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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에 공화국은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정언명령은 언제 들어도 설레고 동시에 낯설다. 민주주의의 쟁취와 성장은 우리가 두 눈으로 지켜봤지만, '공화국'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공화국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는 무신경해왔다. 독재정권 타도와 국민이 잠시 위임해두었던 권력을 사유화한 지도자를 처단하는 데는 '민주주의'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모였던 시민들은 개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다. 선악과를 먹은 정치는 독재라는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기에, 시민들이 떠난 거리에는 항상 독재의 잔재가 자라났다.

그렇다고 비관할 필요만은 없다. 원죄로부터 정치를 구원할 구세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공화'이다. 보통 republicanism으로 많이 표기하지만, 이보다는 'Universe harmony'가 더욱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공화' 혹은 공화주의'의 방점은 바로 'harmony'에 있다. 권력을 창출해내는 방식에 초점을 두는 민주주의와 달리, 공화주의는 그 권력이 사회통합에 이바지하는 데까지 초점을 확장한다. 공화주의에서 말하는 권력이란 '법의 지배(the rule of law)'이며, 법을 만들어가는 그 방식이 공화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다.

법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론장'에서 시민들의 참여와 논의를 통해 만들어진다. 개인들은 각자의 '좋음'을 공론장으로 가져온다. 저마다의 좋음은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상호 검증을 통해 '상호주관적인(intersubjective) 좋음'으로 거듭난다. 모두가 인정한 상호주관적인 좋음들이 법의 내용을 형성하고, 그 법이 권력의 근원이 된다. 확실히 우리는 법의 지배 속에 있지만, 그 법의 주인이 우리이기에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다. 지배가 소수에 독점되지 않고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권력에 복종할 때 비로소 진정한 '공화'가 가능해진다.

공화주의의 기본적 요소는 '시민들의 참여'와 시민들이 모일 수 있는 '공론장'이다.
▲ 공론장에 모인 로마 시민들 공화주의의 기본적 요소는 '시민들의 참여'와 시민들이 모일 수 있는 '공론장'이다.
ⓒ http://www.ushisto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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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공론장'이 없었다. 개인들이 모여 촛불을 들 광장은 있었을지언정, 서로가 얼굴을 맞대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공론장은 부재했던 것이다. 이 근본적인 원인은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표현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울 중심적인 행정과 제왕적 대통령제는 조그마한 공동체의 합의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법을 만든다 한들, 국가가 정한 상위법들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한 마디로, 우리 안의 상호주관적인 좋음이 국가의 공인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5000만 국민들이 모일 공론장은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으며, 서로 인사만 주고받는 데도 무수한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당한 수의 시민들이 모일 공론장과 이에 자발적으로 복종할 수 있는 자유이다.

개헌, 공화주의의 가능성을 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한민국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제1조 3항)'라는 개정안은 공론장과 자발적 복종의 자유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핵심적으로, 지방정부의 '자주 조직권', '자치입법권' '자치행정권'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할 전망이다. '자주 조직권'에 따라 각 지방의 실정과 필요에 따라 공론장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만들어진 법들은 '자치입법권'에 따라 법안에 명시되고, 이것에 자발적으로 복종할 근거를 '자치행정권'이 지지한다. 조금이나마 지방 정부가 로마 공화정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헌법 개정안에는 공론장에 참여하는 것 외에도 시민들이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을 극복할 방법이 마련되었다. 주민참여 강화에 관해 개정된 '지방정부의 조직·운영에 대한 주민의 참여권 명시', '주민발안, 주민투표, 주민소환의 헌법적 근거 신설'은 주민들의 참여를 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국민소환제', '국민발안제'는 국민이 원하는 때에 지배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대통령의 권한이 줄어든 것도 긍정적으로 평할 수 있다. '국가원수'라는 표현이 삭제됨과 동시에, '특별사면시 사면위원회 심사강화', '헌법재판소장을 헌법재판관들이 호선(서로 뽑게 함)', '감사원 독립기관화 및 감사위원 중 세명 국회 선출'을 통해 제왕적 지위를 내려놓게 했다. 또한 '정부 법률안 국회의원 10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야 국회 제출', '국회의 예산심의권 강화 위한 예산법률주의 도입', '국회 동의 대상 조약의 범위 확대'를 통해 국회의 대통령 견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공적인 일의 담당의 주체를 정부에서 시민사회까지 확장해 진정한 공화의 실현이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는 개인에 매몰되어 공적인 것을 보지 못했다. 정치는 소수의 손에 독점되어왔고, 이는 지배와 피지배를 격리시켜왔다. 민주화 이후의 가치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었기에, 개인은 선거 때만 주권자라는 명찰을 달았다.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공화주의는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권력의 집중이 공론장의 형성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발표한 이번 개정안은 지방분권과 대통령 권한축소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이번 개헌은 평상시에는 소수의 위임받은 정부가 지배하더라도,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러 방면으로 참여함으로써 지배와 피지배의 경계가 허물어진 공화적 공동체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부산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합니다.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태그:#개헌, #공화주의, #민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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