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14 10:46최종 업데이트 18.01.14 10:46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기자 말

"저는 영문도 모른 채 조사실로 끌려갔습니다. 아마 시간은 오후 4시경인데 신발과 옷을 벗기고 손을 뒤로 묶고 팔과 양다리 사이에 막대기를 넣고 거꾸로 매달고 얼굴에다 타월을 물로 적시기 시작해서 기절해 버렸습니다. 그러다 눈을 뜨니..."


2012년 가을에 날아온 김용담의 편지는 처절하고 비참했다. 늘 고문의 가해 방식과 피해는 비슷하다지만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것은 십수 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겨울 화북동 작은 집에서였다. 그는 다리가 불편해 혼자 일어서지도 못했다.

처절하고 비참했던 한 통의 편지

김용담이 본인의 고문사실을 기록한 자술서의 일부분. ⓒ 변상철


"일어나서 인사를 해야 하는데 내가 다리가 아파서 일어서질 못하네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앉아계세요."

그 사이 그의 아내 김인근이 조용히 커피와 과자를 내주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제주 사람들이 해방되고 나서 다들 그랬지만 살기가 매우 어려웠어요. 나도 제주대학교 국문과를 다니다가 생활이 어려워 1955년에 중퇴를 했어요. 당시에 대학 다니면 취직이 잘 될 줄 알았는데 먹고 사는 게 힘드니 대학도 소용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집안 농사를 돕다가 1958년경에 지금의 처와 결혼을 했습니다. 가정을 꾸렸지만 생계는 더욱 막막했어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1964년에 밀항을 해서 일본에 간 거죠."

일본으로 건너간 김용담은 1967년 초까지 제주 출신 사업가 강봉웅이라는 사람의 회사인 '덕산공업사'에서 신발을 만드는 일을 했다. 강봉웅이라는 사람도 밀항자로 일본에서 제법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했다.

3년간 강봉웅이 운영하는 덕산공업사에서 일을 하던 중 도로에서 일본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받아 밀항 사실이 탄로 나게 되었다. 출입국 관리사무소로 끌려갔다가 오무라 수용소에 잠시 수용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67년 1월 제주도로 강제 송환되었다.

"1971년에 덩치 큰 남자들이 집으로 찾아왔어요. 지프차에 저를 그냥 싣고 가는데 가보니 군방첩대더라구요. 일본에서 무슨 일을 했고, 또 월급은 얼마 받았느냐 이런 걸 물어보길래 다 대답했어요.

그리고는 더 할 말이 없느냐고 수사관이 물어요. 그래 없다고 했죠. 그랬더니 갑자기 저를 꿇어 앉히고는 1m정도 되는 각목으로 무릎 뒤로 찔러 넣고는 군인이 제 허벅지로 올라타서 밟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집이 떠나가도록 큰 비명을 지르게 되더라고요."

그의 고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북한이 좋다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왜 시인하지 않느냐며 추궁을 당했다.

"계속 부인을 하니까 의자에 앉히고는 엄지 손가락에 전기선을 감아서 전류를 흐르게 해요. 어떻게 못 견디겠는지 손가락을 뿌리치고는 앞에 있는 수사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며 수사관에게 달려들자 수사관이 저의 불알을 냅다 차더라구요. 그대로 기절해 버렸죠."

그렇게 그는 간첩이 되었다.

그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양반, 그래서 전기라면 아주 무서워 합니다. 형광등도 자기 손으로 못 갈아서 내가 다 하잖아요. 면도기도 전기 면도기 못쓰고 꼭 수동 면도기를 써요."

그리고는 남편의 다리를 가리키며

"이거 다리 그때 무릎 사이에 각목 끼워가지고 밟아서는 전부 무릎이 빠진 거 아닙니까. 지금 걷지도 못하는 지경입니다. 한번은 자식 놈들이 저주파 기계를 사가지고 왔더라고. 아버지 무릎 치료하라고. 그거 뭔지도 모르고 무릎에 댔다가 기겁을 했네. 아이고."

"그럼, 일본에 사는 강봉웅이라는 사람을 만나봐야겠네요? 그 사람은 국적이 한국으로 되어 있는 건가요?"

"그 사람 틀림없이 한국 사람이라니까. 그런데 수사관 놈들이 '그 사람이 조총련 소속이니까 틀림없이 나한테 간첩지령을 줬다' 이러는 거야. 옛날 주소에 살고 있다면 틀림없이 만날 수 있을 거야. 내가 가면 내가 간첩을 안 했다고 틀림없이 확인해 줄 사람이야."

그는 기어코 아픈 다리를 끌고 일본에 가겠다고 했다.

간첩 누명 벗으려 휠체어 타고 일본으로

김용담 씨가 강봉웅 씨와 헤어지며 인사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자신의 진실과 싸웠다. ⓒ 변상철


2013년 4월, 그는 정말 휠체어를 타고 일본 도쿄 아와가라구에 도착했다. 나는 그의 휠체어를 밀며 강봉웅의 옛 주소를 찾아 헤맸다. 거짓말처럼 그는 아직도 옛 주소 그대로에 살고 있었다. 그는 김용담을 한눈에 알아봤다. 우리가 그에게 그간의 사정과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 하니 그는 당장 서랍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여기 봐. 내가 무슨 총련이야. 나는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 국적 사람이야."

