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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5.18 09:09수정 2018.05.18 10:38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아는 집에 얹혀살았다. 그 집 아들과 한방을 썼다. 그 친구는 잠을 자고 나는 공부하고 있었다. 그 집 어머니가 방문을 열더니, "왜 자는데 불을 켜놔" 하시며 형광등 스위치를 내렸다.
대학에 가서 같은 학과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데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아는 게 없어 할 말이 없었다. 이제나저제나 끼어들 틈을 엿보는데, 친구들이 늦었다고 집에 가잖다.
신입사원 시절, 서울여상 나온 여성과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나보다 입사가 6개월 빨랐고 나이는 6년 아래였다. 하지만 자신이 나보다 급수가 낮고 월급도 적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서울여상 갈 정도면 서울대도 갈 수 있는 실력이었다. 단지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았을 뿐.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는 내게 잘 대해줬다. 하지만 둘만 남으면 없는 사람 취급했다. 작성한 보고서도 그녀가 타자로 쳐주지 않아 나는 졸지에 일하지 않는 사람이 됐다.

사람은 언제 행복할까?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었을 때? 갖고 싶은 것을 가졌을 때? 이성과 사귈 때? 물론 이럴 때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구분할 게 있다. 쾌락과 행복의 차이다. 둘을 자주 헷갈린다. 경계가 애매하기도 하다. 쾌락은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이다. 본능과 관련이 있다. 우리 뇌의 저 안쪽에 있는 뇌간이 관여하는 '느낌'이다. 뇌간은 파충류의 뇌라고도 하는데, 인간이 최초로 갖고 있던 뇌다. 그것에서부터 뇌가 진화해온 것이다.

인간은 파충류의 뇌를 아직도 갖고 있으며, 식욕과 성욕 등을 관장한다. 동물도 갖고 있다. 쾌락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동일하게 느낀다. 그러나 지속성이 없다. 순간적이다. 그때만 즐겁다. 잠깐 행복할 뿐이다. 물론 식욕과 성욕 등 기본 욕구가 충족되어야 행복하다. 굶어 죽을 지경에 있으면서 행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쾌락만으로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명을 안다는 쉰 살이 넘어 행복이 무엇인지 알았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이럴 때다. 모르던 것을 알고 깨달았을 때, 한 가지 일에 깊이 빠졌을 때, 내가 유능하다고 느낄 때, 무언가 성취했을 때, 인정받을 때, 누군가와 관계가 좋을 때, 마음이 고요한 때, 만족하고 감사할 때, 남을 돕거나 남과 협력할 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추구할 때, 정의로운 편에 서 있다고 느낄 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라 느낄 때다.

바로 지금이 그렇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대부분은 말이나 글과 관련이 있다. 말하고 쓰면서 행복하다. 어떻게 하면 말과 글로 행복할 수 있는지 열 가지를 생각해봤다.

첫째, 자존감을 느낄 때다. '내가 그래도 이만큼은 되는구나' 하고 존재감을 느낄 때 뿌듯하다. 2012년 미국 하버드대학 다이애나 타미르(Diana Tamir)와 제이슨 미첼(Jason Mitchell)이 100명의 뇌를 관찰했다. 연구에 따르면, 자기 이야기를 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가 음식을 먹거나 돈이 생겼을 때 활성화되는 영역과 일치했다. 자기를 표현하는 일이 밥 먹는 것과 같은 쾌감과 만족을 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없는 사람처럼, 투명인간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말과 글이 없던 때에도 동굴에 벽화를 그려 자신을 표현하고자 했다.

우리 몸은 먹은 것을 잘 배출해야 탈이 없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읽고 들은 것은 말하고 써서 출력해야 정신적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작동한다.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가 활발하게 선순환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읽기, 듣기에 그친다. 말하기, 쓰기로 확장되지 않는다. 이유가 있다. 틀렸다고 할까봐, 수준이 낮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그렇다. 정답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표현하지 않는다. 의견이 달라 사이가 나빠질까봐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르면 적이 된다.

스스로 기대하는 수준에 못 미칠까봐 그렇기도 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입력은 많이 해서 저마다 생각하는 수준은 높다. 그런데 그것을 말하고 쓰는 일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자신이 없고, 자신을 직시할 용기가 없다. 잘난 체한다고 할까봐 조용히 있기도 한다. 그냥 묻어가자, 중간만 가자면서 침묵한다. 결국 행복하지 않다.

