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30년간 상설전시됐던 <다다익선>이 안전 및 모니터 교체 문제 등으로 지난 2월부로 가동이 중단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는 중이다. 대신 '다다익선이야기_자료전'을 과천미술관에서 내년 2월 28일까지 연다. 이에 대한 견해와 대안을 논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다다익선>은 <모나리자>와 동급
 
백남준 1987년 11월 1일 서울을 방문해 소프트웨어 분배방식 등을 점검하다. TV 1003대 설치하기로 확정하다.
 백남준 1987년 11월 1일 서울을 방문해 소프트웨어 분배방식 등을 점검하다. TV 1003대 설치하기로 확정하다.
ⓒ 국립현대미술관

관련사진보기


2013년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은 백남준 첫 전시 50주년을 맞아 그의 특별전을 마련했다. 주제는 '아트와 테크놀로지', 이에 걸맞게 총 진행자 '팻 피셔(Pat Fishier)'는 백남준과 다빈치를 연관해 전시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백남준이 20세기의 다빈치이고, 다빈치는 16세기의 백남준으로 봤기 때문이다. 두 작가의 공통점은 과학의 예술화와 선견지명이다.

난 피셔의 말에 100% 동의한다. 그런 면에서 <모나리자>와 <다다익선>은 동급이다. 하나는 르네상스시대의 대표작이고, 또 하나는 디지털시대의 대표작이다. 다만 그 재료가 유화물감에서 전자붓으로 변했을 뿐이다. 유화물감은 16세기 당시에는 첨단의 과학이었고, 전자TV는 20세기에 첨단의 과학이라는 면에서도 같다. 그 가치는 계산할 수조차 없다.

왜 다다익선인가? 1988년 가을 당시 국립미술관 학예실장이었던 유준상은 <현대미술>에 이렇게 설명했다.

"방송이라는 것은 물고기의 알과 같은 것이고, 그것이 수백만 개의 알을 낳지만 그 가운데 대부분이 제대로 수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것이라도 수정에 성공하면 그 또한 대단한 양에 이르게 된다."

내 생각은 이렇다. 첫째로 1003대 모니터에서 나오는 콘텐츠가 너무 많기에 다다익선이다. 둘째로 전자회화이면서 전자조각이고, 전자벽화이면서 전자TV이고, 또한 전자음악이기에 다다익선이다. 셋째로 여기에는 세계문화사가 통째로 담겨 있기에 다다익선이다. 정보·지식이 더 많을수록 소통이 원활해지고 인류는 더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다. 
 
1988년 9월 15일 백남준 다다익선 제막식에 참석해 전원을 올리다.1003대 TV가 사고 없이 작동한 건 대사건이다.
 1988년 9월 15일 백남준 다다익선 제막식에 참석해 전원을 올리다.1003대 TV가 사고 없이 작동한 건 대사건이다.
ⓒ 국립현대미술관

관련사진보기


다다익선은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 이틀 전에 완성됐다. 1988년은 우리에게 중요한 해였다. 우리가 식민경험과 한국전쟁, 분단시대를 뚫고 전 세계에 처음 데뷔한 해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10월 3일 개천절을 염두에 두고 1003대 모니터로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5천년 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다는 한국인의 원류가 담겨있다.

당시 백남준은 "이번에 큰 놈 만들어 조국에 선사하겠다"고 했다. 전시공간에 대해서도 "이 램프코어 공간은 날 위한 곳 같다"며 대만족했다. 그리고 "세계를 보자기로 싸듯 연결시킨다"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런 대규모 설치작품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2016년에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기획한 이정성 기술자와의 '인터뷰 대담집'에 그 과정이 잘 나와있다.

