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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다

나는 지금 뉴욕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다. 이륙한 지 두어 시간 지났으니 아직은 미국 부근의 대서양 위에 떠 있을 터이다. 정시 퇴근을 하고 바로 뉴욕 JFK 공항으로 왔는데, 델타항공사의 발권 창구와 보안검색대는 예상보다 붐벼서 아슬아슬한 탑승이 되었다.

밤 비행기를 탈 때면 무료로 제공되는 기내식을 먹어야 할까 그냥 잠들까 항상 고민하게 된다, 결국 기내식을 받으면 칼로리가 가벼운 메뉴만 골라 먹고 와인 한 잔을 곁들일 때가 많다. 알코올에 약한 컨디션일 것 같으면 드라이한 레드 와인과 스프라이트를 시켜 둘을 섞어 마실 때도 있다. 애주가들에게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한소리씩 듣지만 루비 빛을 띠는 둘의 조화가 상그리아 맛을 내기 때문에 사실은 꽤 근사하다.

오늘은 연어 몇 점이 들어간 샐러드와 예상보다 부드러웠던 쇠고기 두어 점을 집어먹었다. 디저트로 나온 초코케이크는 설탕이 가득할 게 뻔해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먹지는 않았다.

식탐 많은 사람이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매일 두세 번 '이 음식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고, 그중 한번은 먹고 나서 꼭 후회하곤 한다. 하지만 오늘은 내일부터 맛볼 파리의 음식들에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파리의 디저트는 터무니없이 달기만 한 미국 디저트와 차원이 다른 우아함이 있다고들 하니까.

"Coffee or Tea?"

짙은 남색 유니폼을 입은 미국 승무원들이 다소 무뚝뚝한 어투로 커피 서빙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 승무원의 여린 몸매와 상냥한 목소리에 익숙한 나는 수년 전 처음 접한 미국 승무원들의 비교적 튼튼한 체격과 다소 터프한 서비스가 낯설기만 했다.

"응급상황에 대처하려면 승무원의 건장한 체격이 도리어 도움이 될 거다."

아빠가 그런 말씀을 하신 후 나는 저들의 단단한 팔 근육에 도리어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다. 불안정한 대기권에서 갑자기 기체가 흔들려 선반 위의 짐들이 와르르 쏟아질 경우에도 한 손으로 짐을 낚아채 척척 캐빈에 올려 넣는 그런 장면이 그려지니 말이다.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아빠와의 파리 여행을 추진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두어 달 전 교제하던 남자친구가 프러포즈를 한 뒤로 나를 부를 때 '미세스 P'란 애칭을 쓰기 시작했다. 미국은 결혼하면 여자가 남편 성을 따르는 문화가 있는데,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가 따르고 있고, 나 역시 '미스 강'에서 남자친구의 성인 '미세스 P'로 호칭이 바뀌게 될 터이다.

"그래도 난 내 성을 유지 하고 싶은데!"

남자친구는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내 의견을 존중해주겠다고 하여 일단락되었지만, 나는 행복한 가운데서도 왠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성만 바뀌는 게 아니라 소속이 바뀌고 생활의 중심이 달라지는 일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남은 싱글 기간 무언가 해야겠다는 초조감이 생기면서, 나에게 성을 주신 아빠가 보이실 서운한 표정도 떠오르고, 사회인이 되면 돈을 모아 유럽여행을 한번 가겠다고 미뤄왔던 학창시절의 희망 사항도 다시 보글보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때는 돈이 부족해서, 한때는 시간이 없어서, 그리고 대부분은 다음에 가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미뤄왔던 계획. 가장 자유로운 싱글 때도 하지 못한 일을 배우자가 생기고 아이를 낳은 뒤에 한다는 건 턱도 없는 소리다. 모든 일에는 적기가 있는데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빠, 저하고 파리 여행 같이 하실래요?"

보통 때라면 다음을 기약했을 아빠도 뜬금없는 내 제안을 곧바로 받으셨다. 쓸데없는 의견충돌로 서먹서먹해져 있던 부녀 사이를 아빠도 내심 회복해보고 싶으셨던 거다.