꽂히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둘째, 인정받을 때다. 스스로 만족하는 수준을 넘어 누군가가 나를 알아줬을 때 행복하다. 비범한 사람은 성취만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보통 사람은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누구나 인정받기 위해 산다. 좋은 학교에 가려는 것도, 돈을 많이 벌려는 것도, 높은 지위를 탐하는 것도 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인정받는 수단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돈이 많았다. 그래도 더 벌려고 했다. 돈이 목적이었을까. 아니다. 인정받고 싶어서다. 재계 서열 2위가 아니라 1등이 되고 싶어서다. 1등 할 만큼의 역량이 있는 사람이란 것을 인정받고 싶어서다.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고 했다. 자기 안에는 두 사람의 내가 존재하는데, 나 스스로 이렇다고 생각하는 '나'(I)가 있고, 남들이 이렇다고 하는 '나'(Me)가 있다. 객체화된 '나'(Me)는 주체인 '나'(I)에 항상 못 미친다. 나 스스로 평가하는 내가, 남들이 보는 '나'보다 늘 우월하다는 의미다. 사람은 남이 생각하는 '나'와 나 스스로 생각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한다. 남들이 보는 '나'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힘쓴다.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호네트는 인정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서 얻는 인정이다. 이는 사랑을 기반으로 하며, 인정을 통해 자신감을 얻는다. 이런 인정을 받지 못할 때 고립감과 소외감을 느낀다. 두 번째, 평등한 대접과 같이 사회에서 받는 인정이다. 이는 권리를 기반으로 하며, 이런 인정을 통해 자존감을 느낀다. 이것이 충족되지 못할 때 차별받는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인정이다. 이를 통해 자긍심을 느낀다. 예를 들어 어느 학생이 글을 한 편 썼다고 하자. 그 글을 가족이나 옆에 앉은 짝꿍에게 보여줬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자신감을 잃는다. 선생님이 부잣집 친구가 쓴 글만 잘 썼다고 칭찬해주면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존감에 손상을 입는다. 그런데 글짓기 대회에 나가 상을 받으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며 자긍심을 느낀다. 행복하다.

셋째, 성취할 때다. 인정받으면 영향력이 생긴다. 말과 글로 인해 주변이 영향 받고 변화하고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자아실현 욕구가 충족된다. 오락게임이 재밌는 이유는 이뤄내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본능적인 짜릿함 뒤에 성취감이 있다. 올라가는 단계가 없는 게임은 없다. 레벨이 없으면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 이성을 사귀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배후에는 상대의 마음을 빼앗았다는 성취감이 자리하고 있다. 이성과 오래 교제하다 보면 시들해지는 이유는 이미 성취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의미 있게 살고 싶다. 나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보여주고 싶다. 이것은 말과 글로 가능하다. 내가 모신 두 대통령과 회장은 끊임없이 말했다. 말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인정받음으로써 뭔가를 바꾸고자 했다. 자신의 말과 글로 영향을 끼침으로써 무언가 역할 하고 기여하고자 했다. 그로부터 얻는 성취감이 짜릿해서 그것을 다시 느끼고 싶어 했고, 다시 느끼기 위해 자신의 말과 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말과 글이야말로 온전히 내 안에서 만들어진 나만의 성취이고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넷째, 몰입할 때다. 몰입은 그 자체가 희열이다. 잠이 들 무렵 쓸거리가 생각나 엎치락뒤치락했다. 당장 일어나 쓸까? 내일 아침에 쓸까?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뒤척이는 시간이 행복하다. 나에게 글쓰기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몰입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다. 몰입하려면 관심 분야가 있어야 한다. 취미도 좋고 전문 분야여도 좋다. 낚시, 독서, 여행, 요리 무엇이든 상관없다. 잘할 수 있거나 하고 싶은 일이면 된다. 그리고 그 관심 분야가 남의 반응을 유발하는 것이면 더욱 좋다.

무엇보다 관심 분야가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의욕을 갖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 일을 계속하면 이러한 이익이 있을 거야'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내가 이루려는 목표가 남에게도 유익해야 한다. 그래야 보람을 느낀다.