"그게 참 사연이 길어요. TV모니터 1003대를 동시에 작동시키려면 분배기가 필요하죠. 지금은 다 알지만 당시는 그걸 몰랐어요. […] 부품회로를 그려 20개 아웃풋이 가능한 분배기 80개를 만들었어요. 처음이라 힘들었죠. 당시 생방송이 결정돼 있어 매일 거기서 매달렸어요. 백 선생이 오픈 생방송할 때, 미국에서 오셨는데 전원이 다 들어오자 깜짝 놀랐어요. 반 정도라고 가동하면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다 들어왔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새로 보수해 단장한 모습을 한 2003년 '다다익선'
 새로 보수해 단장한 모습을 한 2003년 "다다익선"
ⓒ 국립현대미술관

관련사진보기


다다익선의 TV모니터는 그 후 2002년까지 25년간 별 문제없이 가동되었다. 그러나 2003년 봄부터 전선 등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수리작업에 들어갔다. 전원방식을 220V로 바꿔 어린이날에 재공개했다. 백남준은 전자제품이란 반드시 고장이 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이정성 기술자에게 뉴욕에서 팩스를 보내 작품 수리 전권을 위임했다.

설치를 맡았던 김원은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모니터 수명이 8만 시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전자제품도 20년이 지나면 수명을 다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일부사람들은 원형훼손이라며 구형모니터를 신형(LCD)으로 교체하는 것에 반대한다.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런 논리라면 전자아트란 성립할 수가 없다.

한국에서 백남준은 민중미술보다 더 대우를 못 받았다. 국립미술관마저 소홀히 했다. 백남준이 사망하고 1년 뒤에 1주년 사진전을 연 것이 전부다. 그 이후 단 한 번도 전시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니 도록도 없다. 좋은 도록이 나와야 외국 국립미술관에 배치되는데 말이다. 게다가 국립미술관은 이 작품을 '설치물'로 본다. 만약 이게 미국의 국립미술관에 있었다면 이렇게 방치할까 싶다.

국립미술관, 백남준에게 10억을 빚지다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서울 순회전)" 포스터
 1993년 "휘트니비엔날레(서울 순회전)" 포스터
ⓒ 국립현대미술관

관련사진보기


국립미술관은 백남준에게 25만 달러(한화 3억), 지금 시세로 하면 10억 정도를 빚지고 있다. 백남준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세계최고의 작가로 등극한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도 변방이었다. 백남준은 한국미술을 동네미술에서 세계미술로 끌어올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당시 최고 수준 전시인 미국 '휘트니비엔날레'를 직수입해왔다.

1993년 '서울 휘트니비엔날레(순회전)'가 열리기까진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미국  측에서 협소한 장소와 예산부족을 이유로 무산시키려 했다. 임영방 당시 국립미술관 관장이 적극 나섰다. 부족한 예산은 백남준이 휘트니 등에서 받은 상금 25만 달러를 기부해 충당했다. 게다가 주제도 '젠더, 동성애, 인종차별' 등 우리에겐 낯선 것이었다.

그럼에도 관객이 과천미술관을 꽉 메워 대성공을 거두었다. 원 전시에는 150점 작품에 작가 82명이 참가했으나, 한국전에서는 여러 사정으로 작가가 61명 참가하고 작품도 107점만 공개되었다. 당시 백남준의 지원을 받던 김선정씨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이렇듯 국립미술관은 백남준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또한 한국미술계도 마찬가지다.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유치, 1995년 첫 광주비엔날레 '인포[정보]아트' 기획 등 그 공로가 크다. 이참에 지방자치에서 재정지원을 받는 백남준아트센터(용인)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전환돼야 한다. 지난 11월 6일 국회에서 열린 '백남준세미나'에서도 찬성의 목소리가 높았다. 

2017년 여름, 베를린에 취재 갔을 때 일화다. 베를린 국립미술관 옆에 미술전문서점이 있다. 내가 백남준 관련 책을 찾으니까 주인이 하는 말, "백남준은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하다"고. 이는 우리가 백남준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걸 비튼 말 같았다.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미국 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직원들 백남준 '오브제'를 아카이브 목록으로 만들다
 미국 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 직원들 백남준 "오브제"를 아카이브 목록으로 만들다
ⓒ 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

관련사진보기

2006년 백남준이 사망했을 때, 백남준 장조카 '켄 하쿠다(K. P. Hakuda)'는 백남준이 뉴욕 자택에 작업하려고 모은 모든 물건을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립스미소니언미술관에 기증했다. 백남준이 모아둔 갖가지 오브제와 낡은 TV 등을 7트럭에 실어갔다. 과장해서 말하면 그 먼지마저 다 가져간 것이다. 그만큼 백남준은 미국에게 중요한 작가였다.

