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15 15:09최종 업데이트 17.12.15 15:09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2011년 2월의 겨울 새벽, 전화기가 울렸다.


"오늘 어찌 올 수 있겠습니꺼?"
"네, 어떻게 해서든 갈 테니 친구 분들 만나거든 어디 못 가게 꼭 붙잡고 계세요."

전화를 끊고 가족들이 깰까봐 조심조심 옷을 입었다.

"2월 12일 현재 이 시각 적설량은 강릉 90cm, 삼척 80cm이며 이 눈은 앞으로도 30cm에서 최대 50cm가량 더 내리겠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대설경보 뉴스가 흘러나왔다. 가방을 챙겨 그림자 빠져나오듯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밖은 이미 눈이 허리 정도까지 차 올라왔다. 10여 분쯤 기다리니 시내버스가 눈발을 헤치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기차역에 도착하자 태백선은 끊겼고, 대구에서 통리역으로 오는 영동선만이 다닌다고 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기차가 다닌다니.

1시간여를 기다려 탄 기차는 동해역에 다다르기 직전 신기역에서 눈이 쌓여 출발하지 못했다. 안내 방송에서 선로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객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하나둘 내려 함께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렵게 도착한 동해역. 그러나 진짜 고생은 지금부터였다.

동해역에 내렸을 때 나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눈이 내 가슴 아래까지 쌓여 있었다. 나중에 뉴스를 통해 안 사실이지만 강릉의 적설량이 140cm이고, 삼척의 적설량이 120cm라고 했다. 실제 길가에 쌓인 눈은 제설로 치워진 도로가의 그득한 눈 때문에 2m 가까이 되어 보였다. 나아갈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역 대합실에서 버스회사에 전화를 했지만 동해에서 삼척 가는 버스는 고사하고 운행하는 차량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삼척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이미 바지는 모두 젖은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3시간쯤 걸었을까, 운 좋게 도로의 제설차를 얻어 타고 약속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젖은 옷을 내주신 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몸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17세 소년에게 붙은 '빨갱이' 딱지

방에는 4명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피해자인 김용태와 그의 친구 3명. 김용태씨는 친구 3명을 한 명 한 명 소개해 주었다.

"저도 이 친구들과 30년 만에 만나는 거래요. 보안대 잡혀간 뒤로 고향 땅에 한 번도 오지 못했거든요."

그는 삼척에서 지낸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난한 집안 살림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김용태씨는 15살 때 선원생활을 시작했다. 가난 때문에 주문진에서 처음으로 오징어 배(대복호)를 탔던 그날, 그 대복호는 북한경비정에 납치되어 1년 동안 북한에서 머물러야 했다.

북한에서 온갖 회유와 협박을 이겨내며 가족과 고향을 찾아 남한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수사기관의 폭력적인 조사와 처벌뿐이었다. 군사분계선을 월선하지 않았지만, 모진 몽둥이 앞에서는 고의로 군사분계선을 월선했다고 허위자백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7세 소년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용태 등이 탔던 어선이 납북되었다가 귀환될 당시의 신문기사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빨갱이 딱지를 붙인 그는 어디서 살든, 무슨 일을 하든 늘 정보과 형사가 따라붙었다. 그가 다른 도시로 가려면 먼저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는 범죄자가 아님에도 늘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한번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 표정이 안 좋아요. 방에 들어가니 형사가 와 앉아 있는 겁니다. 무슨 사건이 났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 계속 추궁하는 겁니다. 아는게 없어서 모르겠다고 하니 빨갱이 새끼, 이러면서 욕을 하는 거예요. 옆방에서 막걸리를 드시던 아버지가 이 소리를 들으시고는 달려오셔서 '당신도 자식을 키우고 있을 텐데 사람을 이렇게 다루는 법이 어딨소? 애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라고 항의하니 그제야 슬금슬금 나가더라고요."

가족에게 계속 피해를 준다는 생각에 스스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 태백으로 옮겨와 건축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을 했다. 불행은 계속되었다. 건설회사가 부도가 났고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시 먼 마산으로 떠나야 했다.

당국의 감시를 피해 홀로 마산으로 이사오면서 가족과 소식을 주고받지 못했던 그는 아내가 아이를 임신한 것도 알지 못했다. 남겨진 아내는 삼척 친정에서 홀로 아이를 출산했다. 그러나 남편은 출산조차도 알지 못했다.

처음 만난 아들과 먹은 눈물의 아귀찜

그런 그에게 커다란 불행이 찾아왔다.

"마산에서 공사장 일을 하고 있는데 남자 둘이 찾아 왔더라고요. 병무청에서 나왔는데 예비군 훈련을 받지 않았다며 확인 좀 하자는 거예요. 그리고는 차에 같이 탔죠. 가는데 병무청이 아니더라고요. 어디 가냐고 물어보니 욕을 하면서 입 닥치고 있으라는 거예요. 그길로 간 곳이 강릉보안대였어요"

이전에 납북되었을 때 북한 공작원으로 훈련받고 와서 간첩을 했다는 것이 그를 연행한 이유였다. 그렇게 감시를 받으며 살았지만 결국 그는 조작간첩 대상이 된 것이다. 여느 조작간첩 피해자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잠도 못자면서 수백 장의 진술서를 수십 번 반복해서 썼다. 반복해서 작성할 때마다 구타에서부터 전기고문, 물고문이 따라왔다.