하나에 꽂히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꽂히면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안 보이던 게 보인다. 꽂히기 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게 자꾸 눈에 띈다. 둘째, 모든 것이 재해석된다. 드라마를 봐도, 책을 읽어도, 친구 말을 들어도 꽂혀 있는 것의 프리즘을 통해 재해석된다. 예를 들어, 글쓰기에 꽂혀 있는 사람은 밥을 먹을 때도 글 쓰는 과정과 음식 만드는 과정을 비교 설명하고, 산에 오를 때도 글쓰기를 등산에 비유한다. 차를 타고 갈 때도 운전의 원리가 글쓰기 원리와 같다고 말한다. 셋째,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많은 시간을 한 가지만 생각하기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상하고 추론한다. 덕후들이 기발한 것을 만들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장은 일요일에도 즐겁게 나간다

다섯째, 축적했을 때다. 사람은 축적이 일어나야 욕심을 내고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 싸라기눈은 쌓이지 않는다. 함박눈이 와야 한다. 집중적으로 와야 한다. 그러면 쌓인다. 눈이 쌓이면 눈싸움을 할까, 눈사람을 만들까 궁리한다. 그럴 때 행복하다.

불현듯 지적 욕구와 호기심이 휘몰아치면 그때를 놓치지 말고 축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쌓이기 시작한다. 축적 욕심이 생긴다. 돈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돈을 가지려는 이치와 같다. 돈이 없는 사람은 그날 벌어 그날 쓰니 쌓이지 않고, 쌓는 재미도, 방법도 모른다. 돈이 돈을 벌듯이 쌓아놓은 쓸거리가 새로운 쓸거리를 생산하고 쓰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부자가 불어나는 통장 잔고 보듯, 쓸거리의 축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 글을 쓰자.

여섯째, 호기심이 충만할 때다.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그랬다. "모든 게 심드렁하고 그날이 그날 같고 궁금한 게 없으면 이미 죽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호기심 덩어리였다. 모든 게 신기해서 계속 물었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그런데 되지도 않는 질문을 한다고 엄마에게 혼나고, 선생님에게 야단맞으면서 호기심이 무뎌졌다. 이후로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호기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글쓰기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뇌과학이 궁금해졌다. 심리학, 문학, 철학, 교육학도 알고 싶어졌다. 글쓰기를 넘어 말하기, 소통, 리더십으로 관심 영역이 넓혀졌다. 누군가 그랬다. "지식의 영토가 넓어지면 그 넓어진 영토를 따라 해안선이 길어지고, 길어진 해안선을 따라 모든 게 궁금해진다." 맞는 말이다.

아는 게 많아지면 모르는 것이 줄어드니까 덜 궁금해질 것 같지만, 그 반대다. 아는 게 많아지면 아는 것의 덩어리가 커져 표면적이 넓어지고, 그 넓어진 표면적에 새로운 호기심이 마구 달라붙는다. 내가 써둔 생각과 연관된 생각이 떠오르고, 써둔 글의 빈칸을 채우는 생각이 돋아난다. 잠이 깰 듯 말 듯 한 새벽녘과 잠들기 직전에 특히 그렇다. 잊기 전에 써야 한다는 비몽사몽 간 상황이 행복하다.    

일곱째, 알고 깨우쳤을 때다. 인간 역사에서 알고 모르고는 생존의 문제였다. 아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인간의 뇌는 알았을 때 행복감을 느끼도록 진화돼왔다고 한다. 그래야 알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 모두는 아는 것에 가까이 있으면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는 것에서 멀어져 있으면 불안하다. 깜깜한 방에 들어가면 불안한 것과 같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앞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를 때 불안하다.

회사 나가기가 싫거나 일요일 오후마다 불안 증세에 시달리면 의심해봐야 한다. 내가 아는 것에서 소외돼 있는 것은 아닌지. 사장은 일요일에도 즐겁게 나간다. 해야 할 일이 불현듯 생각난다. 다 알기 때문이다. 일의 배경, 맥락, 취지, 의도, 목적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러면 집에 있지 못한다. 밤새워 힘든 일을 하고도 행복하다. 알기 때문에 그렇다.

또한 우리는 알려준 사람에게 호감이 간다. 저 사람이 뭘 믿고 내게 알려줄까, 나를 대접해주는구나. 이런 마음이 들 때 행복하게 일한다. 또한, 무슨 일을 하다가, 혹은 무언가를 읽거나 보다가 문득 그것의 원리와 본질을 깨달았을 때 머릿속이 시원해진다. 통찰한 순간이다. 이 순간에 우리는 쾌감을 느낀다.