고민 없이 결정한 여행지, 파리

기내는 말소리로 웅성거리지만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간혹 어느 외국어는 소리 자체가 시끄러워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데, 부드럽게 굴러가는 불어는 참 아름다운 언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어쩌면 언어 자체가 아니라 낮고 조용한 톤으로 조곤조곤 말하는 그들의 에티켓이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신문에 났던 기사가 생각난다. 한국의 중산층 기준은 부채 없는 30평 이상의 아파트와 월 소득 500만 원 이상 등 철저하게 소득과 재산이 척도인 반면, 몇몇 선진국은 인생의 가치가 기준점이라고 한다. 그중 퐁피두 대통령이 1970년대에 삶의 질(Qualité de vie)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했던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을 보고 일종의 경외심을 느꼈던 일이 있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 할 수 있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와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으며, 남과 다른 맛을 내어 대접할 수 있는 요리가 있을 것, 그리고 공분에 의연히 참여하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
 
이미 40여 년 전에 삶의 여유와 올바른 가치관을 기준으로 삼은 그들이 부러웠던 탓인지 나는 큰 고민 없이 파리를 내 첫 유럽 여행지로 정했고, 쇼핑을 하거나 뻔한 랜드마크에서 사진만 남겨오는 여행은 애초에 우리 취향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치밀한 테마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미 40여 년 전에 삶의 여유와 올바른 가치관을 기준으로 삼은 그들이 부러웠던 탓인지 나는 큰 고민 없이 파리를 내 첫 유럽 여행지로 정했고, 쇼핑을 하거나 뻔한 랜드마크에서 사진만 남겨오는 여행은 애초에 우리 취향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치밀한 테마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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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40여 년 전에 삶의 여유와 올바른 가치관을 기준으로 삼은 그들이 부러웠던 탓인지 나는 큰 고민 없이 파리를 내 첫 유럽 여행지로 정했고, 쇼핑을 하거나 뻔한 랜드마크에서 사진만 남겨오는 여행은 애초에 우리 취향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치밀한 테마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파리에 대한 자료들을 섭렵하다 보니 나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 한 달간이 지금껏 내 인생에서 가장 피곤하고도 설렌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파리에 체류하며 여행기를 쓰셨던 아빠도 젊은 시절에 취재하던 그 기분으로 여러 가지 자료를 보셨다고 한다.
 
"인간의 개성과 개인의 존엄성에 모든 비중을 두고 있는 그들의 가치체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39년 전 아빠의 여행기 일부를 옮긴 글이다. 아빠와 딸, 노인과 청년, 남자와 여자, 취향은 비슷하지만 친하지는 않은 우리 부녀가 유별난 준비 기간을 거쳐 얻게 될 이번 여행의 수확은 과연 무얼까?

이내 손에 잡히는 무엇이 없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여행을 하는 부녀 커플이 얼마나 있을까? 돈이든 시간이든 성격이든 이런저런 이유로 함께 하는 일정을 맞추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보통 때는 기내에서 편한 운동복을 입었을 나는 오늘은 올 블랙의 미디엄 길이 원피스에 짧은 목 스카프, 그리고 진주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와인 한 잔에 취기가 올라 알딸딸해지니 마치 파리지엔느가 되어 본국에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이제 막 인천공항을 출발하셨을 아빠도 기내에서 나처럼 와인을 한 잔 하고 계시면 좋을 텐데. 그렇게 우리는 지금 파리로 간다.

[아빠의 이야기] 처음으로 우버 택시를 타다

12시간의 비행 끝에 샤를 드골공항에 도착한 내가 짐 찾는 곳으로 가니 뉴욕에서 먼저 도착한 딸이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화사하게 웃었다. 곧 짐을 찾은 나는 파리로 들어가는 지하철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딸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문자를 보냈다.

"2분이에요."
"뭐가?"
"2분 뒤 건물 밖에 우버(Uber)가 도착해요."


생소했다. 우버란 스마트폰의 앱으로 승객과 차량을 이어주는 차량 서비스를 말하는데, 신문기사에서만 보았지 실제로 사용해 본 일은 없었다.

"왜 지하철 같은 것도 있지 않으냐?"
"네, 있어요."


