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청계산입구역은 1년 내내 발 디딜 틈이 없다. 지하철에서 내려 큰길 따라 조금만 걸어 가면 자연스럽게 등산로와 연결 되는 산행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쉬운 접근성 때문에 사람들이 주로 찾는 청계산 주등산코스(청계산입구역,원터골입구~옥녀봉,매봉,이수봉)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코스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 틈에 끼여 밀려 올라가다 보면 산을 찾은 이유는 사라지고 마치 정상 정복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수행하러 온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청계산 오르는 길은 오직 이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는 법이 오직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듯 청계산에는 이곳 저곳 숨겨진 길들이 많다. 그 중 내가 애지중지 하는 보석 같은 숨겨진 샛길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내가 이 길을 만난 건 지금부터 7년 전 청계산 자락으로 이사 오면서부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가 보다.
과음을 달고 사는 주말 아침, 난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배낭을 챙겨 자전거를 타고 운중동먹거리촌으로 향한다. 버스정류장(운중동먹거리촌) 근처에 자전거를 세우고 편의점에 들러 생수 2병을 사면 등산 준비 완료다. 일명 해장 산행, 7년 전부터 한 달에 한두 번은 해오는 내 주말 아침 풍경이다.
길을 인도하는 질경이버스정류장에서 건물들 사이 큰 길을 따라 150여m 올라가면 숲 사이로 작은 등산로 입구가 보인다. 등산로 이정표가 숨겨져 있어 초행인 사람들은 자칫 그냥 지나칠 수 있다. 등산로 입구로 들어서면 야자매트 사이를 비집고 줄지어 살고 있는 질경이 군락이 길을 인도 한다.
질경이는 이곳이 분명 사람들이 다니는 길임을 증명해주는 식물이다. 여기서 잠깐 꼬마 상식 하나. 산길을 가다 길을 잃게 된다면 질경이를 따라 내려오면 된다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질경이가 바로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이는 질경이가 숲 속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인데 키 큰나무들이나 풀섶에서는 키 작은 질경이는 햇볕 경쟁에서 밀린다. 이에 질경이는 밟힐 위험에도 불구하고 키 큰나무나 풀이 없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선택했다.
그런고로 질경이 이름은 한자로 차전초(車前草)라 한다(종자를 '차전자(車前子)'라 함) 나는 질경이를 볼 때마다 밟히고 찢겨도 꿋꿋하게 살아 가는 고단한 우리네 민초들 삶을 보는 거 같아 짠하고 한편으론 고향 마을길이 생각나 정겹기도 하다.
질경이길을 지나 등산로를 걷다 보면 점점 숲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를 보게 된다. 이때부터 청계산 기운이 온몸에 퍼지기 시작하는데 나는 입구부터 걸어 들어 가는 이 10여 분의 시간을 즐긴다. 마치 속세에서 극락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도시의 소리를 뒤로 하고 점점 새소리 바람소리를 따라 걸어 들어 가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평온한 바람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입구에서 10여 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지하통로가 나온다. 청계산 자락이 외곽순환도로에 잘려나간 구간이다. 지날 때마다 인간이 자연에게 얼마나 이기적인 동물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구간이다. 이기심 터널을 지나 산자락을 타기 시작하여 5분쯤 올라가면 첫 번째 쉼터가 나온다. 누군가 매일 청소를 하는지 올 때 마다 깨끗하게 정돈돼 있어 쉬어 가기 좋다. 한 가지 내 눈에 거슬리는 것은 굳이 산속까지 운동기구를 가져다 놓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거다.
쉼터에 앉아 잠시 물 한 모금 마시고 개울에서 세수도 하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한다. 한 20여 분 걷다 보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나는 이곳을 국사봉 깔딱고개라 부른다. 물론 청계산 원 깔딱고개는 원터골에서 매봉으로 오르는 길에 있다. 이처럼 깔딱고개라는 이름은 대개 정상 근처 마지막 가파른 구간을 칭하는데 숨이 깔딱깔딱 차올라 '깔딱고개'라 이름 지었을 터이다.
