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이아이피> 관련 사진.

영화 <브이아이피> 관련 사진.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에서) 여고생이 강간·약물주입·교살당하는 것을 찍은 사진과 현장을 보고 나서 일행이 '못 보겠다'고 울었다. 그래서 십 분 만에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영화관에서 부들부들 떨다가 밖으로 나가 헛구역질하고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참고 봤으며, 개봉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절대로 보지 말라고 할 생각."

윗글은 영화 <브이아이피>를 보다가 충격을 겪은 관객들이 지난 23일 밤에 트위터에 남긴 내용이다. 해당 트윗마다 적게는 약 5천 회, 많게는 2만 회 가까이 공유됐다. 이를 인용하여 <중앙일보> 등의 매체가 영상 기사를 제작하기도 했다.

영화가 어떤 내용이고, 어느 지점이 불편하길래 개봉 당일 SNS에 관객들이 '관람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브이아이피>가 어떤 영화인지 직접 들여다봤다.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다룬 영화 <브이아이피>

영화 <브이아이피>는 연쇄살인마 김광일(이종석 분)을 쫓는 인물들을 주로 비춘다. 북한에서 연쇄 살인을 저지른 김광일은 형사 리대범(박희순 분)에게 발각되지만 북한 고위급 인사의 친인척, 이른바 'VIP'라는 이유로 수사 대상에서 제외된다. 김광일이 탈북해서 한국으로 온 이후에도 그의 살인행각은 이어진다. 이에 국정원 요원인 박재혁(장동건 분)과 형사 채이도(김명민 분)가 뒤를 쫓지만 여전히 범행에 대한 처벌은 어려워 보인다.

영화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인 김광일을 둘러싼 한국, 미국, 북한의 수사기관이 얽히고설킨 상황을 보여준다. 경찰청에서 연쇄살인의 용의자로 김광일을 검거하지만, 과거 그의 기획입국을 주도한 국정원이 번번이 풀어주려고 애를 쓴다. 미국 CIA요원(피터 스토메어 분)도 김광일로부터 북한 관련 정보를 캐내기 위해 검거를 방해하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기획 귀순을 다룬 영화들이 그간 없었지만 우리 근현대사에선 많이 있던 일이다. 영화로 만들기 위해 단순한 기획 귀순이 아닌 특정 목적에 의해 진행된 것, 그리고 귀순 당사자가 일반적 인물이 아닌 괴물이라는 설정을 넣었다. 그 괴물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우리 사회 시스템이 제 기능을 못 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그려보고자 했다." (박훈정 감독)

개봉에 앞서 16일 기자간담회에서 감독이 밝힌 말이다(관련 기사 : 무능력한 국정원 잡는 북한 살인마? 아쉬운 <브이아이피>). 영화는 다소 엉성한 모습을 보이는 공작원과 이에 휘둘리는 공권력을 물고 물리는 관계처럼 엮었다. 이를 볼 때 감독의 의도가 줄거리 상에서 잘 반영된 것으로 보이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은 편이다. 액션도 적절히 가미됐다.

문제는 영화 <브이아이피>가 사이코패스를 소재로 다룬 부분이다. 영화 초중반, 김광일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은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된다. 이는 그의 캐릭터가 단죄되어야 마땅한 '괴물'이라는 걸 표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인다.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피해자의 얼굴은 고통으로 한껏 일그러지고, 이에 대비되는 김광일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진다. 여기저기 피가 튀고, 목이 졸리는 사이에 여성이 버둥거리며 저항하지 못하면서 괴로워하는 표정까지 고스란히 스크린에 오른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든다. '괴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해서 이런 구체적인 살해 묘사까지 굳이 영상으로 담아야 했을까.

'여자시체'로만 '소비'되는 피해자들

극 중에서 폭력의 대상이 오로지 '여성'이냐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다. 대부분 남성인 주요 등장인물도 총격에 휘말리는 등 물리적으로 공격받는 상황에 처한다. <브이아이피>에서 피를 흘리는 인물이 모두 '여성'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다루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분명히 보인다. 살인범을 쫓던 형사 채이도가 공격받는 장면은 국정원 요원인 박재혁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전까지 김광일을 검거 대상에서 빼돌리려던 박재혁은 쓰러지는 채이도를 보고서 총을 들고 김광일을 추격한다. 말하자면 남성 등장인물의 출혈은 주요 등장인물의 태도를 바꾸는 큰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여성 등장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이와 다르다. 그나마 주요 등장인물에 이름을 올리는 '소녀(극 중 이름조차 없다, 정우림 분)'는 김광일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잔인하게 살해되는 피살자로 소비된다. 앞서 언급한 남성 등장인물의 고통이 '사건'에 해당한다면, 여성 등장인물의 죽음은 연쇄살인마라는 캐릭터 구축을 위한 '도구'에 그치는 셈이다.

