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광주문화방송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비운의 천재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2015년 12월 광주문화방송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비운의 천재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 광주문화방송


정부은, 유대진, 황청해, 김중민, 정율성.

이 다섯 개 이름은 모두 동일 인물이 한 생애에 걸쳐 차용한 본명 또는 가명들이다. 위 성명의 주인공은 '아름다운 선율로 인민의 목소리를 반영 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마지막 가명 '정율성'을 스스로 작명했다. 그리고 평생 아름다운 선율로써 인민에게 복무하는 삶을 살았다. 반도에서 나서 음악으로써 대륙을 정복한 그는 진정한 한류스타의 원조이자 현재까지도 13억 대륙인민을 고정 팬으로 거느린 가장 성공한 해외진출 예술가이다.

1인 5명의 기록이 보여 주듯 곡절 많은 생애에 3개국 국적을 취득한 바 있고 그 중 두 개의 조국에 공식군가를 헌정했다.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여러 국가와 도시, 거주지를 전전했다. 큰 동선 표로 그리자면 광주 무등산 자락 아래서 나고 자라 연안 보탑산 언저리에서 머물다 북경 팔보산 품에 잠들어 있다.

그의 유년시절 가족환경은 독특했다. 하동 정씨 가문의 장성한 자식들은 일정 나이가 차면 순번대로 집을 떠나 고행 길을 자처했다. 가출한 자식들의 목적지는 조국독립을 도모하기 위한 망명지 이국땅이었다. 가장인 아버지는 그런 자식들의 위험한 선택을 적극 권장하거나 독려했다. 불령선인 가족에게는 항상 삼엄한 경비와 감시가 따랐고 체포, 도피, 망명, 투옥, 실종, 죽음 등의 불운이 가족을 번갈아 지배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난과 공포도 그 가족의 고집스런 유전자를 꺾진 못했다. 조국독립운동의 과업은 가족 3대가 동참하는 가업이 되었다.

정율성에게 흥미로운 장소였던, 상해 누나의 집

그런 가풍에서 갓 스물이 되는 막내아들의 진로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형제들의 전철을 밟아 독립운동가의 가업을 계승해야 할 운명이었다. 연이은 가족들의 투옥과 죽음, 옥바라지 등으로 가세는 극도로 기울고 그 많던 재산은 진즉 거덜이 나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마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학업마저 중단한 상태였다. 그런 형편에 남은 가족의 생계와 가문의 존속을 위해 남겨 둬야 할 마지막 동생마저 조국독립의 제단에 바치려는 것이 불쑥 집을 찾은 형의 계획이었다.

의열단 호남 모집책 임무를 띠고 국내에 잠입한 셋째 형 '의은'의 포섭 대상 1순위는 막내 동생 '부은'이었다. 그 전 모집 임무에는 누나 '봉은'을, 이번에는 동생과 역시 독립운동 여파로 사망한 형이 남긴 조카까지 두 명을 조직에 가담시키는 게 목표였다. 형의 명령에 동생과 조카는 순순히 응했다. 그 가족의 가계도는 유명 독립운동가 가문과도 사돈, 친인척 관계로 촘촘히 얽혀 있었다.

목포항을 출발하여 상해로 향하는 배 선상에서 '정 부은'은 첫 가명 '유대진'이 되었다. 조국을 떠나 기약 없는 이별을 하는 청년의 가슴에는 유일한 소지품인 두 개의 악기가 소중하게 안겨 있었다. 3.1 운동 후 망명하여 혁명군으로 싸우다 사망한 둘째 형의 유품, 만돌린과 바이올린이었다. 악기를 잘 다루는 것이 가족의 공동 취미이자 특기였다.

난징 의열단 부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신입생 생활은 고됐지만 사상, 정치, 군사교육에 임하는 학생들의 학구열은 치열했다. 의열단 간부, 존경하는 애국지사들의 방문과 격려 그리고 감동적인 연설은 학습과 훈련의 고단함을 씻어 주었다.
상해와 난징을 오가며 첩보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간부학교 졸업 후 그에게 배정된 첫 임무였다.