그가 내민 여권은 틀림없는 대한민국 여권이었다. '조총련'='반국가단체'라는 공식을 맞추기 위해 대한민국 국적의 강봉웅을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 조작한 것이다. 강봉웅의 실제 이름은 강만염이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한자를 잘못 이해하고 수사기관에서 자백한 이름이 그대로 판결문에 쓰였다. 강봉웅의 집에서 나와 휠체어에 오르는 김용담의 얼굴은 상기되고 비장하기까지 했다.

지령을 내렸다는 공작원이 사라지니 지령을 받았다는 것 역시 성립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증거를 토대로 2013년 가을 재심을 신청했다. 몇 년씩 걸리던 재심 개시 결정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2014년 광주고등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뒤 건배를 하는 가족들. 왼쪽이 부인 김인근, 그 옆이 김용담씨이다. ⓒ 변상철


2014년 3월 광주고등법원에서 재심이 결정되었고, 같은 해 5월 최종 무죄선고를 받았다. 무죄를 선고한 판결(재판장 서경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피고인은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군 수사기관에서 임의성 없는 자백을 하였고, 검찰 송치 후 검사의 피의자 신문 단계에서도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었으나 검사가 지금까지 그 임의성에 관한 의문점을 없앨 만한 입증을 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랬다. 검사는 불법이 자행되는 이 과정을 의심할 충분한 여지가 있었음에도 인권보호나 진실규명에 눈 감았다. 바로 이 점이 수사기관과 검찰이 간첩 조작의 공범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주에서 대물림 되는 학살의 역사

재심 선고 후 지난해(2017년) 10월 그의 집을 다시 찾았다. 오랜만에 찾은 그의 집은 여전히 아름답고 아늑했다. 거실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산처럼 쌓인 만두와 감귤이었다. 나는 그 많은 만두와 감귤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웬 만두하고 감귤이 이렇게나 많아요?"

그러자 부인이 말했다.

"올 때마다 바쁘다고 밥도 안 먹고 후딱 일어나서 가니 우리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오늘은 아예 작정하고 만두하고 귤을 사왔으니 드시면서 얘기해요."

제주에서 만두를 먹는 일은 상상하지 못했다.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상상 이상으로 맛이 좋았다.

"맛있는데요?"
"맛이 있는지 어쩐지 그건 모르겠어요. 어쨌든 많이 드시고 가세요."

한참 만두를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부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남편 누명을 벗겨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당연한 진실이 밝혀진 것뿐인데요. 뭘."
"아닙니다. 남편 일이 다 저 때문인 것만 같아서 제 속이 그동안 까맣게 탔었는데 이번에 남편 일이 이렇게 되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무슨 말이세요? 나 때문이라는게?"

이미 눈물을 훔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거들었다.

"이 사람이 4.3때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임신한 올케, 조카 두 명을 한날 한시에 잃었어요. 이 사람도 같이 끌려갔는데 도망쳐서 살아남았거든요. 어머니는 학살될 때 총알이 다행히 급소를 피해 가서 살 수는 있었지만 평생 불구가 돼서 살았어요. 오빠도 억울하게 경찰에 잡혀갔는데 몇 달 있다가 국군이 육지로 끌고 가서는 행방불명이 되었지요."

조금 진정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빠가 제주에 잡혀 있는 동안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갔었어요. 오빠 따뜻한 밥이라도 해주려고... 그런데 어느 날 도시락을 싸들고 갔는데 오빠가 육지로 끌려갔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집 앞에 있는 사라봉에 올라 바다를 보며 늘 오빠를 기다렸어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살아오시기는 했지만 몸에 총알 구멍이 4개나 있더라고. 밤마다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했어요. 사람이 그렇게 죽고 다쳐도 아무도 안 왔어요. 괜히 우리 집에 왔다가 빨갱이로 몰릴까봐. 그때가 10살 때 쯤이니까 뭘 알아요. 그냥 울기만 했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나가보면 노란 호박 하나, 쇠고기 한 근, 쪽지 하나 이렇게 있더라고.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새벽에 가져다 놓은 거지. 그리고 그 쪽지에 호박은 속을 삶아 죽을 만들고, 쇠고기는 얇게 포를 떠서 상처에 붙이라는 말을 써놨어. 그리고 쪽지 마지막에 이런 말이 있었어.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아지게 된다는 뜻의 제주 방언)"

4.3 학살 때 빨갱이로 낙인 찍힌 그녀는 결혼 후 남편이 간첩으로 조작되자 그것이 본인의 과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적어도 제주에서 만큼은 학살의 역사가 대물림 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 역사가 개인의 잘못이 아닌 국가의 조직적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그 고통을 서로 주고받고 있던 것이다.

김인근 씨가 집에서 준비해 준 만두와 귤더미. ⓒ 변상철


이야기가 끝날 쯤 앞에 놓인 만두와 귤을 보니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저... 이거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어떡하죠?"
"그럼, 봉지에 싸서라도 가세요. 음식을 놔두고 가면 제 마음이 계속 안 좋아요. 오빠 보낸 그날 이후로 누구라도 밥을 못 먹고 가면 내가 마음이 너무 안 좋아요."

우리는 만두와 감귤을 받아 나왔다. 그런 우리에게 그녀는 연신 고맙다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다고 했다.

"얘기 듣고 가는 것 뿐인데 뭘요"
"그런 얘기 누가 들어줘요. 선생님들이니까 그런 얘기를 들어주죠. 내 얘기 들어주는 것만으로 나는 너무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연신 손을 모으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들어주는 것, 그리 어렵지 않은 그 일을 국가는 아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들어주는 것 뿐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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