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30 14:04최종 업데이트 18.04.06 18:03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편집자말]

납북어부 정삼근과 소고기 없는 미역국 ⓒ 고정미


"요 앞바다에 김이랑 미역 양식장이 있어요. 한낮이 돼서 해가 뜨면 바다 한가운데는 해를 피할 곳이 없으니 얼마나 뜨거운지 몰라요. 그래서 새벽에 나가서 뜨거워지기 전까지 일을 끝내야 해요. 그러려면 늘 새벽처럼 일을 나가거든요.

그런데 하루는 내가 다른 날보다 좀 일찍 일어났더니 밖에서 '서걱서걱'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 소리가 아주 듣기 싫은 소리지 뭐예요.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밖에 나가보니 아니 이 양반이 칼을 갈고 있잖아요. 기겁을 해서 칼을 뺏으려고 몸싸움을 하고 난리를 쳤어요."(정삼근의 아내)


1991년, 즉 그가 출소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때의 이야기이다. 5년 반의 징역을 살고 나와서 그는 매일 같이 칼을 갈았다. 한 뼘 정도 되는 길이의 날선 칼은 뒷마당 장독 뒤에 잘 숨겨두었다. 그 놈을 찾게 되면, 혹시라도 길에서라도 마주치게 되면 그 칼을 쓰려고 날이 잘 서도록 날을 갈고 또 갈았다.

"정말 죽이고 싶도록 밉더라고요. 정말 눈에만 보이면 칼로 어떻게 했을지도 몰라요. 이녁(이 사람, 아내)이 한번만 더 칼을 갈면 식구들부터 찌르라면서 다 죽자고 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칼을 더 이상 못 갈겠더라고. 이녁이 칼을 뺏어들고 가버리는데 멍하니 보고만 있었죠. 어떻게 용서하겠어요. 나하고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을 내 버린 놈인데.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지."

그의 불행은 1984년 찾아왔다.

뱃일을 다녀와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그는 뉴스에서 같은 동네 친구 서창덕이 간첩이라는 발표를 보았다.

"그 뉴스 나왔을 때 내가 창덕이 욕을 얼마나 했다구요. 저런 썩을 놈. 할 짓이 없어 간첩 질을 하느냐고 뉴스를 보면서 막 뭐라고 했다고요. 내가 딱 1년 뒤에 그놈 꼴이 나올지도 모르고. 참 미련한 놈..."

"할 짓이 없어서 간첩질 하냐고 욕했는데"

같은 개야도 섬에 살던 서창덕과 정삼근은 1년의 시간차를 두고 연행되었다. 서창덕은 1984년에, 자신은 1985년에 잡혀갔다. 시차는 달랐지만 연행한 곳은 같았다.

"1985년 5월 26일이 처제 결혼식이었어요. 그래서 전전날에 개야도에서 군산으로 나와서 처갓집에서 자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날 밤에 사내들 6~7명이 들이닥치더니 나를 봉고차에 덜렁 실어버리더라고요. 납치된 거죠.

누구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하나 잡았다'는 말이었어요. 재차 물어봤다가 발로 한 대 맞고는 그대로 꼬꾸라졌죠. 내가 68년도에 납북되었던 어부라서 잡아가는가 보다 하는 생각만 했지 왜 날 잡아가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어요."

그를 연행한 차는 그 길로 1시간 정도 달렸다. 어느 건물 앞에서 멈추고는 안대를 채운 채 지하로 데리고 갔다. 안대를 풀었더니 3~4평 되는 조사실에 남자 5명이 서있었고, 그 중 한 남자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삼근아, 나 모르겠냐."