부부 선배 독립운동가인 누나의 상해 집은 정율성이 다양한 인물들과 사상을 접하고 교류하는 흥미로운 장소였다. 그곳에서 그는 조, 중 주요 독립운동 지사들을 수시로 접했고 그들의 사상을 경청하며 의식을 확장해 나갔다. 그때 그는 이미 주변으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중국내의 조선독립운동 현실을 목격하고 미래를 모색하던 그는 최종적으로 연안을 택했다.

홍군의 대장정 종착지 연안이 율성이 이탈리아 유학이라는 강한 유혹을 뿌리치고 선택한 정착지였다. 적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채 궁핍하고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연안은 율성에게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여겨졌다. 연안 공동체는 혁명가, 예술가를 꿈꾸는 청년에게 매력적인 도시였다. 공산당 지도부가 주둔한 혁명도시였고 인민이 주인인 해방구였다. 다양한 부설기관과 시설이 운영되어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학습과 훈련을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유격대원을 양성했다.

초보 음악학도 정율성, 빈 오선지를 펼치다
 
 2015년 12월 광주문화방송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비운의 천재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2015년 12월 광주문화방송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비운의 천재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 광주문화방송


정율성은 한 손에 총을 한 손에 만돌린을 든 형국으로 음악과 학습, 훈련에 임하고 노동과 소임에 응했다. 그것이 연안 인민구성원들의 평등한 일상이었다. 루쉰예술학원 음악부 학생 정율성은 성악과 악기연주 등 음악적 재능을 두루 갖췄지만 그의 주력 분야는 작곡이었다. 작곡은 인민을 단결시키는 수단인 노래를 제작, 보급하는 일에 요구되는 재능이었다. 초보 음악학도 정율성은 운명적으로 빈 오선지를 펼쳤다.

언어로 분출되는 인민들의 열정과 투혼 분노와 의지는 모두 정율성의 오선지 안에서 가장 어울리는 음표를 달고 생명을 얻었다. 단조로운 단어와 문장이 정율성의 악보를 거치면 고저와 장단, 느리고 빠른 호흡과 음색을 지닌 한 편의 노래로 탄생했다.

그렇게 리듬을 갖춘 노래들은 연안 협곡을 넘어 태항산 유격대원들의 전선을 맴돌다 잠든 인민들의 양심을 깨우고 이름 없이 쓰러져간 항일 전사들의 넋을 위로했다. 연안에서 선창된 노래는 유격대, 인민, 조선동포들의 목소리를 싣고 중국전역으로 흩어졌다. 노래의 파급력은 빛의 속도와 위력을 능가했다. 인민들은 연안에서 실려 오는 선율에 감동하고 합창했다. 노래로 당과 인민이, 유격대와 사령부가, 도시와 촌락이, 아이와 어른이, 남과 여가 소통하고 교감하는 경이로운 감동이 중국대륙을 휩쓸었다.

인민작곡가 정율성의 명성은 중국을 넘어 멀리 해외까지 유명세를 떨쳤다. 정율성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콩나물 장사'는 연일 대성공이었다. 그가 완성한 노래는 모두 악보도 없이 입에서 입으로 대 히트를 했다.

정율성의 노래는 누구보다 조국을 잃고 팔로군 소속으로, 물 속의 소금처럼 녹아 있는 조선혁명군들 그리고 조선독립운동가들에게 가장 큰 위안과 힘이 되어주었다. 전 인민이 합창하는 노래의 작곡자가 다름 아닌 조선인 출신 정아무개라는 소문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조선청년 작곡가는 모든 전선의 전설이었다.

머잖아 중국 전 인민이 조선 출신 청년의 열혈 팬이 되었고 대륙전역은 그의 항일 노래가 울려 퍼지는 상설공연장으로 변했다. 이로써 '아름다운 선율로써 인민에게 이바지 한다'던 '정율성'의 바람은 이른 시기에 충족되었다.

