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3.20 23:08최종 업데이트 18.03.21 16:13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편집자말]
2010년 4월의 봄날, 군 생활의 '끝판왕'이라 불릴 만큼 대표적인 전방지역, 강원도 인제를 찾았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커피를 사들고 내설악아파트에 들어섰다. 노부부는 적당한 평수의 시골 아파트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1926년생.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팔순을 넘어 구순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해방 전 그때는 전국에서 이리농림학교가 제일 좋은 학교예요. 이리농림학교가 관립농림학교거든. 호남의 곡창지대다 보니 거기에다가 일본 사람들이 일본 정부에서 농업학교를 하나 세운 거예요. 그러니 우수한 사람들이 전국에서 다 모였어요.

한 클래스(반)가 오십 명인데 25명은 조선 사람, 25명은 일본 사람. 그렇게 혼합반으로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조선 학생들 성적이 굉장히 좋았어요. 거기 졸업하면 다른 학교 나온 것보다 월급이 5원 높았어요. 당시 돈으로."

그곳을 졸업하고 수의사 자격을 얻었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동경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해 박사과정을 밟았다.

"내가 일본 갈 때가 1964년이에요. 가보니까 동경올림픽 연다고 공사 때문에 동경시내가 온통 먼지투성이였어요. 먼지가 엄청났거든. 그런데다가 수의학과다 보니 실험실은 온통 개털, 닭털 투성이다 보니 결국 거기서 천식이 왔어요. 감옥에서 나와서도 고쳐지질 않아서 여기 인제로 이사를 오게 된 거예요. 천식 때문에."

유학파 수의사에서 간첩으로

그의 동경유학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10년 후인 1974년 그는 울릉도 간첩사건의 전북지역 총책이란 의심으로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당시 그가 전북대학교 총장 후보로 거론되던 시점이었다.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기사. 신직수 부장이 사건을 발표하고 있다. 검거 사진 중 맨오른쪽 두 번째 사진이 이성희 박사이다. ⓒ 뉴스라이브러리


"나한테 간첩죄를 적용하더라니까. 교수 대접은 애초에 없었으니까. 서울 중앙정보부에 가니까 수사관들이 그러더라고. 여기서 박노수 김규남이도 똑같이 죽어나갔다고. 그러면서 패는데 아주 모욕적이더라고. 죽었다고 생각을 했어. 나중에 신문에 내가 '일본을 거점으로 한 간첩 이성희'라고 됐어. 우린 울릉도 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고.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엮어놨어."

1심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더 이상 삶의 의지가 없을 때 그의 아내가 면회를 왔다. 고운 보자기에 정성껏 도시락을 만들어 그와 함께 먹으며 아내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당신 나쁜 마음 먹으면 나도 자식들 하고 같이 당신 뒤따라 갈 테니 그리 아세요."

아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정신이 번쩍 들더라니까요. 억울한 마음에 죽으려고 했던 마음을 고쳐먹고 어떻게든 살란다고 마음을 먹었지요."

하지만 그의 교도소 생활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소위 '범털'로 불리는 일반 형사범들은 감방 안에서 엄청난 텃세를 부렸다. 그런 그를 도왔던 것은 같은 좌익수들이었다.

"교도소 처음 가면 교도관이 부족하니까 재소자 중에 사람을 뽑아서 반장이라는 완장을 채워줘요. 그런데 그 놈이 하루는 공장을 가려고 하는데 검문시간에 조금 늦었어요. 그랬더니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거예요. 아주 모욕적이지요.

그 일이 소문 나가지고 '뽁뽁이'들(좌익수들을 일컫는 말. 빨치산들이 산을 뽁뽁 기어 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 소장면담을 해달라고 교도소 내에서 단식을 하고 난리를 부렸지. 결국 소장면담을 해서 그 반장 놈을 이감시켜버렸어요."

"동물 보던 내가 재소자들 치료 했어요"

20여 년간의 수감생활을 어떻게 견뎠는지 너무 궁금했다. 억울한 그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견뎠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나만 알고 살았어요. 그런데 광주교도소에서 참 나보다도 불쌍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징역을 오래 살면 감옥 안에서도 기반이 잡혀요.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은 다 선물로 받아요. 교도소 안에 의무과가 있긴 한데 의사가 변변히 없었어요. 그래서 동물 보던 내가 가운을 입고 재소자들 치료를 했어요.