지금도 이 미술관 연구진은 이런 물품을 연도별, 소재별, 주제별로 분류해 계속 연구한 후 아카이브로 만들어 캐비닛에 보관하고 있다. 그 중 일부가 백남준 10주년 전에 스미소니언미술관에서 공개되었다. 이 작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라면 아마 이걸 잡동사니로 보고 쓰레기로 처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두 나라는 큰 차이가 있다.

백남준에게 있어 모니터, 전자회로 등 '하드웨어'는 중요하지 않다. 예술가의 혼이 담긴 오리지널한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 이정성 기술자도 백남준이 죽음을 재촉할 정도로 소프트웨어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상기시킨다. TV모니터가 '볼록하냐, 평평하냐' 그런 건 부차적 문제였다. 이런 걸 따지는 건 너무 유치하다. 백남준 '창조성'에 대한 모독이다. 
 
2018년 10월 9일 아트선재 '큐레이터 토크' 참가한 '이영철'교수와 '문혜진' 미술평론가. 아래사진은 백남준이 기획한 '샬럿' 퍼포먼스 때 전설적 큐레이터 '제만'이 그녀의 전자브래지어 착용을 도와주다
 2018년 10월 9일 아트선재 "큐레이터 토크" 참가한 "이영철"교수와 "문혜진" 미술평론가. 아래사진은 백남준이 기획한 "샬럿" 퍼포먼스 때 전설적 큐레이터 "제만"이 그녀의 전자브래지어 착용을 도와주다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지난 10월 아트선재 큐레이터 대담에 이영철 초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이 참석했다. 이에 대해 묻자 그는 "정보통신이 가장 발달하고, 삼성-LG와 같은 기업이 있는 나라에서 모니터가 어쩌고저쩌고 전기세 너무 나가고 하는 얘기는 너무 촌스럽고 관료화된 사고"라며 "백남준은 모니터에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고치라고 하지 않았겠나"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뒤샹이 연 서양현대미술과 TV발명자 존 베어드가 만든 하이테크 사이에서 백남준은 세계미술사적으로 새 통로를 연 사람이다.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백남준 같은 천재예술가이었기에 국가도 못한 일을 한 것이다.

백남준은 전 세계 이미지 생태계를 아는 사람이다. 예술가란 바로 그 시대의 이미지가 어떻게 생산되고 소비되는지 그 비밀을 캐내는 사람이다. <다다익선>은 국가의 기원이 주제지만 실제로는 정보사회의 도래를 말한 것이다. 이런 시대정신과 한국사가 하나로 집약한 작품인데 모니터가 무슨 예배대상이나 숭배대상이 된다는 건 너무나 한심한 생각이 아닌가."


백남준은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자신의 작품이 꼭 오래 남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인류가 살아있는 한 그가 작품을 통해 남긴 아이디어가 영원하길 바랐다. 그렇다고 수리하면 보존할 수 있는 작품을 다 버리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의지'
 
국립미술관 2018년 6월 26일 기자간담회 모습.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이 다다익선 대책에 대해 답변하다
 국립미술관 2018년 6월 26일 기자간담회 모습.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이 다다익선 대책에 대해 답변하다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국립미술관이 염려하는 다다익선 안전사고에 대해 알고 싶어 이정성 기술자의 대림상가 사무실을 찾아갔다. 다다익선은 1003대 모니터가 동시에 켜야하므로 서로 먹고 먹히는 현상이 있으나, 실무자가 볼 때 한전의 누전기준인 250K 이하로 내리는 것은 기술적으로 간단하단다. 전원을 멀티캡에 꽂지 말고 중간에 누전방지 트랜스를 하나 더 연결하면 된단다.

이정성 기술자는 구형(브라운)과 신형(LCD) 모니터의 차이를 직접 눈으로 보여줬다. 신형은 화면도 좋고, 무게도 구형에 비해 100분의 1정도 가볍다. 속이 텅 비어 열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구형은 병렬식인데다 내부가 복잡해 열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그는 이 문제의 핵심을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이를 해결하려는 '의지'의 문제로 봤다. 그 수리 가능성을 물었더니 95% 이상이라고 답했다. 물론 돈과 시간이 들어간다. 그러나 백남준 작품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콘덴서(축전기)가 1개 뻥 터지면 놀라게 되는데 그러면 오히려 고치기 쉽단다. 안 터지면 그 원인을 찾기 어렵기에 더 힘들단다.

