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07 14:17최종 업데이트 19.02.07 14:17
봄이 오려는지 때 맞춰 비가 내렸다. 대지가 촉촉해지고 날씨도 푸근하니, 새로 난 나무 가지에 물이 오를 것 같다. 입춘첩(立春帖) 붙인 곳이 곳곳에 보이니, 곧 봄이 오긴 올 것 같다. 봄 생각을 하니 두꺼운 옷을 벗고 봄나들이 할 기대에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봄나들이는 뭐니 뭐니 해도 꽃구경이 최고다. 봄나들이를 보통 '상춘(賞春)'이라 하고, 꽃구경을 '상화(賞花)'라 한다. 조선시대 서울(한양)의 최고 봄놀이 장소는 역시 인왕산의 '필운대(弼雲臺)'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배화여고 뒤 필운대 ⓒ 황정수

  
'필운대'는 인왕산 남쪽 아래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사직단 우측 뒤쪽 나지막한 산자락을 이른다. 지금은 배화여자고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필운대'라는 이름의 내력은 필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인왕산은 한때 '필운산(弼雲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는 <중종실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종 32년(1537)에 명나라 사신 일행이 경복궁에 왔다. 왕은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북쪽에 우뚝 솟은 백악산과 서쪽의 인왕산의 이름을 바꾸고 싶다면서 사신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임금의 청에 응한 사신은 백악 이름을 북쪽에 있다고 해서 '공극(拱極)'이라 지었고, 인왕을 '필운(弼雲)'이라 짓고 부연하기를 '우필운룡(右弼雲龍)'이라 했다."
 
여기서 '우필운룡'은 임금을 오른 쪽에서 돕고 보살핀다는 뜻이다. '운용'은 임금을 상징하고, 오른쪽은 바로 '경복궁 정전(正殿)'에서 보는 산의 방향을 뜻한다. 그러나 이후 '필운산'이란 이름은 통용되지 못하였다. 정치적 수사에서 시작된 요청이었을 뿐 실제 사용하기 위해 요청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민심이 따르지 않으면 오래된 명칭은 바꿀 수도 없다. 이제는 단지 산 끄트머리의 한 봉우리에 그 이름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필운대와 백사 이항복

필운대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살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항복은 고려시대 이제현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도원수 권율(權慄, 1537-1599) 장군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는 젊은 시절 필운대 아래 있던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그로 인해 호를 '필운(弼雲)'이라고도 했다.
   

이한복의 ‘필운대’ 석각 글씨와 이유원의 제명 ⓒ 황정수

 
실제 필운대에 가면 깎아 내린 절벽에 이항복과 관련이 있는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바위의 좌측에는 세로로 쓴 큰 글씨의 '필운대(弼雲臺)'란 석자가 석각되어 있고, 중간에 제명이 있고, 우측에 조선후기 가객 박효관(朴孝寬, ?-?)과 연관된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필운대'라는 글씨는 이항복이 쓰고, 중간에 있는 제명은 1873년에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마지막 우측의 글씨는 쓴 이를 알 수 없다. 이 중에 이유원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선조 예 살던 곳 후손이 찾았더니, 푸른 솔 바위벽에 흰 구름이 깊었어라. 끼치신 유풍 백년토록 다함없어, 어르신들 의관은 오늘도 예와 같네. 계유년(1873년) 월성 이유원이 백사선생 필운대에 제하다."
 
이를 보면 '필운대'라는 글씨는 이항복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구자에 따라서 '필운대'라는 글씨가 이항복의 글씨체와 다르다 하여 19세기의 글씨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아들인 유본예(柳本藝, 1777-1842)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지금 바위벽에 새겨져 있는 '필운대(弼雲臺)' 석자가 바로 오성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이항복의 글씨가 맞는 듯하다.
  

박효관의 이름이 들어있는 석각 ⓒ 황정수

 
석벽의 오른쪽에 박효관과 관련된 글씨가 있는 것은 이유원과의 인연에서 생긴 것이다. 이유원은 악부를 비롯하여 우리말 노래에 관심이 많았다. 이유원이 이항복의 후손으로 필운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박효관이 감동(監董)의 역할을 맡으면서 교유하게 된다. 그래서 박효관은 필운대 주변에서 가곡을 향유하는 모임을 자주 가졌다. 이 모임이 유명한 '승평계(昇平契)'이다.

