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껏 살면서 흔하게 듣는 말은 '사는 재미 모르는 범생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매우 불량하며, 금단 증상까지 겪는 중독자로 철저한 쾌락주의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끊을 생각조차 없다.  

내 소개를 하자면, 다들 '꺾이는'이라고 말하지만, 자칭 '반등하는' 지점에 올라 선 40대 중반이다. 체질상 남들이 흔히 즐기는 알코올, 니코틴, 카페인도 멀리해야 하며, 더불어 가무 재능도 아예 없는, 4무(無) 인생이다. 게다가 무소속이나 취재 기자라는 일 탓에 때론 '까는' 기사도 쓰다 보니 더욱 'B사감'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B사감과 닮았다. 현진건의 소설 < B사감과 러브레터> 속에 등장하는 마른 몸에 무광의 누리끼리한 피부, 두꺼운 안경을 쓴. 하필 내 성도 B.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 몰래 '읽는' 취미를 가진 그녀와 달리, 글쟁이인 나는 노골적으로 '쓰는' 재미를 누린다. 러브레터 실컷 써보고 싶은 낭만파이고. 그리고 '노처녀'인 그녀가 오히려 부러운, 십대 아이 두 명까지 있는 '노(NO)' 처녀인 아줌마. 마지막으로 나에게는 사랑하는 이가 이미 있다. 난 영화에 빠졌다.

엄마 말이, 어린 나를 등에 업고 일을 하면 종알종알 수다에, 손님들이 "뭔 조그만 애가 저리 말을 잘 하나"라고 했단다. 그렇게 수다, 이야기를 좋아하던 나는 이야기 그 자체에 화려한 볼거리, 음악까지 3종 매력을 두루 갖춘 영화와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첫 만남은 5, 6세 때 이루어졌다. 유치원에 가기 전이라 양장점 일로 바쁜 엄마를 대신해,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외사촌 언니가 일도 배울 겸 날 돌봐주었다. 어느 평일 오전. 언니는 소개팅에 날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데리고 갔다. 그 젊은 두 남녀가 첫 코스로 간 곳은 다름 아닌 영화관이었다.

오전이라 영화관은 매우 한산했고, 남자가 슬그머니 언니 어깨로 손을 뻗쳤다. 날도 더운데 철썩 달라붙은 남녀들만 나와 결국 지루해져 꾸벅꾸벅 졸았다. 남자는 기사식당에서 곱창을 사준 후에 불만스런 표정으로 헤어졌다. 언니는 과자를 두 봉지나 사주며, 엄마에게 오늘 일 말하지 말라 당부했다. 끄덕끄덕. 참고로 언니의 결혼식 사진 속 남자는 그가 아니다. 

어릴 적 TV에서는 밤에 <주말의 명화>를 봤다. 그걸 보려고 저녁밥을 먹은 후에 일하러 가는 엄마를 뒤따랐다. 영화를 보고 시내에서 집까지 걸어오는데 어찌나 졸리던지 전봇대에 부딪힐 때도 있었다.

내가 영화에 푹 빠지기까지

 극장

ⓒ pixabay


희한하게 가족들 중 나와 같은 증세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 즉, 유전적 영향은 0%이다. 심지어 아버지는 영화에 대해 "가짜로 말하는 것을 뭐 하러 보나"라는 신념을 가졌다. 이런 아버지와 본 영화는 영화관에서 본 <콰이강의 다리>가 전부이다. 그런 아버지도 돈을 주고 더군다나 혼자 영화관에 간 적이 있었다. 유승호가 아역 배우로 등장한 <집으로>와 다큐 <워낭소리>를 나에게 권하여 드러났다. 참으로 '소띠'에 농촌 출신 효자, 장교로 복무까지 한 사람다운 영화 선택이었다.

지금 70대인 엄마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적이 생애 중 딱 두 번이다. TV로도 즐기지 않는다. 엄마가 본 첫 영화는 20대 미스 시절로, 여자가 자신을 "마담 X"라고 소개한 것만을 기억한다. 마지막은 내가 명절 때 엄마만 데리고 본 뮤지컬 <맘마미아>인데, 대부분을 묵념으로 버텨서 이후 전도를 포기했다.

이 부부는 영국 유학생인 아들이 현지에서 뮤지컬 <캣츠> 오리지널 공연을 보여주었을 때도, 잠으로 버틴 후에 비싼 돈을 낭비했노라 투덜거렸다. 이처럼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중학교 이전 영화관 출입 권력은 오로지 큰오빠에게 있었다. 공부만 하는 진짜 모범생 큰오빠는 두 동생에게 항상 전체관람가의 모험물 <인디아나 존스> <구니스> 등을 권하며, 모험을 전혀 하지 않았다.

참고로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집에 있던 주니어 세계문학전집을 즐겼고, 고1이 이전에 이미 문고본으로 차타레, 보봐리 부인 등 불륜에 온갖 험난한 인생살이를 두루 거쳤다. 하지만 철저하게 주위에선 "범생이"로 통했다. 또래와 달리 연예인, 이성, 하다못해 외모 꾸미기에 무심했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학생이었기에. 실은 앞의 것들이 수준 이하라 무심했던 것뿐이다.

