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8년, 세 번의 달이 바뀌는 동안 새해에 결심한 마음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는 참 열심히도 달려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남북한 화해 분위기 속에 성공적으로 개최한 평창동계올림픽과 지금 연이어 언론 매체를 장식하는 미투 운동이 아닐까.

미투 운동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두고 참으로 많은 갑론을박이 있어 왔다. 조금 거칠게 정리하자면, 갑질을 향한 을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때론 그것의 도덕적 고결함 덕분에 반대를 비롯한 이견의 수용에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내 앞의 권력을 향한 작은 움직임은 우리 사회 전역에 만연한 폭력에 대처하는 우리의 인식을 수면 위로 떠올리게 했다. 숨죽이며 혼자 부둥켜 안았을 분노가 마침내 '위드 유'라는 동참을 얻어내기도 했다. 거대한 사회 구조에 직접적인 싸움이 아닌, 눈 앞에 보이는 상대를 향한 분노였다. 이러한 분노의 힘을 좀 더 한발짝 더 끌어 움직일 수 없을까. 

이토 다카시 글·사진, 안해룡·이은 옮김 <기억하겠습니다>
 이토 다카시 글·사진, 안해룡·이은 옮김 <기억하겠습니다>
ⓒ 알마

관련사진보기


미투 운동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책 <기억하겠습니다>를 쓴 이토 다카시는 1952년 나가노현 출생이다. 그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증언을 채록할 때 할머니 한 분은 녹음기를 집어던지기도 하셨단다. 아마도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것과 할머니에게 가해를 가한 일본군의 형상에서 혼동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단다.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는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여성들의 증언을, 다시금 우리 사회에 전하는 것의 중요함을 통감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이해는 점점 후퇴하고 있다.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피해 여성들에 대한 기술이 줄거나 삭제되었다. 그리고 일본 정치가들은 '피해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동원한 사실이 없다', '피해 여성들의 증언은 거짓이다'며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망언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한 '고노 담화'마저 재검토하려 하고 있다. 피해 여성들이 가진,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결코 용서하기 힘든 언행들이다. 이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정당화하고 미화시키려는 일본 정치가들의 강한 야망과 민족 배척주의로 흘러가는 일본사회의 상황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319~320쪽)

사진 저널리스트인 그가 1990년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원폭 피해 실태 조사였다. 취재 도중 위안부 관련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국 할머니 9명, 북한 할머니 11명을 취재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책은, 노청자, 이귀분, 김영실, 리상옥, 심미자, 김대일, 강순애, 황금주, 곽금녀, 문옥주, 리계월, 강덕경, 리복녀, 김학순 할머니들의 피해 증언과 르포타주 내에 네 개의 테마인, 빼앗긴 기억을 찾아, 일본에 대한 한 전쟁에 대한 한, 북한에 있는 성노예 피해자들, 무궁화에 둘러싸여로 구성하였다.

"내 존재가 가장 확실한 증거"라 말하는 노청자 할머니는 대전 출생이시다. 열일곱 살 때 북지 톈진에서 아픔을 겪었다. 증언에 따르면, 오전 6시 기상 나팔소리로 일과를 시작했다. 오전 9~10시에 목욕을 하고 11시부터 군인을 맞았단다. 오후 10~11시까지 일반 병사가, 새벽 3시까지는 장교를 상대했단다. 매일 30~40명이 드나들었단다. 한때 군대가 전장에 나가거나 돌아올 때는 '대일본국방부인회'라고 쓴 어깨띠를 두르고 환송하기도 했단다.

부산에서 생활하다 2004년 세상을 하직한 이귀분 할머니는 '하루코'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타이완의 남쪽 도시인 가오슝 시 부근에서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셨다. 할머니는 슬픔보다는 분노가 앞섰다고 말한다. "엄마"라는 소리를 들어보지도 못하고, 가정을 이루지도 못하고 혼자서 살아왔던 지난날을 누가 만들었는지 되물었다. 자신의 체험을 세상에 드러내어 다시는 반복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할머니들의 공통된 기억이 있었다. 바로 606호 주사이다. 매독 등의 성병 감염을 막기 위해 때로는 자비로, 때로는 군의관이 할머니들에게 놓았던 주사였다. 온갖 폭행과 세균 감염 속에서, 할머니들은 살아 있는 자신들 보다 당시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도 하셨다.

"나는 아이코가 되었어요. 에이코는 열여덟 살, 사다코, 미야코는 열아홉 살, 시즈에는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223쪽)


'도조, 이라샤이마셍.'(어서 오세요)라는 말이 비참하게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앳된 입술에서, 낯선 타국 땅에서 수만번 읊조렸을 그 말 속에서는 보고픈 어머니도, 언니 오빠들 친구들이 기억 속에 삭아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내가 죽으면 와줄 거냐"는 말을 할머니들에게 들었다고 한다. 함께 싸우던 할머니들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고, 누군가를 먼저 떠나 보내고 남으면 할머니들이 하는 말이었다. 함축된 외로움은 일본군에 의해 유린된 청춘의 시절이 끝났음에도, 고국에서도 그러했다. 그래서 묻는다. 내가 죽으면 기억하겠냐고.

책의 대부분의 기록은 1990년대 초반의 사진이다. 한국에서는 미처 기록하지 않았던 시절의 촬영본이었단다. 3.8 여성의 날이 흘러 갔다. 그러나 어느 언론에서도 미투 운동의 선정적인 측면만을 앞 다투어 보도 했지, 유언이 된 증언은 1990년대에도 그리고 그보다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2018년에도 색이 옅었다.

책은 하나의 메시지를 관통했다. 깨어진 증언을 기록하고, 교육하는 것, 그것은 비단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남북한을 사상으로 가르지 말고. 일제 강점기 시대라는 비극의 역사적 틀 아래서 공동의 고통을 우리는 익힐 필요가 있다.


기억하겠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가 된 남한과 북한의 여성들

이토 다카시 지음, 안해룡.이은 옮김, 알마(2017)


태그:#미투, #위드유, #기억하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