거기 있으면 고문 받고 오는 사람들이 숱해요. 재일교포 유학생들, 납북됐다가 돌아온 글도 모르는 어부들, 또 광주항쟁 때 도청 지키다가 온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같은 사람들. 나처럼 억울하게 당해 들어온 사람들이 숱해요. 그러면 거기서 치료를 해줘요. 교도소에서는 진통제 한 알이 하느님이에요. 숱하게 사람들 치료했네요."

대화를 듣고 있던 아내가 밥을 먹고 계속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요 앞 막국수 집이 참 맛있게 하는데 국수 좋아하세요?"

나는 막국수라는 말에 반갑게 대답했다.

"그럼요. 전 삼시세끼 면만 먹으라고 해도 먹을 만큼 면 요리를 좋아해요."

잘됐다며 그녀는 막국수 집으로 인도했다. 막국수 집에서 국수를 시켜 먹으며 대화를 계속했다.

"사실 아내가 국수요리를 참 잘해요. 나 들어가고 나서 국숫집을 했다니까"
"정말요?"

아내는 웃으며

"별소리를 다 하네요. 하고 싶어서 한 일도 아닌데 뭔 자랑이라고. 이 양반 감옥 들어간 뒤에 내가 벌어먹어야 살잖아요. 무교동에 네 평짜리 스낵코너를 했어요. '신원분식'이라고 작은 가게였는데 장사가 참 잘 됐어요. 배달하는 애들은 소개소에서 소개 받아 데리고 일을 했어요. 그런데 그 놈들이 다 학교를 안 다니고 집 나온 애들이라 나 살림하는 집에 데려다가 같이 살았어요.

한창 국숫집을 할 때 서울대 다니던 둘째 놈이 죽어버렸어요. 한동안 아무 일도 못하겠대요. 그러다 겨우 힘을 내서 가게에 나왔는데 거기서 일하는 아이들이 전부 아들 같은 거라. 그 아이들 추우면 우리 둘째 입던 옷 전부 입혀줬어요. 애들 무시하는 사람들 있으면 내가 대신 가서 싸우고... 나중에 속초에 사는 놈은 그렇게 우리가 여행 가면 막 회를 떠오고 막 어쩌고 하대요."

아이 하나를 보내고 더 많은 아이를 키웠던 셈이다.

허리 굽고 걷기 어려운 구순의 여인

2012년 11월 서울고등법원은 고문을 통해 그의 범죄 사실이 조작되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는 일어서서 사법부를 대신한 그에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2015년 다시 만난 그는 우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박정희가 나 징역 살리고는 그 딸 박근혜 때 내가 무죄가 되었구만요. 박정희, 박근혜 시절 내내 내가 재판을 다 한 거여. 요즘 박근혜가 (TV에) 나오면 내가 다른 데로 돌려버려요. 아니 억지로 징역을 살린 거 아니여. 근데 잘못했다고 한마디도 않고 있잖아요. 대통령 하면 뭣할거여 인간이 덜 됐는데."

그리고 2년 뒤 나는 창작판소리 공연팀 '바닥소리'와 그의 이야기를 담은 한편의 창작판소리 뮤지컬을 구로아트밸리에서 열었다. 그의 감옥 생활과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였다.

구로아트센터에서 펼쳐진 '닥터2478'공연 뒤 주연 배우와 이성희 박사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객석 관객 중 백발의 노인이 이성희 박사이다. ⓒ 변상철


2017년 6월 17일 구로아트센터에서 펼쳐진 창작판소리공연 '닥터 2478'. 공연이 끝난 뒤 이 공연의 실제 주인공인 이성희 박사 부부와 주연배우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 변상철


공연이 끝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뒤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참 고마워요. 감옥에서 나온 뒤로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는데 오늘 여기서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다 흘리네요. 그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공연 보는 내내 눈 앞에 지나가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을라나."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긴요. 별 소리를 다 하세요."
"아니야. 언제 한번 우리랑 밥이라도 먹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하지."
"여기 사람이 몇 명인데요. 마음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내가 웃으며 거들었다.

"내가 하루에도 국수만 수백 그릇 말았던 사람인데 겨우 여기 몇 사람 밥 못해줄까 봐요? 걱정 말고 오시기나 해요."

허리 굽고 걷기 어려운 구순의 여인은 그렇게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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