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케이틀
 케이틀
ⓒ 텐바이텐

관련사진보기

 

힘이 세서 자부심? 오히려 그 반대

나는 힘이 세다. 단 한 번이었지만 200파운드가 넘는 바벨을 데드리프트 자세로 들어 올렸을 때, 또 16킬로그램짜리 케틀밸을 들고 20, 30번씩 스윙을 하면서 힘이 세다고 느꼈다. 근래에는 더욱 자주, 여러 사람에게 힘을 확인받았다. 주짓수 도장에서 함께 훈련한 남자 파트너로부터 힘이 좋다는 말을 들었고, 호신술 훈련 시간에는 나쁜 놈(bad guy) 역할에 심취해서 파트너의 손목을 너무 세게 당긴 나머지 멍을 남겼다. 비록 한나절 내내 활자와 씨름하는 게 일과의 전부이긴 해도 힘이 센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득이다. 

그래서 내가 힘에 있어서 자부심을 느꼈냐면 오히려 그 반대다. 내가 들었던 최고 무게의, 두세 배쯤 되는 무게를 드는 역도 고수와 코치들, 그리고 언제까지나 자세 연습만 할 것 같더니 단시간에 나를 앞질렀던 남자 신입을 보면서, 나는 내 힘이 별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힘센 나를 조금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내가 만났던 남자친구들, 그들은 하나같이 힘에 민감했다. 어쩌다가 장난스러운 힘겨루기가 시작되면 내가 힘이 세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고 거의 필사적으로 제압하려 들었다. 그들은 키와 몸무게, 근육량에서 나를 앞서면서도 조금이라도 허약해질까 봐 운동을 쉬지 않았다. 말인즉, 내가 힘을 내세워서 무섭게 덤비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기를 죽여놔야 한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말하던 모습이 얼마나 남자답던지! 정말이지, 기란 무엇인가.

힘 센 여자가 완전히 무력해지는 순간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나는 '힘이 센 여자'이긴 해도 '힘이 센 사람'이 되긴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힘센 여자 타이틀은, 힘센 사람과 다르게 자부심을 주지 못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힘이 센 여자에게는 힘이 약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무력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런 일을 한번 겪고 나면 그 끔찍한 기억을 오래도록 곱씹어야 한다. 오래전에 선배 언니와 함께 살던 때 우리가 잠든 틈을 타서 낯선 남자가 방 안까지 들어온 일이 있었다. 우리는 둘이고 그는 혼자였는데도 나와 언니는 죽은 사람처럼 누워서, 제발 그가 훔친 돈과 물건만 들고 나가주기를 기다렸다. 그 일이 있고 십 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괴한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악몽을 꾼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여성의 불완전함에 관한 신화 때문이다. 남성우월주의자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날조된 신화를 전 분야에 걸쳐서 왕성하게 지어냈고 열과 성을 다해서 퍼트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티나게 팔린 신화가, '여자는 힘이 약하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여성이라면, 지금껏 살면서 '힘으로 남자를 이길 수 없다', '타고난 힘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운동을 하면 할수록, 몸을 단련하면 할수록 가장 많이 들은 말 역시, '남자는 못 이긴다'는 것이다. 심지어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유명 선수들에게도 비슷한 사족이 따라붙는다. 세상은 남성보다 열등한 여성에 대해서 떠드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이런 이유로 여성은 힘이 세도 여성성을 갖추지 못한 주변인, 혹은 불완전한 존재로 묘사된다. 이는 미디어에 등장하는 힘센 여성의 면면을 살펴봐도 알 수 있는데, 2016년과 17년 사이에 방영된 두 편의 드라마 '역도 요정 김복주'와 '힘쎈 여자 도봉순'은 훌륭한 참고자료다. 각각의 드라마는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며 역도 유망주인 체대생과 초인적인 힘을 가진 경호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두 주인공의 이름이 촌스러운 것에서 말미암아, 우리는 이들이 '내 이름은 김삼순'부터 이어진, 사랑에 서툴고 연애 경험이 부족한, 평범 이하의 여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캐릭터에 걸맞게 복주와 봉순에게는 남몰래 짝사랑하는 남성이 있다. 그리고 두 여성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남자 앞에서 정체를 숨긴다. 남자들이 힘센 여자를 싫어한다는 통념 때문이다. 개성 있고 정의롭기까지 한 이 주인공들은 눈치 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은 남자를 사랑하느라 급격히 초라해진다. 남자 주인공의 '진짜 사랑'을 깨닫기 전까지, 이들은 어설픈 거짓말을 지어내고 죄책감 때문에 쩔쩔맨다. 약하고 가녀린 여자가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고뇌하다가 급기야 정체성을 버리려는 시도도 서슴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자신을 긍정하지만 그 계기는 힘센 여자라는 특이점까지도 포용하는 남자 주인공의 사랑이지, 자기애가 아니다. 결국 연약한 여성이나, 그 범주를 벗어난 강인한 여성이나, 모두 불완전한 존재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힘을 가져도 불완전한 존재라는 날조된 신화

자신의 몸을 믿지 못하고, 힘을 가져도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 이 날조된 신화의 가장 큰 해악은, 패배주의에 익숙하도록 여성을 길들이는 데 있다. 어느 누가 새로운 운동을 배우거나 기술 훈련을 받으면서 한계부터 미리 정해놓겠는가? 나의 가능성을 믿고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도 모자란 상황에서 여성은 지고 말 것이라는 자기 암시와 보이지 않는 한계선에 가로막힌다.

이런 일은 비단 체육관이나 픽션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여성의 신체와 힘을 둘러싼 혐오는 오랜 세월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차별의 근거로 작용해왔다.

"여자치곤 상당히 힘이 세군요."
원더우먼이 트레버 대위를 처음 만나서, 대위의 목숨을 구해주고 들은 말이다. 원더우먼이 대답한다.
"아뇨, 그냥 힘이 센 거예요."
그러자 대위는 '모욕할 뜻은 없었다'고 사과한다. 원더우먼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모욕이 아닌 건 아니죠."

세상은 변하고 있고 아름다움의 신화, 모성의 신화, 가부장제의 신화 등 여성을 불완전한 존재로 묶어 두려는 신화도 조금씩 깨어지고 있다. 여성의 몸과 힘에 관한 신화도 마찬가지다. 시효가 한참이나 지난 신화로 인해서, 더는 여성이 모욕받지 않기를 바란다. 

태그:#여성, #스포츠, #페미니즘, #여성혐오, #드라마
댓글1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운동하는 여자>를 썼습니다. 한겨레ESC '오늘하루운동', 오마이뉴스 '한 솔로', 여성신문 '운동사이' 연재 중입니다. 노는 거 다음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