이정성 기술자는 2003년 수리 이후에도 <다다익선>에 문제점이 많이 노출되어 미술관 담당자들이 10년간 속을 태운 사정도 잘 안다고 했다. 그들이 TV지식이 부족해 마음고생을 많이 한 점 위로하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지난 2018년 6월 26일 국립미술관 기자간담회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이에 대한 관장의 입장을 물었다. 그는 "백남준의 <다다익선>은 기념비적 작품이고 세계 여러 나라의 미디어 작품 보존방안의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지만, 아직 구체적 일정이 나오지 않았다. 
 
백남준 10주년인 2016년 1월에 '재능문화센터'에서 백남준 기술자들이 한국의 젊은이와 만났다. 백남준작품 보존과 미래사회에 대해 토론했다. 왼쪽부터 독일의 요헨 샤유어라커, 미국의 마크 파스팔마크교수, 폴 게린 작가, 아트마스터대표 이정성, 레이저아티스트 노만 밸러드
 백남준 10주년인 2016년 1월에 "재능문화센터"에서 백남준 기술자들이 한국의 젊은이와 만났다. 백남준작품 보존과 미래사회에 대해 토론했다. 왼쪽부터 독일의 요헨 샤유어라커, 미국의 마크 파스팔마크교수, 폴 게린 작가, 아트마스터대표 이정성, 레이저아티스트 노만 밸러드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한국만 아니라 외국에도 백남준과 30년간 동고동락한 전자기술자도 많다.

독일과 유럽지역에서 오랫동안 조수를 한 요헨 샤유어라커, 미국 신시내티에서 '백남준팩터리'를 연 마크 파스팔마크 교수, 그리고 타고난 비디오편집자 폴 게린 작가 또한 백남준 레이저작업에 협업한 작가 겸 기술자인 노만 밸러드가 있다. 이들은 2016년 1월에 백남준 10주년을 맞아 서울을 방문해 분주한 일정을 보낸 적이 있다.

폴 게린 작가는 전기세 과잉에 대해서 염려하는 사람 한국 관계자와의 대담 자리에서 "이걸 태양열이나 풍력에너지로 대신하면 된다"고 했고, 모니터 영상문제는 "구형(브라운TV)을 미래세대를 위해서라도 에너지효율이 높은 신형(LCD모니터)으로 교체하면 된다"고 말했다. 구형모니터를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이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 설득력이 없단"다.

외국의 전자아트 수리 사례를 보면 2가지가 있다. 미국과 일본은 고장이 나면 주저 없이 교체하는 방식이고 반면 독일은 가능한 구형TV를 확보하고 정 안되면 교체하는 방식이다.

알다시피 서울시립미술관에는 백남준 후기작품인 '메카트론' 전자벽화가 있다. 그런데 이때는 신형모니터를 썼다. 1988년에는 그런 신형이 없어 못 쓴 것뿐이다. 끝으로 하나 더 첨언하면 이 문제는 백남준의 저작권자 켄 하쿠다와 미국국립미술관과도 협의가 필요하다.
 
백남준 '다다익선이야기' 자료전과 백남준 국가지원을 촉구하는 '백남준세미나'
 
백남준 다다익선 작동하지 않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시물을 보는 어느 관객
 백남준 다다익선 작동하지 않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시물을 보는 어느 관객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국립현대미술관은 <다다익선>의 탄생과 그 설치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자료전인 '다다익선이야기'를 2019년 2월 28일까지 연다. 국립미술관 과천에서 30년간 상설전시 해오던 <다다익선>이 지난 2월부터 작품가동이 중단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연보 등을 통해 시기별로 총정리해 볼 수 있게 했다. 이와 함께 국립미술관은 2019년 내에 국내외 관련자와 면담과 공청회를 통해 <다다익선> 보존방안을 결정할 예정이다.

태그:#백남준, #다다익선, #이정성, #폴 게린, #노만 밸러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