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06 08:02최종 업데이트 18.12.06 08:02
현재 한국의 근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를 꼽자면 서양화가로는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를 꼽는다. 이 세 작가는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미술시장의 흐름도 주도하며 이끌어왔다. 이에 비해 동양화 분야는 서양화에 비해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유독 인기가 있고 가격도 높은 작가가 한 명 있다. 바로 독특한 채색화로 유명한 천경자(千敬子, 1924-2015) 화백이다. 오랫동안 한국 화단을 대표했던 이상범이나 변관식의 산수화조차도 예전 같은 관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중심에서 멀어지는 상황에서 천경자의 작품이 여전히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위작 사건의 빌미가 된 ‘미인도’ ⓒ 국립현대미술관


그런 열풍에도 근래에 '천경자'라는 이름은 세상 사람들에게 부조리한 스캔들의 주인공처럼 인식되어 왔다. 말년에 불우하게 만난 '미인도 위작 논란 사건' 때문이다. 그의 미술적 성과는 자극적 화제에 묻혀버리고, 오로지 '미인도'의 진위에 대한 이야기만 세상에 난무하였다.

화가 천경자는 온 데 간 데 없고, '미인도'의 증언자로서만 존재하는 듯하였다. 이런 상황은 작가로서의 그를 힘들게 했고, 극도의 외로움은 그의 말년을 더욱 힘들게 했다. 사실 '미인도'라는 작품은 진품이든 위작이든 천경자의 작품 세계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 아니다.


그런데 그 이상한 작품 하나 때문에 한국 미술계의 중요한 작가 한 명이 지저분한 구렁텅이에 빠져 버린 듯하다. 좀 더 정치한 연구가 이루어져 이런 불편한 상황이 해소되고,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본질적인 관심이 늘어나기를 바란다.

화가 천경자 삶의 단면

천경자는 192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1남 2녀 중 큰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천옥자(千玉子)이다. 1941년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졸업한 뒤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로 유학을 간다. 이 무렵 스스로 이름을 '천경자'로 바꾼다. 보통 '여미전'이라 불리던 이 학교는 당시 일본에서도 특별한 미술학교였다.

남자들이 다니던 유서 깊은 도쿄미술학교에 대응하여 세운 당시 최고의 명문 여자미술학교였다. 그동안 이 학교에는 한국인 화가 지망 여성들이 많이 다녔다. 나혜석이 처음으로 입학한 이후 백남순, 정온녀, 이숙종, 박래현 등 많은 신여성들이 다닌 친숙한 학교이다. 이 중 박래현은 천경자의 1년 선배였고, 정온녀는 2년 선배였다.

천경자는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여러 일본화 전공 교수들에게 배우나, 학교 수업과는 별개로 인물화로 유명한 고바야가와 기요시(小早川淸, 1899-1948)의 문하에 들어가 전통적인 일본식 인물화를 배운다. 당시 일본의 미술교육은 미술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는 작가로서 활동할 만한 능력을 얻기 어려웠다.

학교 교육 과정은 이론을 병행하여 교육하기 때문에 중등학교 교사를 양성하기에는 적합하였다. 그러나 작가로서 활동하기에는 학습 기간도 짧고 깊이 있는 기예를 쌓기에는 수련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학교 교수나 당대 유명한 화가들이 사적으로 운영하는 화숙을 다니며 그림 기교를 습득하였다. 천경자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한 채색화를 전공할 생각이었기에 고바야가와 기요시의 화숙으로 그림을 배우러 다녔다.
           

천경자 '노부(老婦)'(1944년). 1995 호암미술관 도록에서 재촬영. ⓒ 호암미술관



천경자가 전문화가로서의 등단한 것은 1943년과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각각 '조부(祖父)',와 '노부(老婦)'라는 작품으로 입선하면서이다. 이 작품들은 규모가 매우 큰 전면 채색화로 당시의 여성화가로서는 보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1943년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에 귀국하여 모교인 전남여고 미술교사로 부임한다.

1946년에는 학교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고, 1949년에는 서울에서 개인전을 치르면서 장래가 촉망되는 여류화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화가로서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그동안 집안의 몰락, 동생의 죽음, 초혼의 실패와 재혼을 겪으며 굴곡 있는 삶을 산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작품 세계를 '애절한 한(恨)'의 세계로 이끈다.
                   