어느 한여름 밤 음악회에서 시작한 대륙 정복의 기적
 
 2015년 12월 광주문화방송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비운의 천재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2015년 12월 광주문화방송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비운의 천재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 광주문화방송


정율성의 공헌으로 연안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인민의 호감과 신임은 날로 두터워졌고 연안 촌은 예술적 전성기를 구가했다. 연안에서 발원한 정율성의 음악은 산과 강과 들을 지나 다시 거대한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수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이 정율성 음악에 도취되어 연안으로 왔다. 수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이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노래의 음원을 찾아 합창하며 연안 해방구로 들어왔다.
 
한반도 청년의 대륙 정복의 기적은 어느 한여름 밤의 음악회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 밤 연안 대례당에서 개최된 음악회에서 노신예술학원 음악부 학생 정율성은 자작곡 '연안의 노래'를 동료 여가수와 듀엣으로 합창했다. 노래의 시작과 끝 그 몇 분간의 간격을 두고 그의 운명은 무명의 음악학도에서 유명 천재 음악가로 바뀌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음악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관객들은 수준 높은 음악에 대한 벅찬 감상평을 전원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장내 관객들은 천재 음악가의 탄생을 길게 이어지는 박수로 선언했고 예기치 않은 관객의 반응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무대 위의 가수이자 작곡가인 정율성 본인이었다.

변변한 악기 하나 없는 연안 환경에서 만돌린으로 음을 잡고 돌조각으로 장단을 맞춰 만든 곡이었다. 환호하는 객석의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흥분하여 열정적인 박수를 보내는 이는 공산당 주석 모택동과 당 수뇌부들이었다. 연안 대강당을 충격으로 몰고 간 히트곡 '연안송'은 정율성의 데뷔곡이자 불멸의 히트곡이 되었다.

'연안송'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정율성은 이어 발표하는 곡마다 대히트를 하면서 인민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특히 '팔로군 대 합창' 시리즈의 두 번째 곡인 '팔로군 행진곡'은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해방군 군가'로 공식 지정되는 영예를 안았고 당시에도 연안송과 더불어 가장 유행하던 행진곡이었다. 투쟁과 저항이 일상이던 전시상황에 '팔로군 행진곡'은 유격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인민들의 일치단결을 호소하는데 가장 적합한 노래였다.

정율성이 제조한 노래들은 일제에 신음하는 전 인민들에게도 서로를 이어주는 신호음 같은 것이었다. 정율성의 노래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다 같이 합창하는 한 일본제국주의 타도의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13억 대륙인민을 고정 팬으로 거느린 천재 음악가

정율성은 인민의 고통과 희망에 영혼으로 교감하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인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울분과 고통, 함성과 절규를 절대음감의 옥타브로 오선지에 재연했다. 태항산 전투 참전과 후방공작 임무 그리고 교육과 선전 분야 등의 다양한 경험은 그가 인민을 위한 예술을 펼치는데 유익한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유격대의 총성과 연안 강가의 잔잔한 물소리가 한 악보 안에 공존하는 능력, 작품의 질을 받쳐 주는 단순함과 세련됨의 일치, 예술성과 실용성이 균형을 잃지 않는 감각 등 정율성의 작품들은 그의 뛰어난 실력을 입증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정율성의 행진곡은 경쾌하면서도 비장하고 동요는 깜찍하면서도 의젓하다. 또 노동요는 진지한 듯 익살스럽고 연가는 슬프고도 감미롭다. 이런 음악적 완성도는 늘 한 손에 총을 한 손에 오선지를 들고 토굴과 현장, 이론과 실전, 전선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고 고민한 결과였다.
 
13억 대륙인민을 고정 팬으로 거느린 천재 음악가지만 그가 받은 정규음악교육은 노신예술학원 6개월 코스가 전부였다. 상해 의열단 첩보활동시절 은퇴한 교수에게 주 1회 과외 지도를 사사한 것 외에 그는 고학생이었다. 예향 광주에서 나고 자랐고 음악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이었던 외가를 드나들며 습득한 음악적 감수성이 훗날 천재 음악가로서의 그를 가능하게 한 토대였다.

