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이맘때였다. 윤기가 흐르는 짙푸른 이파리에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두꺼운 이파리 사이로 얼굴을 내민 가시가 유난히 뾰족해 보였다. 콩알만 한 빨간 열매가 무수히 달린 송이에도 솜사탕 같은 눈이 포개졌다.
짙푸른 이파리와 빨강 열매, 하얀 눈이 극명하게 대비를 이뤘다. 한없이 탐스러웠다. 한낮의 따스한 햇볕에 눈이 녹으면서 흘러내리는 물방울도 아름다웠다. 그 풍경이 한동안 발길을 붙잡았다. 광주 양림동의 호랑가시나무에서다.
날카롭지만 따뜻한 나무
호랑가시나무는 양림산의 남쪽 기슭, 수피아여고 뒤편에서 자라고 있다. 키가 6m, 나무 밑동의 둘레가 1m를 훌쩍 넘는다. 호랑가시나무에서는 좀체 보기 드물게 크고 굵다. 수령 400년 남짓으로 전해진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돼 있다.
호랑가시나무는 겉보기에 다소 거칠게 생겼지만 속내는 따뜻하다. '가정의 행복', '평화'를 꽃말로 지니고 있다. 빨간 열매는 연말연시 불우이웃 돕기의 상징이 된 '사랑의 열매'로 디자인돼 쓰이고 있다.
서양에서는 호랑가시나무를 '예수나무', '크리스마스나무'라 부른다. 지빠귀과의 티티새와 얽힌다. 예수가 가시면류관을 쓰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을 때다. 티티새 로빈이 날아와 부리를 이용해 예수의 머리에 박힌 가시를 뽑아낸다. 하지만 로빈은 금세 가시에 찔려 붉은 피로 물들고, 이내 죽고 만다.
호랑가시나무의 날카로운 가시가 예수의 면류관을 상징한다. 빨간 열매는 예수의 핏방울이다. 하얀 꽃은 예수의 탄생을, 쓴맛을 지닌 껍질은 예수의 고난을 나타낸다.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호랑가시나무로 장식을 하는 이유다.
로마에서는 선물을 할 때 호랑가시나무로 존경과 사랑을 의미를 담는다. 집안에 이 나무를 심거나 걸어두면 재앙이 사라진다고 믿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마법 지팡이도 이 나무를 썼다고 한다. 신성한 능력을 지닌 나무다.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잡귀를 물리치는 데 효험이 있다고 믿었다. 호랑가시나무 가지에다 정어리 머리를 꿰어 처마에 매달았다. 정어리의 눈으로 보고, 날카로운 가시로 귀신의 눈을 찔러 물리치라는 소망을 담았다.
호랑가시나무는 호랑이가 이파리에 돋아난 가시 모양의 톱니로 가려운 데를 긁었다고 이름 붙었다. '호랑이등긁개나무'로도 불린다. 가시가 호랑이 발톱처럼 매섭게 생겼다고 '호랑이발톱나무'라고도 한다. 억세고 단단한 가시를 호랑이도 무서워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호랑가시나무는 완도 등 햇볕 따사로운 전남 해안에서 많이 자란다. 완도에서 처음 발견된 완도호랑가시나무도 있다. 꽃이 봄에 피고, 향기가 짙다. 열매는 가을에 빨갛게 맺힌다. 크기가 콩알만 한 게 먼나무, 이나무 등 감탕나무과의 열매와 흡사하다. 한겨울에도 빛깔이 선명해 보기에 좋다. 티티새가 가장 좋아하는 열매로 알려져 있다.
기념물로 지정된 호랑가시나무 부근에 크고 작은 호랑가시나무가 많다. 호랑가시나무로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 호랑가시나무 이름을 붙인 창작소와 게스트하우스도 어여쁘다. TV 드라마 <너를 기억해>의 배경으로 나와 안방의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광주의 예루살렘
호랑가시나무뿐만 아니다. 양림산에는 수령 100년이 넘은 아까시나무, 흑호도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왕버즘나무, 팽나무, 은단풍나무, 측백나무, 태산목, 참나무도 있다. 오래된 나무들이 어우러져 숲을 이뤘다. 철따라 날아들어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를 듣는 것도 즐거움이다. 나무들이 한데 모여 이룬 숲 덕분이다.
나무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들어온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해발 108m의 양림산은 당시 풍장 터였다. 돌림병에 걸려 죽은 어린아이들이 버려지는 곳이었다.
선교사들은 여기에 나무를 심었다. 이 나무를 보며 머나 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나무가 주는 열매는 선교사들의 영양을 보충해주는 데도 요긴하게 쓰였다. 산자락에는 교회를 짓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광주 선교의 전초기지였다. 양림동은 자연스럽게 '광주의 예루살렘', '서양촌'으로 불렸다.
선교사들의 선교기념비가 사직도서관 앞에 세워져 있다. 오웬과 함께 광주선교부를 연 유진벨이 1904년 12월 25일 첫 예배를 가진 자리다. 유진벨은 후학 양성에도 나섰다.
그의 집 사랑채에 모인 여학생 3명이 시작이었다. 수피아 여학교의 첫걸음이다. 남학생을 모아 공부를 가르친 곳은 숭일학교로 발전했다. 광주기독병원의 전신인 제중원도 그의 임시 사택에서 시작됐다.
제중원의 원장은 의사인 윌슨이 맡았다. 윌슨은 전쟁고아를 돌보며 '고아의 아버지'로 불렸다. 1910년을 전후해 지어진 그의 사택은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축물이다.
광주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헌신을 한 선교사들은 죽어서도 여기에 묻혔다. 호남신학대학교 뒷산에 선교사와 가족 45명의 무덤이 있다. 선교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디딤돌 65개로 이뤄져 있다. '고난의 길'로 명명돼 있다.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를 기념한 오웬기념각은 각종 강연과 음악회, 영화와 연극 공연, 학예회와 졸업식 장소로 쓰였다. 여기서 공연된 연극 <늑대와 소년>은 광주 최초의 서양극이었다. 수피아여학교 교사 김필례의 음악발표회는 광주지역의 첫 독주회였다. 1919년엔 3·1운동을 고취시키는 설교가 행해졌다. 광주YMCA도 여기서 창립됐다.
최승효와 이장우의 옛집도 양림동의 보물이다. 최승효의 집은 1920년에 지어졌다. 다락에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줬다고 전해진다. 이장우의 집은 1899년에 지어졌다. 안채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양림동은 많은 문인과 인연도 맺고 있다. 시인 김현승과 곽재구, 이수복, 서정주가 여기서 살았다. 소설가 황석영과 문순태, 박화성도 있다. 영화감독 임권택도 학창시절을 양림동에서 보냈다. '더러는/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로 시작되는 <눈물>의 작가 다형 김현승의 시비가 호남신학대학교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