천경자 '생태' 1951년, 1995 호암미술관 도록에서 재촬영. ⓒ 호암미술관


  
이러한 운명적인 슬픔을 극복하며 그림에 매진한 천경자의 삶은 1951년에 발표한 '생태(生態)'라는 작품에서 응축되어 나타난다. 이 작품은 수십 마리의 뱀이 뒤엉킨 모습을 그린 것인데 당시 화단의 큰 주목을 받는다.

이색적 소재이기도 하거니와 숙명적인 운명을 안고 살아가는 듯한 꽃뱀 서른다섯 마리가 엉켜 있는 독특한 구성은 인간의 모든 고뇌가 서려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이 작품이 계기가 되어 천경자의 미술 세계는 한층 깊이를 더해 간다. 이때의 작품들에 유난히 뱀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생태'의 성공과 작가 자신의 인생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예술의 방향이었다.

천경자가 자주 뱀을 그리게 된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본래 그의 집안은 부유했는데, 유학 중 몰락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귀국하게 된다. 좋은 집에서도 밀려나 어머니와 함께 동생들과 외진 곳에서 셋방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에 아침저녁으로 뱀들이 자주 출몰하여 집안 곳곳에 득실거렸다고 한다.

징그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데 새로 집을 구할 여력이 없어 이사를 가지도 못하였다. 천경자는 그런 피할 수 없었던 절절한 가난을 잊을 수 없어 뱀을 그렸다고 한다. 또한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우한 일들을 맞닥뜨리며, 여성으로서 힘들었던 절절한 운명의 정서를 이입해 그렸을 것이다.

천경자의 누하동 집

'생태'를 발표한 이후 화가로서 성공하자 1954년에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새로운 한국화를 모색해 나간다. 점차 경제적으로도 자립이 되어 서울 서촌 지역에 자리 잡고, 작품 세계도 자전적인 삶을 모티브로 한 여인상들을 감성적인 필치로 제작하여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확립해간다.

화가 천경자를 말할 때 미술 애호가들은 보통 '옥인동에 살던 천경자'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만큼 옥인동 지역은 천경자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천경자가 옥인동에 터를 잡고 산 것은 실제 9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터를 잡게 되는 중요한 시기를 주로 서촌의 '옥인동'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천경자'와 '옥인동'이 자주 붙어 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천경자가 살았던 집은 옥인동이라기보다는 실제는 '누하동'이다. 여러 집을 옮겨 다녔지만 오래 정착한 곳은 누하동이다. 당시 누하동, 필운동 등 옥인동 지역은 보통 통칭해서 '옥인동'이라 부르기도 하고 간단히 '옥동(玉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주소로는 '누하동 176번지', 이상범이 살던 집 바로 이웃이었다. 그래서 많은 애호가들이 여전히 '옥인동에 살던 천경자'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천경자에게 있어 옥인동은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천경자는 이집에서 1962년부터 1970년까지 9년간 살고 서교동으로 이사 간다.
 

천경자가 살던 한옥 ⓒ 황정수



늦가을 하늘 맑은 날, 천경자가 살던 집을 찾아 서촌 누하동을 찾았다. 이곳은 근래에 많은 젊은이들의 관심을 받아 화제가 되고 있는 동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사실 이쪽 지역의 특징인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저 오래 전 조선시대 모습과 근대의 모습, 그리고 현대가 어우러진 복합적인 환경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이들을 맞이하는 지자체의 대응도 그리 문화적이지는 않다.
 

공사 당시의 천경자 한옥. 그 옆으로 이상범의 집임을 알리는 종이(빨간 네모 안)가 붙어 있다. ⓒ 황정수



천경자가 살았던 곳도 한국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임에도 미리 정보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 찾아 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 보통 천경자가 살았던 곳이라 하면 '이상범의 집 옆'이라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범의 집조차도 친절하게 안내하는 팻말 하나 제대로 서있지 않다. 골목 건너편에 조그만 안내판이 하나 서 있지만 그나마도 가로수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다. 더욱이 천경자가 살았던 한옥에 관해서는 아무런 표식도 없다.