또한 필운대 근처에는 이항복의 장인인 권율의 집터가 있다. 그 집터에는 권율이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수백 년 된 위용을 자랑한다. 이 터와 은행나무는 기가 센 것으로 유명하여, 무속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지금도 많은 집들 사이에 꿋꿋이 서 있는데, 그 굵은 나무줄기 사이에 서려 있는 기운이 다난한 역사의 영화와 쇠락을 보여주는 듯하다.

필운대 봄놀이

조선시대 서울에 사는 시인 묵객들은 봄이 되면 옷을 가벼이 입고 멀지 않은 인왕산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사직단 뒤쪽에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필운대에 올라 봄꽃 구경을 하였다. 이곳은 그리 높지 않고 평평한 바위가 많고 주변에 봄에 피는 꽃이 많은 곳이었다. 당시 필운대 아래 서촌에는 재주 있는 양반·중인들이 많이 살아 이곳에 자주 올라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더욱 유명해졌다.


필운대 일대는 산수 풍광이 볼 만함은 물론 살구꽃과 복사꽃 같은 여러 가지 꽃이 많았다. 봄철이 되면 '필운대 꽃놀이'(弼雲賞花)라 하여 도성의 풍류객들이 이곳을 찾아 술과 시로 춘흥을 즐겼다. 특히 '필운대 부근의 살구꽃'(弼雲杏花)은 '행촌(杏村)'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동대문 밖의 버들'(興仁門 楊柳), '성북동의 복사꽃'(北村桃花)과 더불어 장안의 구경거리로 꼽혔다.

안대회 교수의 책 <고전 산문 산책>에는 유본학(柳本學, 1770~1842?)이 쓴 <유육각봉기(游六角峰記)>가 실려 있다. 이 글을 보면 당시 필운대에서 봄놀이 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본학은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이며, 유본예의 형이기도 하다. 세 부자는 모두 문명이 높아 당대에 이름을 드날렸다.
 
"계해년(1803) 봄 3월 10일, 생원 한대연을 찾아갔다. 대과에 낙방한 대연은 하는 일 없이 지내면서도 나처럼 밖에 나가 놀지 못하였다. 함께 백문(白門, 서대문) 성곽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기로 했다. 하지만 북산(北山, 인왕산)의 육각봉까지 갈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때마침 밤새 내린 비가 아침나절에 개어, 성곽을 등진 인가마다 복사꽃과 살구꽃이 한창 곱게 피었고, 성 밑으로 호젓하게 이어진 오솔길은 향기로운 풀이 뒤덮었다. 따사로운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 너무도 즐거웠다.

우리는 함께 계곡을 건너고 소나무 숲을 지나 들뜬 마음으로 신명나서 걷다 보니 어느새 육각봉에 이르렀다. 풀밭에 앉아 잠깐 쉬면서 북쪽 동네에 피어 있는 꽃을 구경했다. 그런 다음 오씨네 동산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노닌 사람 모두가 술에 취했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해 혼자 취하지 않았는데, 대연이 강권하여 억지로 석 잔이나 마신 탓에 주량이 약한 나는 더욱 크게 취하고 말았다. 이날 봄나들이에서 나보다 더 취한 사람은 없었다. 서대문 성곽부터 육각봉까지는 한양에서 꽃을 구경하기에 가장 빼어난 곳인데 오늘 모두 다 구경했다. 그렇다면 봄놀이를 두루 즐긴 것은 또 올해만한 때가 없을 것이다."
 
육각봉은 필운대 주변 넓은 자락이 있는 봉우리를 말한다. 시문을 좋아하고 취흥에 젖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은 그곳에 모여 상춘놀이를 하곤 했다. 복사꽃, 살구꽃 핀 풍경과 주변의 아름다운 환경이 절로 술 맛을 돋운다. 이 글은 당시 중인 문객들의 놀이 문화의 현장을 생생히 잘 보여준다.