정율성은 작곡, 성악, 연주, 지휘, 교습 등 분야를 막론하여 두루 능통했다. 행진곡, 노동요, 가극, 동요, 민요, 등 다양한 장르의 총 360여 곡의 유작을 남겼다. 중국국가의 공적인 행사나 기념식, 모임 등 음악이 동원되는 의전에는 반드시 정율성의 노래가 삽입된다고 한다. 정율성, 그는 갔지만 그의 선율은 여전히 남아서 인민의 삶에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정부가 수립된 이래 이국의 청년이 헌정한 '인민해방군 군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식 군가로 여전히 대우받고 있다. 그리고 군가의 작곡가는 중화인민공화국 혁명열사릉에 당당히 안치되어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친일행적이 뚜렷한 작곡가에 표절정황이 확실한 곡을 여전히 애국가로 고수하고 있다. 친일파, 파시스트 옹호자가 너절하게 베껴놓은 불량 작품을 애국가로 제창하면서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그리고 역사를 대하는 자세만큼은 두 체제 간 차이가 두드러진다.

전 가족을 험난한 독립운동 길로 이끈 불행한 유전자
 
 2015년 12월 광주문화방송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비운의 천재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2015년 12월 광주문화방송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비운의 천재음악가 정율성의 선택> ⓒ 광주문화방송


정율성 그는 지금 영광스런 혁명열사릉에 잠들어 있지만 혁명가로서 그는 평탄치 않았다. 어느 시기, 체제에서도 외로운 외지인이었다. 연안의 소수자 조선인으로 노골적인 차별과 편견, 일본 특무 혐의에 시달렸다. 배신자로 낙인찍힌 동포 운동가 '김산'과의 친분도 삼가야 할 만큼 불안한 처지였다.

그러나 비밀처형장으로 향하는 김산의 마지막 십리 길을 그는 배웅했다. 부당한 위협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신의를 지키는 우직함. 그것은 전 가족을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고 세속적으로 가문이 멸망에 이르게 한 불행한 유전자였다.

자신이 믿고 선택한 체제의 조직으로부터 받는 오해는 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연안의 무분별한 정풍운동과 혁명정부수립 후의 문화대혁명의 광풍은 그의 예술 활동에 커다란 공백기를 남겼다. 어느 조직에나 존재하는 일부 좀벌레 같은 세력들의 사악한 음해와 공작은 인민을 위해 이바지하고자 하는 그의 진정성에 회의를 안기곤 했다.

적대적 환경에 맞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음악작업에 더욱 매진하는 것이었다. 끌어 오르는 억울함과 울분을 음표와 기호로 풀었다. 노선과 계파, 파벌 간 갈등으로 심화된 엇박자와 불협화음을 타개하길 바라는 그의 바람이 오선지 안의 길고 짧고 높고 낮은 박자와 음정 쉼표와 마침표로 화음을 이루어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그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마냥 우호적이고 편안한 환경에서 제작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연안 구성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으로 치러야 했던 비판과 비난의 심판대에 오로지 작품으로 소명했다. 음악은 그가 지닌 유일한 무기이자 구원이었다.

대한민국이 배출한 천재 음악가 정율성의 생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먼저 그의 작품 몇 곡을 감상해 볼 것을 권한다. 동영상 플랫폼에서 그의 대표곡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중국말에 서툰 것은 그의 음악을 감상하는데 지장이 되지 않는다. 낯선 중국어 가수의 열창 속에 그 옛날 연안의 토굴 요동 안에서 조선인 청년 정율성이 음악 부호를 매개로 21세기 대한민국 동포의 가슴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나는 민중을 위해 쓴다. 그들의 단순한 두 눈 내 시를 비록 읽지 못할지라도 내 삶을 흔들었던 곡조, 한 줄의 시구 그들 귓가에 닿을 날 있으리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말처럼 중국어 노랫말은 알아들을 수 없을지라도 조국 잃은 청년의 울분과 외로움에 공감하고 동포애에 젖기에 언어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조국을 떠나 낯선 타국의 이름 없는 협곡에서 외국어에 선율을 실어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고 인민의 해방을 부르짖는 동포 청년의 당시 심경이 아무런 장애 없이 전달되어 온다.