소위 잘 나가는 학부모가 많은 초등학교를 다닌 덕인지, 단체관람으로 영화관에서 <이티> 등을 볼 수 있었다. 중학생 때는 고정적 지출인 문고본 책값에 엽서 수집으로 휘청해서 영화비가 버거웠다. 그래서 오빠에게 기생해 <영웅본색> 등의 홍콩 액션물을 봤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교과서와 참고서 탓에 다른 책 보기도 힘들어서 책값이 확 줄었고 용돈이 항상 남아 영화 보기에 딱 좋은 경제적 황금시기였다. 그런데 '자율학습'이라며, 주말에도 학교에 가는 '공부' 징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는 영화들의 유혹이 가장 거셌다. 특히 케빈 코스트너는 당시 개봉 영화를 연달아 점령했다. 결국 <의적 로빈후드> 등을 위해서 눈치껏 "땡땡이"를 했다. 중년인 담임은 체력 탓인지 늦게 오곤 해서. 그러나 청불은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왜소한 체구에 동안이라 바로 티가 나서 시도조차 못했다. 노안 친구가 가장 부러웠다.

대학에 입학한 후로 내 사랑은 날개를 달았다. 제대로 처음 본 새빨간 영화는 하숙집 주인의 30대 미혼녀 딸과 비디오로 본 <블루벨벳>인데, 실은 로맨틱을 선호한다. 그리고 꼬아진 스릴러나 독특한 소재, 구성의 예술영화를 주로 선호한다.

20대 중반 서울 독립시절은 알바를 모아 처음 장만한 비디오 플레이어로 아무 때나 영화와 사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최적의 데이트 장소는 영화관이었고, 서울은 우리의 사랑을 적극 지지했다. <록키 호로 픽처 쇼>를 제대로 보기 위해 올나이트도 감행했다. 커플이 주류인 극장에서 당당하게 홀로 좌석을 차지한 채, 눈 부릅뜨며 영화 세 편을 내리 봤다. 지하철 첫 차로 집까지 오는 1시간 이상은 혹시 모를 추행, 소매치기에 대비해 졸음을 참는 2차 수행이었다. 그리고 발정기 후 수캐처럼 축 늘어져 귀가했다.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자 뱃속에서부터 같이 즐겼다. 이 태교로 두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장시간 상영도 잘 버텼다.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이후 독박육아 여건상 비디오 가게를 통해 만남을 이어갔다. 영화관 데이트 황금기는 30대 중반을 넘어서 찾아왔다. 아이들은 학교에 갔고, 신용카드와 통신사 혜택으로 매월 3회의 무료관람에 알바로 짬짬이 받는 영화상품권까지 있었다.

영화 '덕후'가 되기 위해서는

 CGV 압구정점의 모습. CGV를 포함한 대규모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수직계열화에 나서면서 불균형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 CGV


'영화 덕후'가 되고자 하는 그대를 위해, 40년 경력으로 얻은 깨달음을 전수하겠다. 일찍이 하나님은 덕후의 가장 기본 자질을 최초로 언급했다. 십계명을 통해 그것도 두 번에 걸쳐 강조했다.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즉, 오로지 영화만을 섬기며 영화에 따라 흔들거리는 "불량한 갈대파"가 되어야 한다.

나는 영화관 브랜드는커녕 지점 충성도마저 전혀 없는, 그저 상영관 따라 옮겨 다니는 불량한 고객이다. 광역시에 살 때는 구를 넘나들며, 무료 3회 혜택을 철저하게 누리려 세 곳의 업계 모두 회원에, 개별 영화관마저 이용했다. 거주지에서 지하철, 버스 갈아타느라 왕복 2시간 이상 소요도 장애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간 김에 인근 마트나 은행 일까지 보고 귀가했다.

한편, 영화는 모름지기 '신상'을 가장 먼저 접할 때 뿌듯하다. 무명에 지방 거주자라 시사회 기회가 전혀 없는 나로서는 영화관 앱을 통해 개봉예정작을 틈틈이 둘러보며, 사냥감을 물색한 후 개봉 당일 조조로 본다. 가장 먼저 최저비용으로, 예매 없이 좌석 골라 누릴 수 있기에.

하지만 지방 거주 한계로 영화관이 적고, 더욱이 흥행 위주의 작품만을 상영하는 터라 원하는 영화를 골라보기 곤란하다. 그 대안으로 영화제를 이용하며, 특히 국제영화제는 성지이다. 미개봉할지 모르는 영화, 흔하게 접할 수 없는 나라의 신상도 접할 수 있다. 참고로 찜질방, 이동 식사 등으로 가능한 보고 싶은 영화를 최대한 본다. 이를 위해 사전 검색으로 꼼꼼하게 동선 계획하고, 관람할 때 메모는 필수이다.

또한 원작이 있는 경우라면 서로 비교해서 맛보면 더욱 재밌다. 아쉽게도 개봉예정작 안내에는 이러한 원작 정보가 빠져 있어서 유감이다. 그러니 평소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여 스키마를 든든하게 채울 것. 아는 만큼 더 즐길 수 있다.

끝으로 신을 영접하는 성스러운 장소에 갈 때는 가능한 혼자 가라. 사람을 비롯한 휴대폰 및 팝콘과 탄산음료 등 동반자의 소음은 예배를 방해한다. 특히 영화비보다 비싼 팝콘은 절대 금지하고, 남는 돈으로 영화 한 편을 더 보라. 즉, 오로지 영화만을 섬길 것을 맹세하고 수도승의 자세로 임하라.

영화 덕후 공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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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로 '좋아할, 호', '낭만, 랑',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이'를 써서 호랑이. 호랑이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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