관계를 만드는 것 역시 말과 글이다

여덟째, 성장할 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윤리학>에서 한 말이다. 인간은 탁월함(Arete)을 추구할 때 행복하다. 탁월함에는 지적 탁월함(Theoria)과 성격적 탁월함(Praxis)이 있다. 지적 탁월함, 즉 지혜와 통찰 같은 것은 배움에서 생기고, 성격적 탁월함, 즉 관용과 절제 같은 덕스러운 품성은 습관에서 얻어진다. 나에게는 읽기, 말하기, 듣기, 쓰기가 탁월함의 추구 과정이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되풀이하면 그것이 곧 배움이고, 이런 배움을 통해 지혜와 덕성이 쌓인다고 믿는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할 것이다. 무엇인가를 읽었다. → 읽은 것을 말할 기회가 생겼다. → 말하면서 읽은 것이 정리되고 막연했던 것이 확연해졌다. → 내 얘기를 들은 사람이 내 말에 살도 붙여준다. → 들으면서 배운다. → 듣고 느낀 것을 어딘가에 쓴다. → 쓰다 보니 반응이 온다. → 인정받은 느낌이 든다. → 더 쓰고 싶다. → 글쓰기가 재밌다. → 쓰기 위해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듣는다. → 내 안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 나날이 내가 향상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말한 스피노자. 그 역시 인간은 누구나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경향이나 힘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코나투스(conatus)'라고 했다. 코나투스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를 갖고,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향해 나아가는 의지와 노력을 욕망이라고 했다. 성장 욕구다. 내 안이 채워지고 충만감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코나투스다.

말하기, 쓰기는 코나투스를 증가시킨다. 블로그와 홈페이지에 글을 쓰면서 알았다. 글이 많아질수록 충만함을 느꼈다. 양적 성장을 경험한 것이다. 전에 쓴 글을 읽어보면 허접하다. 그사이에 그만큼 성장한 것이다. 질적 성장이다. 나는 글을 통해 나의 성장을 확인한다. 강의에 갈 때마다 새로운 얘기를 하나씩 추가하려고 한다. 추가할 거리를 찾을 때 즐겁고, 그것을 발견하면 짜릿하다. 강의에서 새롭게 추가된 내용을 말할 때 혼자 전율을 느낀다. 내가 오늘도 한 뼘 더 성장했구나.

아홉째, 관계가 좋을 때다. 관계는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경쟁할 때는 왠지 불안하고 초조하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한다. 만족이 없다. 그러나 누군가를 도울 때, 남과 협력할 때는 행복감을 느낀다. 관계를 만드는 것 역시 말과 글이다. 말 한마디, 글 한 줄이 관계를 좋게도 나쁘게도 한다. 나는 말과 글을 통해 남들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한 연결하기 위해 말하고 쓴다. 기고하고 강연할 때 댓글이 달리고 청중들과 눈이 마주치면 그들과 연대감을 느낀다. 아늑하고 행복하다.
 
열째, 꿈이 있을 때다. 청와대를 나올 때까지 꿈이 없었다. 목표도 없었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떠밀려 살아왔다.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갔다. 그러다 3년 전부터 꿈이 생겼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장래 희망으로 '배우'라고 써냈다가 선생님께 혼난 이후 처음이다. 작가가 되고 싶다. 소설을 쓸지 시를 쓸지 모르지만 문학의 꿈이 자라기 시작했다.

형광등 불이 꺼지면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들지 못했다. 동트기를 기다렸다. 대학시절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하고 집에 간 날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책을 읽었다. 신입사원 때에는 신혼이던 아내에게 하소연하다 복받쳐 울었다. 참 못났다. 그러나 나만의 분투였다. 투명인간으로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나는 오늘도 아는 것이 재미있어 책을 읽는다. 동영상 강의를 듣는다. 생각난 것은 메모한다. 그리고 강의할 때 말한다. 일상이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다. 이 네 가지가 리듬을 타며 나를 드러낸다. 누구의 간섭도 없고, 눈치도 보지 않는다. 날마다 새롭다. 하루하루가 충만하다. 스스로 고양되고 성숙해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나로서 나답게 산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연재한 '강원국의 글쓰기'는 24회를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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