입양을 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가는 본연의 역할을 다했는가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 안에서 왜 국가는 궁극적으로 해외입양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그에 따른 최선의 정책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도 되짚어야 할 것이다. 해외입양을 둘러싼 잘못된 관행은 국가의 노력 없이는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날 뿐이다.

당위적인 말의 반복이지만 입양은 무엇보다 부모가 될 성인이나 관련 단체의 이익이 아니라 아동의 이익이 최우선이라는 가치에 입각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입양 대상이 되는 아동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의 책임 있는 개입은 필요한 것이다. 이때 개입은 철저하게 인권에 기반한 접근이어야 한다.

민족의 최대명절인 추석을 보내고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이 다가오는 지금 다시 해외입양을 생각하며 일년 중 단 하루라도 풍성하고 행복이 깃드는 날이었으면 하는 모든 이의 바람이 진실로 실현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태그:#해외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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