찾아올 때마다 늘 느끼는 그런 씁쓸함을 뒤로 하고, 애써 다시 찾은 천경자의 집은 놀랍게도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옥의 외관만은 옛 모습이 그대로 있어 그때를 돌이켜볼 수 있었는데, 어느새 집을 헐어내고 새집을 짓고 있었다.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경자 가옥 공사 전후 ⓒ 황정수



또한 종로구는 이렇게 집이 없어지도록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것일까? 별별 의문이 다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호 정책이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이제 이 동네에서 천경자의 흔적을 추억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하기야 이 일 뿐이겠는가? 이 근처에 살았던 구본웅 집도 그렇고, 박승무, 노수현 등등 많은 미술인들의 삶의 흔적도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으니 어쩌겠는가?  
 

천경자 '환(歡)' 1962년, 1995 호암미술관 도록 재촬영 ⓒ 호암미술관



천경자가 누하동에 살던 시절은 정신적으로 가장 여유롭고 낭만적 감성이 흐르던 시절이었다. 이때 그린 그림들은 서정적인 감성이 가득하고 여성적 부드러움이 넘쳐 흐른다. 서울에 올라와 자리를 잡지 못하다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갖는 등 마음의 안정을 찾아 매우 자유로운 화풍을 보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여유가 인간의 아름다운 한 순간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삶의 긍정적인 모습을 표현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뱀을 형상화한 1969년 작 '사군도(蛇群圖)'같은 그림은 예전에 그린 '생태(生態)'와 비교해 보아도 그의 작품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환(歡)'같은 작품에서는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누하동에 정착하며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게 된 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지나치게 운명적인 슬픔에 갇혀 있던 정서가 삶의 환경이 바뀌며 자유로운 상태로 치환된 것으로 보인다.

마음의 평화를 찾은 그는 이곳에서 많은 동료 화가들과 가까이 지낸다. 이상범과는 이웃하여 살았고, 노수현이나 박승무 같은 화가들과도 자주 소통하며 지냈다. 또한 나중에 '모던아트협회' 활동을 함께 하게 되는 한묵과도 가까운 곳에 살며 우정을 나누었고, 품성이 천진난만했던 서양화가 이규상과도 가까이 지냈다.

천경자의 글과 삽화 그림

천경자의 활동 중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글과 삽화이다. 그는 매우 감성적인 성격에 타고난 글재주가 있어 수많은 수필 같은 글을 썼다. 또한 글과 함께 정겨운 삽화도 많이 그렸다. 주로 '신태양', '여상(女像)', '여성동아'와 같은 잡지에 글과 삽화를 연재하였는데, 인기가 많아 경제적 수입도 좋은 편이었다.

그의 글과 그림은 책으로 엮어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69년에는 유럽과 남태평양을 여행하였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작품들은 자신의 미술세계의 주요한 흔적이 되었다. 1972년에는 여류화가로서는 특별하게 베트남전 종군 화가단에도 참여하여 예술가로서의 용기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또한 1974년에는 아프리카 여행을 하는 등 1990년대까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느낀 것을 신문과 잡지에 연재하였다. 이때 글 안에 이국적인 풍물화를 그려 넣었는데 많은 애호가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의 그림들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고 계속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였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보수적인 전통적 한국화의 범주에서 벗어나 서구 미술과 일본 미술의 기법을 적당히 융화시켜 자신만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천경자의 삽화 '여상(女像)' 1965, 5 수록 ⓒ 황정수



근래에 작지만 매우 매력적인 천경자의 삽화 한 점을 보았다. 1969년 후반 '여상(女像)'이란 잡지에 연재하던 '아뜰리에의 여백'이란 고정란에 쓴 수필에 곁들였던 삽화이다. 그러니 누하동에 살던 시절에 작업한 것이다. 한 여인이 거울을 보며 눈가의 화장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다. 화장을 끝내면 이제 막 밖으로 나설 참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있자니 이 거울을 보고 있는 여인이 바로 화가 천경자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결국 글과 그림이라는 것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인데, 마치 거울을 보며 화장하고 남 앞에 나서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단장하고 남에게 반듯이 보이려는 여인의 모습을 보며, 유난히 자존심이 강했던 화가 천경자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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