"근데 하루는 라면을 끓여 주더라고요. 며칠 제대로 밥을 못 먹었으니 얼마나 라면 냄새가 좋던지... 냄비를 앞에다 두고 젓가락으로 라면을 집어 한 입 딱 넣었는데, 와!"

그건 라면이 아니라 소금이었다. 짜다 못해 써서 먹지 못했다. 못 먹겠다고 하니 '야 이 개새끼야, 여기가 니가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안 먹는 식당인 줄 알아. 이 새끼 정신 못 차리네'라며 강제로 먹였다. 목이 타는 듯 한 갈증이 밀려왔지만 물을 주지 않았다. 물 한 방울이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때 수사관이 여기 있는 친구들도 잡혀왔다고 알려줬어요. 그리고 이 친구들이 썼다는 자술서를 보여줍디다. 그런데 그 자술서 내용이 내가 다 간첩 질을 했다는 내용인 거예요. 어디 군부대를 묻더라, 어디 검문소를 묻더라, 지역 관공서에 대해 질문했다 다 이런 얘기였어요. 지금이야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친구들이 원망스럽더라고요."

그는 그렇게 간첩이 되었다. 그리고 7년의 옥살이를 견뎌냈다. 그 사이 아내와는 이혼을 하였다. 아이마저 간첩의 자식으로 키울 수 없다며 이혼해 주기를 바랐다. 달리 변명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담담하게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출소 후 마산에서 거주하며 건축 일을 하며 지냈다. 감옥에서 건축자격증 6개를 취득하고 대학에도 진학했다. 그러나 간첩 이력 앞에 다 소용없는 것들이었다. 그냥저냥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사는 범죄자 출신의 일용직 노동자가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청년 하나가 찾아왔다. 잘생긴 얼굴의 그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단박에 자신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다. 못난 아비를 찾아온 아들 앞에 그의 마음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였다.

3일을 머무는 동안 아들과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도 나눴다. 3일 되던 저녁 아귀찜을 먹었다. 아귀찜을 먹던 아들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다. 3일간 자신의 마음 한 켠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감이 결국 아들 입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아버지, 이만 했으면 제가 아버지께 자식 놈이 해야 할 도리는 다 한 거 같네요. 이제 저 올라가면 아버지하고 저하고 부자 인연 끊을 랍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부자지간의 인연을 끊다니... 아들 앞에 내세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부모지만 아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찬 칼날처럼 아팠다.

"아들놈이 경찰대학 시험을 봤는데 필기는 수석으로 합격하고도 신원조회에서 나 때문에 떨어졌답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더 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아들의 말이 끝나고 나서 그는 아무 말 없이 아귀찜 그릇을 박박 긁었다. 밥도 국물도 생선살도 없는 그 그릇을 긁고 또 긁었다. 이대로 숟가락을 놓아버리면 아들과 더 이상 밥상을 함께 하지 못한다는 그 심정으로 그는 말없이 그릇만 긁었다. 그렇게 떠난 아들은 얼마 후 한강에서 투신하여 벽제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말없이 듣고 있던 친구들은 애꿎은 장판만 보고 있었다. 한번만 도와달라며 친구들의 손을 잡자, 친구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도 잡혀가서 때리니 수사관들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지.'
'나도 간첩으로 만든다니 무서워서 거짓자백을 했지. 뭐'
'니가 다 자백했다고 인정하라고 하니 그 말을 믿고 허위자백 안했나.'

친구들은 미안하다며 각자 거짓 진술을 한 이유를 말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뭘 좀 먹어야 되겠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우태하나? 여기 조사관님도 옷이 다 젖어서 어디 나가지도 못하겠는데?"
"그믄 집에 있는 거로 대충 먹지 뭐. 뭐이 있나?"

부엌을 한참 뒤지던 친구는 두 손에 라면과 생선 한 마리를 들고 왔다.

"뭐이나?"
"라면하고 말린 아귀가 좀 있는데 어터하나?"
"그믄 라면에 생선을 넣으면 안 되겠나?"

춥고 배고픈 나는 뭐라도 국물이 있는 음식이라면 다 좋았다.

"제가 끓일까요?"
"에이, 어딜. 앉아 있어요. 우리가 다 할 테니"

그런데 갑자기 그가 일어나서 라면봉지를 빼들더니

"라면은 내가 끓일끼다. 니들 짜게 끓이면 어떡하냐?"

한바탕 웃었다. 그렇게 시원하게 웃고 그날 우리는 뽀얀 국물의 짜지 않은 아귀라면을 먹었다.

아들의 유골함을 가슴에 품다

벽제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아들의 유해를 고향으로 가져가기 직전 마지막 모습을 사진에 담는 김용태 ⓒ 변상철


벽제에 안치되었던 아들의 납골함을 고향으로 가져갈 때 가슴에 꼭 품고 있는 김용태 씨 ⓒ 변상철


2015년 겨울, 그는 무죄를 선고 받은 뒤 20년 만에 죽은 아들을 찾아갔다. 차디찬 벽 속에 갇혀 있던 아들의 사진을 정성스럽게 찍고 나서 벽을 깨고 아들의 유골이 들어있는 납골함을 소중히 가슴에 품었다. 삼척의 선산에 아들을 묻기 위해 그동안 벽제공동묘지에 남겨두었던 아들을 가슴에 품고 삼척으로 내려갔다. 처음 아비의 따뜻한 가슴에 아들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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