 포털에 공개된 영화 <브이아이피>의 출연 정보. 다수의 피해자가 '여자시체'역으로 적혀있다(이후 '여자'로 정정됐다).

포털에 공개된 영화 <브이아이피>의 출연 정보. 다수의 피해자가 '여자시체'역으로 적혀있다(이후 '여자'로 정정됐다). ⓒ SM C&C


'여성 등장인물은 그저 도구'라는 주장은 SNS상에서 어느 누리꾼의 지적으로 더욱 불거졌는데, 해당 누리꾼은 포털에 소개된 영화의 '배우·제작진' 소개도 문제로 지적했다. 출연 정보에서 여성 등장인물 중 1명만 '소녀'로 소개되고 나머지 인물들은 '여자시체 역'으로 적힌 부분이 노출된 것이다.

누리꾼의 지적이 반영된 것인지 24일 이후 포털 영화 정보에서 '여자시체 역'은 '여자'로 수정됐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도 트위터에서는 "'여자시체'를 '피해자'로 바꿨다면 고쳤다고 할 수 있지만, '여자'로 바꿨으면 고친 게 아니라 더 망가뜨린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비판은 '여성 등장인물을 도구로 소비했다는 건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영화 속 살인에 관한 묘사는 반드시 잔인해야 할까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컷

영화 <브이아이피> 스틸컷 ⓒ SM C&C


앞서 언급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영화 <브이아이피>는 몇 가지 물음을 남긴다. 극 중에서 살해 묘사는 약 10분 정도 스크린에 오르는데, 전체 상영시간 128분 중 일부이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봐야 할까? 해당 장면을 보고 '부들부들 떨고 울음을 터뜨린' 관객이 전체 관람객(25일 기준 약 48만 명) 중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괜찮은 걸까?

구체적이고 분명한 기준이 정해진 사안은 아니지만, 이런 질문에 관해 답을 떠올리면 고개를 젓게 된다. 영화에서 살인에 관한 묘사는 반드시 잔인해야 할까? 훨씬 자극적이고 강렬한 살해-강간 장면을 연출할 수 있지만 다른 선택을 한 과거의 많은 작품을 돌아보면 답은 '아니오'에 가깝다.

비록 다른 장르와 성격의 영화였지만, 종교계 내의 성추문을 밝힌 언론인들의 이야기 <스포트라이트>가 '충격적인 성폭행 장면'을 한 번도 스크린에 올리지 않고도 사안의 심각성을 관객에게 무겁게 전달했던 예를 떠올려 보자. <브이아이피>의 초반부에서 '소녀'가 납치된 후 살해될 때 목을 조르는 장면을 길게 비추거나 핏줄이 선 여성의 눈을 클로즈업한 것이 굳이 필수적이었을까? 결국 제작 과정에서의 '선택'일 텐데, 전자인 <스포트라이트>의 방식은 실존하는 성범죄 피해자들을 위한 배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브이아이피>를 보고 나서 충격과 공포를 호소한 관객이 여럿 나오는 것을 볼 때, 한국 영화계도 이제는 '자극적인 장면'을 주요 장치로 사용하는 걸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지적은 '장르 불문하고 어떤 영화건 순하고 부드러운 묘사만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가 남녀노소 즐기는 문화 예술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윤리와 인권의식에 기반한 연출을 지향하길 바라면서 문제를 제기하는 쪽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특히 잔인한 장면과 묘사들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에 있어서 반드시 담아야 할 부분, '피해갈 수 없는' 영역이 아니라면 마땅히 덜어내야 옳은 일이다.

트위터에서 논란이 벌어진 다음 날인 지난 24일, 영화평론가 듀나는 "여자를 강간하지 않는 '알탕 영화(남성 중심의 등장인물로 남성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영화)'를 만드는 게 대단한 미덕이 되는 날이 왔네"라고 트윗으로 썼다. 일부 관객이 보기 괴롭다고 호소하는 데도 '다수 관객이 만족하니 이 정도는 괜찮다'고 넘어가야 할까. 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도 아쉬움을 느낀다. 이런 고민을 관객들과 평론가가 아니라 영화 제작진들이 먼저 해줬다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브이아이피 여자시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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