정율성 가문이 통째로 역사에서 배제된 이유

경성에 이회영 일가가 있다면 호남에는 정율성 가문이 있었다. 명문가로서의 기득권과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점령국의 횡포에 맞서 재산상 손실과 신변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가족차원의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정황까지 유사하다. 다만 정율성 가문이 통째로 역사에서 배제된 것은 정율성 이름이 갖는 금기의 비중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남한이 아닌 북한행을 택했고 다시 중국 귀화인으로 생을 마감한 격동기 운동가의 선택은 그와 조국 사이에 큰 간격을 조성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몸담은 조직의 결정에 순응했을 뿐 그의 선택이 어느 한 체제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나 극단적인 적대의 결과는 아니었다. 실제 정율성의 삶에서 노선, 조직, 당 위에 존재하는 최우선 개념은 국가라기보단 인민이었다.

그는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인민이 주인 되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가장 근접한 노선을 따랐던 연안 행이 그를 조선민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니 하는 국가형태로 이끌었을 뿐이다. 특정 체제에 대한 찬양이나 배척은 그의 주된 신념이 아니었다. 따라서 남한, 북한, 중국이라는 국가명이 그에게 얼마나 하찮은 구분이었는지를 알기는 그의 삶을 조금이라도 애정을 갖고 관찰하면 이해하게 되는 일이다. 그런 그였기에 어느 체제 내에도 온전히 융화하지 못한 이방인이었고 고국에서조차 잊힌 존재였다.

한중 우호분위기는 정율성의 존재를 고국에 되돌려 주었다. 대한민국이 배출한 천재 음악가의 진가를 뒤늦게 접한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지역 출신 음악가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관심과 자긍심은 더욱 두드러졌다. 광주 출신 천재 음악가를 기리고 홍보하기 위한 지자체 차원의 각종 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율성 음악제와 행사가 제정되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지정되고 생가 터 보존, 기념물이 조성되는 등 '정율성'은 지자체가 탐내는 문화상품으로 떠올랐다.

광주 동구, 남구, 화순 등 그의 이미지를 선점하려는 지자체간 과열 경쟁이 한때 지역 내에 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반세기 넘는 동안 적국으로 분류되었던 두 국가의 군가를 작곡한 인물에 대한 집착과 경쟁은 그동안 이념적 편견 때문에 존재감마저 부정 당해야 했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시류에 편승하는 현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2015년 12월엔 광주 MBC에서 <비운의 천재음악가 정율성의 선택>이라는 고마운 다큐를 내보내기도 했다.

자신으로 인한 고향 지자체들의 다툼과 분쟁은 문화혁명 숙청으로 말년을 쓸쓸하게 낚시로 소일해야 했던, 반목과 질시의 가장 큰 희생자였던 음악인 정율성이 바라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연안시절 그는 궁핍한 환경에 생계도구였던 바이올린을 팔아 딸이 마실 산양 젖 값을 대야 했다. 형의 유품으로 고향 광주에서부터 품에 지녔던 바이올린을 팔아 딸의 목숨을 샀다. 그의 딸 이름 '샤오티친'은 바이올린의 중국식 발음이다. 형의 유품을 팔아 딸의 목숨을 구해야 했던 절박했던 시절에 대한 각성으로 그는 딸 이름을 '샤오티친'으로 지었다.

예술가, 혁명가로서의 일생에 영광과 시련, 명예와 고난이 교차하는 삶이었지만 아름다운 선율로써 인민에게 복무하리라던 맹세를 그는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 세기가 다 하도록 정율성 이름은 중국인민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음표, 도돌이표 같은 기호가 되었다. 그래서 중국인민들은 여전히 그를 기리고 그의 노래를 부른다. 도돌이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부르고 다시 반복하여 부르길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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