당황한 그가 모르겠다고 하자 남자는 비열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야, 이 자식아, 내가 너 이북에 있을 때 교육시킨 사람 아니냐. 그런데 니가 나를 모르겠냐?"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간첩들에게 납치된 줄 알았다고 한다. 옷을 다 벗으라고 하고는 군복과 검은 신발을 주면서 입으라고 했다. 이틀 정도 조사도 하지 않고 야전침대에 앉아 있거나 자거나 하는 일만 했다(남자가 누구였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북한지도원이라고 착각하도록 해 무엇인가 자백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때가 되면 밥이 들어와 그 식사시간으로 아침, 점심, 저녁을 구분했다. 이틀 정도 지나 대변이 마려워 화장실에 가자고 하니 화장실 칸마다 간부, 일반사병 이렇게 쓰여 있는 걸 보고 그때서야 보안대에 잡혀 온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납치되고 나서 4번째 아침 식사가 들어오던 날, 수사관 한 사람이 들어와서 '여행간 적이 있느냐'고 물어요. 섬마을 사람이 어딜 여행을 다니겠어요. 그래서 예전에 70년에 납북어부들을 모아 포항제철 등을 데리고 다니면서 산업시찰 했던 이야기를 해줬죠."

그때는 몰랐다. 왜 그런 걸 물었는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가 보고 들은 것 모두가 국가기밀 탐지의 내용으로 뒤바뀌는 것을 그는 몰랐다.

"수사관 한 사람이 수사관들이 작성한 서류를 가져오더니 저보고 그대로 베껴 쓰라고 하는 거예요. 1968년 납북됐던 내용 이런 게 있더라구요. 그래서 주욱 적는데 그 내용 중 '아내가 잠들었는지 확인한 뒤, 라디오로 이북 방송을 들었다, 무인포스트를 설치했다 뭐 이런 내용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난 이런 간첩 질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내용을 쓰냐 따졌더니. 아 글쎄..."

수사관은 각목으로 사정없이 두드려 팼다. 얼마나 맞았을까 그만 기절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얼굴에 물을 끼얹었는지 주변으로 물기가 가득했다. 자신을 때린 수사관은 어딜가고 없고 다른 수사관이 와서는 "야 임마, 너 빨리 쓰고 나가야 할 것 아니냐. 너 왜 이렇게 멍청하냐"면서 다독거렸다. 병주고 약주는 격이었다. 매 맞는 것도 두려운데다, 쓰라는 대로 쓰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수사관의 말을 믿고 허위로 조서를 작성해 주었다.

"진술서를 쓰고 나서 그걸 몇날 며칠 동안 외워야 해요. 며칠씩 잠을 못자면서 진술서를 작성하다가 졸면 수사관이 각목으로 머리하고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쳐요. 그리고는 날 토막토막내서 죽여 버린 다음 바닷물에 버린다느니, 너 같은 거 하나 죽여도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등 협박을 자주했어요. 정말 날 죽일 것 같은 공포감이 막 들어요."

그렇게 며칠을 걸쳐서 조사가 끝나자 더 이상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한가하던 그날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들어오더니 자기가 변호사인데 얼마나 억울하냐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대로 말하라는 것이다.

"정말 날 구해주는 사람인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했던 얘기는 고문 받아서 거짓으로 자백한 거라고 열심히 설명하는데 갑자기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서 탁 끄고 서류를 덮더니 '이 새끼, 아직도 멀었네'하며 제 뺨을 딱 때리는 거예요.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서 '이 새끼 쌩똥 더 싸야겠네'라고 하면서 가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 저를 담당했던 수사관이 술이 잔뜩 취해 들어와 가지고는 옷을 확 벗어던지면서 '야, 이 개새끼야. 사내새끼가 나 없는 순간에 배신을 해? 내가 어디 가도 진술서대로 말하라고 했지. 이런 배신자 새끼'하면서 구타를 하는 겁니다."

