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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9일부터 5월 12일까지, '청년선비 탐방단원'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청년 20명이 아리랑스쿨과 한국국학진흥원 인솔 아래 중국 항주와 상해로 떠났다.

그들이 중국으로 떠나게 된 경유는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점에 있다.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독립운동가들이 직접 밟았던 땅을 몸소 걸어보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떠나기 전, 20명은 4개의 조로 나누어져 조 이름과 구호를 구성했다. 또한, 상해에 가서 어떤 식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기릴 것인지에 대해 상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작성자 본인이 속한 조의 이름은 과거와 현재를 잇다라는 뜻을 가진 '이음'으로 지었다. 다른 조들 또한 프로그램 성격에 걸맞는 멋진 이름과 구호를 만들어왔다. 
 
출국 전부터 모셔간 청년선비 탐방단원들이 조사한 독립운동가. 위에서 왼쪽부터 정정화 선생님, 김규식 선생님. 아래에서 왼쪽부터 박찬익 선생님, 이규갑 선생님, 방순희 선생님. 선생님들 모두 약 백 년전, 조국을 위해 상하이를 방문하셨다.
 출국 전부터 모셔간 청년선비 탐방단원들이 조사한 독립운동가. 위에서 왼쪽부터 정정화 선생님, 김규식 선생님. 아래에서 왼쪽부터 박찬익 선생님, 이규갑 선생님, 방순희 선생님. 선생님들 모두 약 백 년전, 조국을 위해 상하이를 방문하셨다.
ⓒ 홍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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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큰 미션이 있었다. 바로 잘 안 알려져 있는 역사 장소들을 '우리만의 방법으로 특별히 기억하는' 미션이었다. 그 장소들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의 책 <임정로드 4,000km>에 자세히 나와있었고, 사전 오리엔테이션 당시 기자님으로부터 상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점에서 미리 읽어 오거나 상해로 책까지 들고온 단원들 덕에 미션 장소에 대한 걱정은 덜수 있었다.

청년선비 20명 모두 저마다의 아이디어를 내 각기 다른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자료를 남겨왔다. 몸소 그곳에 가 독립운동가들을 '우리만의 방식'으로 기린 덕에 오늘날까지도 그 현장은 잊지 못한다.  
 
상하이 임시정부 첫 번째 청사 추정지, 회해중로.
 상하이 임시정부 첫 번째 청사 추정지, 회해중로.
ⓒ 홍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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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을 수행하는 탐방단원들의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두 번째 청사가 있었을 법으로 짐작되는 회해중로(Middle Huaihai Road)의 길목에 위치한 카페 안에 들어간 작성자와 조원들은 대한민국 민주공화제 정부가 탄생한 회의를 재연해보았다.

"대한제국의 대한은 그대로 사용하되,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라는 의미를 담아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음을 선포합시다"고 조원이 외쳤을 땐 마치 순간이동을 하여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을 눈 앞에 보는 듯했다. 그때 그 감동을 그대로 옮겨 올 순 없어도 1919년 4월 11일, 역사적인 순간을 재연해보는 것만 해도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전해졌다. 
 
상하이 임시정부 첫 번째 청사 추정지에서. 지금은 옷가게로 바뀌었지만, 그당시 삼일운동 이후 국내외 조직된 세 정부가 통합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첫 번째 청사 추정지에서. 지금은 옷가게로 바뀌었지만, 그당시 삼일운동 이후 국내외 조직된 세 정부가 통합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 홍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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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나와, 지금은 옷가게가 되었지만 당시 첫 의정원 회의가 열렸던 김신부로 청사 앞에서 '우리만의 의미'를 담아 사진을 남겼다. 이 앞에서 세 정부(상하이 임시정부, 한성정부, 노령정부)가 한 정부로 통합되었으니 세 개의 태극기를 모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1919년 9월 11일, 통합된 날짜를 표현하였다. 이때, 9는 중국어 손가락 숫자로 두번째 손가락을 구부러 표현하였으며 11은 기본 숫자 표기로 나타냈다. 
 
예관 신규식 선생의 거주지였던 곳에서 직접 제작한 배너를 들고.
 예관 신규식 선생의 거주지였던 곳에서 직접 제작한 배너를 들고.
ⓒ 홍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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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예관 신규식 선생의 거주지였다. 예관 신규식 선생의 거주지라 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전해들은 우리는 상해로 떠나기 전, 직접 팻말을 제작해갔다. 콘서트에서 흔히 볼 법한 배너에 '예관 신규식 선생과 마주보는 우리'라는 문구와 예관 신규식 선생의 캐릭터화된 사진을 함께 넣었다.

팻말을 제작해 그의 집 앞에 서서 잠시 그를 기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선생님, 이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었으니 저희와 마주 보아요"라는 메시지를 담아 짧은 영상을 제작하였다. 영상에서는 선글라스를 쓴 조원이 예관 신규식 선생의 역할을 맡아 현대인의 역할을 맡은 이와 마주보고 손을 잡다가, 선글라스를 벗고 함께 앞을 보았다. 지난 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들게 혼자 투쟁했을 예관 신규식 선생이 눈 앞에 어른거려 자꾸만 눈 앞이 흐려졌다. 

미션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선생이 시계를 교환했던 장소에 다다른 후, 조원들과 작성자는 주섬주섬 각자의 주머니에서 미래의 시계를 꺼냈다. 바로 스마트폰이었다.

김구 선생을 맡은 조원과 윤봉길 선생을 맡은 조원이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스마트폰을 바꾸는 상황을 영상으로 담아 보았다. 여기서 단지 행동뿐만 아니라 윤봉길 선생의 대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선생님, 제 시계와 바꿉시다. 제 것은 어제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한 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여담으로 김구 선생을 맡은 조원은 작성자 본인이었는데 2원짜리인 시계 또한 내 스마트폰이었다. 
 
김구 선생 거주지였던 영경방 10호
 김구 선생 거주지였던 영경방 10호
ⓒ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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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을 두번째로 만난 곳은 그가 거주했던 영경방 10호였다. 영경방 10호의 위치는 놀랍게도 상해에 온다면 꼭 들리는 곳,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인 신천지 카페거리에 자리해있었다.

전날 밤 머리를 맞대고 짠 영상 콘티를 들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촬영하기란 워낙 쉽지 않았다. 그러나, 차근차근 김구 선생의 일대기를 카메라 안에 담아보기 시작했다. 힘차게 독립을 위해 싸우자고 외쳤던 김구 선생, 잠시 가흥으로 피한 김구 선생, 광복군을 창설한 김구 선생을 각자 돌아가며 맡았다. 작성자 본인은 그 다음 김구 선생이 남겼던 글을 외워 낭독하였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하라." 

마지막 미션 장소, 상해 임시정부 마당로 청사에서는 이번 탐방을 위해 조원들이 각자 모셔온 독립운동가들을 하나 둘씩 꺼내 그들과 함께 서보았다. 대한민국 독립을 향한 숨은 조력이었던 그들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일구어낸 독립으로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국민으로 살고 있다. 일상마저 힘들었을 그들이 가슴 속 품고 있었던 태극기는 이제 마음껏 흔들어도 된다. 그당시 독립이라는 단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상해, 항주 또 기타 중국 지방으로 떠났던 청년들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힘차게 태극기를 흔들었다. 

태그:#독립운동가, #상해임시정부, #31운동100주년, #임시정부100주년, #백범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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