정선의 작품 <필운대>와 <필운상화>

화가들이 필운대에 올라 그림으로 남긴 흔적은 아무래도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을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정선은 실경산수를 잘 그렸고, 많은 실경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 인왕산 지역을 그린 일련의 작품으로 유명한데, '장동팔경(壯洞八景)'이라 불리는 첩 등이 그것이다. 장동팔경 중에 필운대를 그린 것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 필운대의 모습을 자연 그대로 위에서 내려다보며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정선 <필운대> ⓒ 간송미술관


정선의 <필운대>는 사직동에서 인왕산을 향해 오르며 필운대를 바라보며 그린 것이다. 위로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우측으로 낮은 봉우리가 있다. 직각으로 곧추 선 바위벽 아래로는 평평한 자리가 있어 여러 사람이 앉아 놀만하다. 필운대 아래쪽에 집 한 칸이 있다. 실제 사람이 사는 곳일 수도 있으나 아름다운 이곳에 살고 싶다는 정선의 희망이 내재되어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정선 <필운대상춘> ⓒ 간송미술관


정선의 작품 중에 당시의 선비 여러 명이 필운대에 올라 자연을 즐기며 모여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 또 하나 있다. 이 작품은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이란 제목으로 불리는 것이다. 정선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봄을 맞이하여 꽃구경하러 산에 오른 이들이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선비는 8명이고, 시중드는 아이 두 명이 있다. 시동이 따라 올라온 것을 보면 이들은 시회를 하러 올라온 듯하다. 이들은 꽃구경이 끝나면 곧 술잔을 돌리고 흥취가 일면 시를 지을 것이다. 아래 쪽 서촌 마을에는 빨간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산 쪽으로는 곳곳에 듬성듬성 소나무가 우뚝 솟아 있다. 저 먼 쪽으로 소나무가 가득한 남산이 있고 그 너머로 관악산이 보인다.

시멘트 건물로 가득한 지금의 서울 모습과는 달리 서정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모습이다. 기와집과 꽃들이 어우러진 조선시대 서울의 모습은 세상 어느 도시보다도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임득명의 <등고상화>

정선이 필운대를 그린 수십 년 후인 1786년에 중인화가 송월헌(松月軒) 임득명(林得明, 1767-?)이 다시 필운대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다. 임득명은 규장각 서리를 지냈는데, 시를 잘 짓고 그림도 잘 그렸다. 그는 여항 문인들의 시사인 옥계시사(玉溪詩社, 松石園詩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시사 모임의 내용을 기록한 서화첩을 여러 권 남겼다.
 

임득명 <등고상화> ⓒ 삼성출판박물관

  
이 중 1786년 시화첩인 <옥계십이승첩(玉溪十二勝帖)>에 필운대에서 시화 모임을 갖는 모습을 그린 <등고상화(登高賞華)>가 들어있다. 그의 그림은 구도, 수지법 등에서 이인문(李寅文, 1745-1821)·김홍도(金弘道, 1745-1806?) 화풍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이는 그가 규장각 서리로 있으며 이인문 등과 가까이 지냈고, 그림에서도 그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등고상화>는 수채화처럼 맑은 춘경산수이다. 임득명의 화풍이 이렇게 산뜻하고 맑은 화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당시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화풍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규장각 서리로 있어 신문물을 빨리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규장각 소속 화원으로 있었던 이인문 등의 화가들은 임득명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매우 독특한 화풍을 이룰 수 있었다.

비 갠 듯한 봄날 인왕산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마음이 동한 7명의 선비는 옥동 수성동을 지나 산등성이를 따라 필운대를 향해 오른다. 한참을 으르니 필운대 근처에 여러 사람이 앉을 만한 둔덕이 있다. 이들은 주변의 꽃을 구경하고 머리 도성 안 풍경을 내려다보며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다. 점차 봄 풍경에 젖어 시흥이 오르고 모두가 시를 한 편씩 짓는다. 시가 다 되자 한 사람씩 일어나 읊는다. 그림 속에 홀로 서있는 이가 시를 읊고 있는 이로 보인다. 산의 모습을 대담하게 생략하여 그린 것이 이채롭고, 마을의 버드나무와 복사꽃이 어우러진 모습이 산뜻하다.

그동안 '임득명'이라는 화가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그 능력은 여느 화가들 못지않다. 그는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니라 회화적 역량도 뛰어난 화가였음을 이 작품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그의 화풍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풍과 남종화풍을 두루 수용하였으나, 자신만의 색채로 개성화시킴으로써 시·서·화를 겸비한 여항 문인화가로서 특색 있는 경지를 개척하였다. 임득명 또한 정선, 김홍도, 이인문 등과 함께 꼭 기억해야 할 뛰어난 예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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