구타는 그의 앞니 2대가 부러지는 순간 끝났다. 기절한 것이다. 깨어났을 때는 팔에 링거가 꽂혀 있었고, 군인들은 온몸에 안티프라민을 발라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때린 수사관이 들어와 백지에 진술을 거부했다는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반성문을 다 쓰고 나자 김치, 고등어통조림, 소주를 주면서 그를 용서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우철', '이우철'... 5년간 매일같이 외운 그 이름

1968년 조기잡이 중 납북됐다가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납북어부 4명이 사건 발생 49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전주지법 형사1부는 2017년 10월 20일 반공법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살이를 한 정삼근(75·왼쪽 세 번째)씨와 김기태(77·왼쪽 두 번째)씨 등 영창호 선원 4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정씨 등 선원과 선원 가족들이 재심이 끝난 뒤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날부터 그는 매일같이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해야 했다. 목욕물에 안티프라민을 얼마나 풀어 넣었는지 지독하게 파스 냄새가 났다. 그리고 잘 때마다 생소고기를 상처 부위에 붙여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썩은 듯한 소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렇게 며칠간 치료 아닌 치료를 하고 운동을 시키더니 어느 날 이발과 면도를 시켜주었다. 검사나 판사 앞에서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말끔하게 옷을 입히고는 차에 태워 어디론가 갔다.

"삼근아, 오늘 집에 가는 날이다."

그를 태운 차는 개야도를 향했다. 집에 간 것은 사실이나 귀가를 시켜줄 목적으로 데려간 것이 아니었다. 현장검증을 하며 사진을 찍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깃발을 잡기도 하고, 무전기를 치는 모습을 하거나, 무인포스트를 만드는 모습을 재현하거나, 몰래 라디오를 듣는 모습을 재현해야 했다. 집에 들어가자 아내가 미친 듯이 수사관들에게 달려들었다.

"내 남편을 왜 잡아갔냐. 죄 없는 사람 잡아다가 왜 간첩을 만들었냐. 이 죽일 놈들아."

악을 쓰던 아내는 쓰러졌다. 아이들이 달려들어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그런데도 동네사람들은 아무도 근처에 오려하지 않았다. 이상한 건 큰 딸아이가 꼼짝도 않고 정신 나간 듯이 땅바닥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족을 뒤로 하고 그는 섬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며칠 뒤 검찰로 송치되었다.

"야, 삼근아, 오늘 검사한테 잠깐 들러야겠다. 너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검사가 뭐라도 물어보면 다 그렇다고 대답해라. 알겠지?"

그의 고문을 담당했던 이우철 수사관이 다시 다짐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군산검찰청으로 가서 대기실에 앉혀 놓더니 보안대 수사관과 검사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더니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갔다.

"검사가 종이를 보면서 제가 보안대에서 조사받은 내용을 그대로 불러주면서 맞죠? 맞죠? 이러면서 물어요. 보안대 수사관들이 뒤에서 딱 지키고 앉았는데 어떻게 아니라고 해요. 다 맞다고 해야죠. 그렇게 형식적으로 검사조사를 받고 수사관이 저를 데리고 나가더라구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야, 검사가 그러는데 너 교도소에 3일만 있으란다. 3일만 있으면 내가 데리러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라' 그러는 거예요. 전 정말 3일만 있으면 풀려나는 줄 알았어요."

3일은 거짓말이었다. 5년 6개월을 꼬박 그곳에서 보내야 했다. 3일이면 온다던 수사관을 미련스럽게 기다리던 어느 날 교도관에게 혹시 보안대 수사관이 안 왔느냐고 물었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이 양반아, 보안대 수사관이 여길 왜 찾아와. 당신 형기대로 살고 나가면 그때 가서 찾던가. 순진하네. 이 양반."

그제서야 보안대 수사관한테 속은 것을 알았다. 5년 넘는 시간동안 매일처럼 그 이름을 외웠다. 이우철, 이우철, 이우철, 이우철, 이우철...혹시라도 그 이름을 잊어버릴까봐 매일 같이 적었다. 이우철, 이우철, 이우철...