공항에서 파리로 들어가는 방법은 39년 전 내가 파리에 처음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에어프랑스 공항 리무진, 버스, 택시, 지하철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파리의 지하철엔 서울의 지하철 비슷한 메트로와 '지역급행철도망(Réseau Express Régional)의 약자로 한국의 국철 비슷한 RER의 2가지 있어 서로 환승이 되는데, 참고로 파리의 지하철 표를 구입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파리의 지하철표는 여러 종류가 있다.
▲ 지하철표 종류 파리의 지하철표는 여러 종류가 있다.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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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표를 사야 하느냐는 자신이 머무는 기간과 관계있을 것인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까르네∼나비고의 묶음 또는 정기권이 싸게 먹힌다. 그런 이야기를 내가 파리의 메트로를 타고 다녔던 과거의 경험과 함께 언급했더니 딸이 웃으며 말했다.

"그땐 아직 젊으셨잖아요. 두 사람이면 우버 택시도 그렇게 비싸지 않아요. 짐도 있고. 메트로는 나중에 타세요."

정말 2분 뒤에 딸이 부른 우버 택시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 지정한 장소에 나타난 우버 택시에 승차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파리에 머무는 동안 관광지를 걸어 다니다가 피로해진 시간에 딸이 휴대폰으로 부른 우버 택시는 대개 2분 정도면 이쪽에서 지정한 장소에 나타났다. 휴대폰에 그 자동차의 번호가 먼저 뜨면서.
 
우리가 묵었던 파리의 파크 하이어트 호텔.
▲ 호텔 우리가 묵었던 파리의 파크 하이어트 호텔.
ⓒ 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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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정한 숙소는 파리의 도심인 제2구의 파크 하얏트 파리-방돔 호텔이었다.  

"너무 비싼 곳 아니냐?"

내가 묻자 딸이 웃으며 대답했다.

"사흘뿐이에요. 신용카드 적립 포인트로 얻은 거니까요."
"그럼 그다음은?"
"아파트로 옮겨야죠.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이래요."


우버 택시도 신용카드 마일리지도 여행지에서 아파트를 얻는 것도 나의 젊은 시절에는 모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제도였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나는 딸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긴 내가 파리를 처음 방문한 39년 전에는 이 아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기다. 차창으로 보는 시가지는 39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 차가 한 곳에 도착했다. 내려서 보니 우리가 묵게 될 호텔 이름은 거리를 따라 죽 잇대어 지어진 5층 건물의 한 출입구 위에 'Park Hyatt Paris'라고 작은 글씨로 쓰여 있을 따름이었다.

5성급의 호텔이라면 크고 번듯하고 독립적인 건물을 연상하던 내게는 좀 의외였다. 그러나 파리 호텔의 입구가 대개 이런 식일 수밖에 없는 사정은 파리의 대부분이 19세기에 지어진 건물들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로비도 작았으나 총 158실의 호텔 규모 자체는 그리 작은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들으니 한국에서 신혼여행을 온 커플이 잘 묵는 호텔이라는 것이었지만, 비수기라 그런지 정작 내가 투숙하는 동안엔 단 한 명의 한국인도 만나지 못했다. 딸과 나는 짐을 푼 뒤 로비로 내려와 프런트에서 파리 시가지 지도를 얻었다. 무료다. 꽤 잘 그려진 지도였지만 딸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구글 지도면 다 되니까요."

그리고 딸이 휴대폰을 보여주는데 주소나 지명만 치면 해당 지도가 나오고, 거리 계산도 해주고 위성사진으로 거리 모습까지 보여준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딸과 나 사이의 세대 차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호텔 밖으로 나오니 길 한쪽 끝에 방돔광장(Place Vendôme)에 세워진 나폴레옹의 아우스털리츠 전투(La bataille d'Austerlitz) 승전탑이 랜드마크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위치가 좋아 여길 택했어요."

그랬다. 호텔에서 오페라 가르니에까지는 도보로 2분, 콩코르드광장까지는 8분, 루브르박물관까지는 16분 거리였다. 그리고 호텔 주변에 잇닿은 명품 상점들. 나는 명품상점의 진열장을 보는 대신 파리의 하늘을 보았다. 황사나 미세먼지로 뿌연 서울의 하늘과 대조적인 파리의 푸른 하늘.

아, 예전엔 서울도 저랬는데.

덧붙이는 글 | 아빠와 딸이 함께 쓰는 파리여행기입니다.


태그:#파리여행, #부녀여행, #프랑스여행, #우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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