국사봉 샛길 깔딱고개를 오르다 보면 줄을 잘못 선 죄로 난데없이 대못 다섯방을 맞고 울고 있는 잣나무가 있다. 작년 초가을 산에 오르는데 깔딱고개에 손잡이 로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간지점쯤에 로프를 살아 있는 잣나무에 대못을 박아 매어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날 성남시청에 항의 했더니 다행히 조치를 하였으나 대못 다섯방을 맞았던 잣나무는 상처가 남아 지금 것 울고 있다. 공사하는 사람들이 조금만 자연에 대해 생각을 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는데 지날 때마다 속상하다. 인간세상이든 자연에서든 줄 잘못 선 죄로 눈물 흘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깔딱고개를 지나면 바로 능선이 나오는데 그곳에서부터 국사봉까지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길이다. 산에 오르다 평지를 만나면 뭔가 공짜로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국사봉까지 가는 길이 바로 그런 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구간을 '공짜길'이라 부른다. 이 공짜길을 걷다 보면 연리근이 나온다. 연리지, 연리근은 두 나무가 붙어 자라는 상태를 말한다. 이곳 연리근은 인접해 있는 두 소나무 뿌리가 붙어 살을 섞고 살아간다. 사람도 이와 같이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나눠가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닌 것이 인생공짜길을 10여 분 걸어가면 이제 막바지 오르막길이 나온다. 깔딱고개 만큼은 아니나 평탄한 길을 걷다 갑자기 능선을 타다 보면 조금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실 초보 등산객들에게 정상 근처 막바지 오르막 길이 제일 힘들게 느껴진다. 정상이 얼마큼 남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때 내려오는 등산객들에게 물어보면 하나 같이 '아 얼마 안 남았어요. 거의 다 왔어요'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친구 딸이 이 말을 듣고 다 올라가더니 '산에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하는 말을 듣고 박장대소한 적이 있다. 따지고 보면 다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올라와서 보면 그 길은 얼마 안 남은 길로 보이게 되어 있다. 그 초보 등산객도 정상에서 다시 내려올 때 올라오는 등산객이 물어보면 '아 거의 다 왔어요'라는 대답을 할 터이다. 우리 사는 인생이나 등산이나 이처럼 알고 나면,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고려 말 충신 조윤이 청계산에 은거하며 멸망한 나라를 생각했다 하여 붙여진 국사봉(國思峰)은 해발 540m의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다. 하지만 정상에서는 시야가 탁 트여 성남, 분당은 물론 인덕원 과천을 아우르는 조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국사봉을 7년이나 들락날락 했던 이유는 그곳에 청계산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청계산을 자주 오르내리다 보면 서로 마주치며 얼굴을 알게 되고 그러다 자리에 앉아 사는 얘기 하며 친해진 사람들이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앉아서 사는 얘기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게 사는 맛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길을 가야지세상에 좋은 산은 많다. 세상에는 좋은 길도 많다. 허나 유명하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고 무작정 따라갈 필요는 없다. 아무리 좋은 산이라도 내 맘에 안 들면 좋은 산이 될 수 없고 아무리 넓고 큰 길이라도 내가 편하지 않으면 좋은 길이 아니다. 남들 따라 걸으며 치이고 부대끼는 길이 즐거울 리 없다. 사람들에 밀려 흘러 가는 길에 한번뿐인 내 인생을 맡길 수 없지 않은가.
다가 오는 주말 사전투표 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나만의 샛길을 찾아 걸어보는 걸 추천한다. 그런 길 중 하나가 '운중동~국사봉' 길이다. 청계산 국사봉 샛길로 오시라. 혹시 그날 마주치게 되어 함께 막걸리라도 한 잔 하게 된다면 당신도 청계산족이 되는 거니까 딱히 손해 볼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