집안이 발칵... 딸 아이 정신도 뒤집어졌다

차를 내오며 아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 양반 교도소로 들어가고 나서 이 양반 간첩이라는 뉴스가 텔레비전에 크게 나와서 우리 동네사람들이 얼마나 놀랬다구요. 나하고 우리 새끼들은 동네에서 학교에서 다 따돌림을 당하고, 아이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니까요."

차를 마시며 물었다.

"그래서 그 수사관에게 복수하려고 다짐을 했던 건가요?"

그도 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는 조금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억울했죠.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왜 안 들겠어요. 처음 출소하고 나서는 분노만 가득했어요. 그래도 실제 죽여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출소해서 집에 왔는데 큰 딸아이가 정신이 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녁한테 물어봤죠. 그랬더니 아이 참. "

그가 보안대에 연행된 뒤 수사관들이 개야도 집에 여러 번 찾아와 가택수색을 했다고 한다. 하루는 17살 정도 되는 큰 딸아이 혼자 있을 때 보안대 수사관들이 가택수색을 했다. 권총을 차고 군화를 신고 집안에 들어와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때 발칵 뒤집어진 것은 집안만이 아니었다. 큰 딸아이 정신도 발칵 뒤집어진 것이다.

"그때 내 눈이 뒤집어 졌어요. 그때 그 수사관 새끼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새끼들이 다녀간 뒤로 실성해 버렸다니까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경찰이나 낯선 사람을 보면 무서워 숨어버려요.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정신을 놓았는지...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려서..."

그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남편 찾는다고 군산 나간 동안 일이 벌어졌어요. 남편이 집에 돌아와서는 큰 딸아이가 저리 될 때까지 뭘 했냐고 하는데 나라고 왜 안 억울하겠어요. 그래도 다 내 책임인 것만 같아서..."

조사가 끝나고 미역국에 젓갈반찬 가득한 점심상을 받았다.

"소고기 썩는 냄새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기를 안 먹게 되더라구요. 여기 김이랑 미역, 우리가 직접 딴 거라 맛있어요. 젓갈도 맛나고. 어서 드세요."

상을 차려준 아내는 작은 상을 다시 차려 작은 골방으로 가져간다. 아마도 큰딸의 밥상이리라.

세상은 한꺼번에 바뀌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의 염원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뜻을 모을 때 비로소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세상의 변화이다. 그러나 국가폭력피해자들을 만나다 보면 이렇게 파괴되는 개인의 상처까지 세상이 관심을 가져줄까 하는 고민이 항상 든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팍팍해지는 현실에서 다른 이의 개인적인 아픔까지 공감해줄 여유가 우리에게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정삼근은
정삼근은 1943년 전북 군산시 개야도에서 2남으로 출생하였다. 집안에서는 그를 정남전, 정채근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학비난으로 더 이상 학업을 할 수 없어 배를 타기 시작했다.

그는 어렸지만 조류를 잘 읽고 기계 다루는 것이 능숙해 일찍부터 기관장을 맡았다. 북한군에게 납치될 당시에도 그는 기관실에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어로작업 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19살의 그가 납북되어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 때 일이다.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술기운을 빌어 집에 돌려보내주지 않는 북한 사람들에게 술병을 깨뜨리며 주먹다짐을 하는 등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북한에서의 억류생활이 고됐다고 한다.

2006년 정삼근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자신의 억울함을 진정했고 2007년 위원회는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국가 차원의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그리고 2009년 재심에서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17년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 받았다.

그는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던 것보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가족이 상처받은 것에 아직도 분노하고 있다. 새벽 4시경 바다양식장에 나가기 전, 그는 커다란 유리잔에 소주 한잔을 가득 부어 마시고 일을 시작한다. 일을 하는 중간에도 2홉 소주를 한병씩 마신다. 돌아와서도 역시나 커다란 유리잔에 소주 한잔을 가득 부어 마시고 잔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도 아내와 개야도 섬에서 양식장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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