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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내가 살고 싶은 나라, 내가 꿈꾸는 국가'에 대한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대선 기획 '100인의 편지'를 통해 전하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은 '열린 기획'으로 시민기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차기 정권에 하고 싶은 말, 바라는 바에 대해 적어 기사로 보내주세요. '이게 나라냐'는 탄식을 넘어 '이게 나라다'라는 새로운 지향점을 여러분과 함께 열어나가겠습니다. [편집자말]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고물상 앞. 허름한 행색의 이태평(가명, 80) 할아버지가 리어카를 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바퀴가 인도 턱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한다. 라면상자 등 폐지, 소주병, 맥주병, 알루미늄 파이프 등 온갖 것들이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에 실려 있다. 제법 무겁다.

이씨 할아버지가 왼쪽 방향으로 몸을 기울여 손잡이에 힘을 싣는다. 오른편 바퀴가 살짝 들렸다. 검은 점퍼를 입은 중년 사내가 밖으로 나와 리어카를 민다. "하나, 둘, 셋!" 그제야 말을 들은 리어카는 고물상 안으로 향했다. 한쪽 다리를 절뚝이는 이씨와 함께 리어카는 천천히 움직였다. 서너 걸음이면 가닿을 거리였다. 그는 그 두 배쯤 되는, 여섯 일곱 걸음으로 갔다.

계근대(대형 저울) 위에 리어카와 이씨가 섰다. 바닥이 평평한 녹슨 철판 모양이다. 이씨가 폐품을 묶은 고무줄을 풀어헤친다. 거북이마냥 느리다. 고물상 입구 한편에선 용접 작업이 이어진다. LPG가스의 시큼한 내음이 코를 휘감았다. 냄새에 아랑곳 않고, 짐을 하나씩 꺼내 켜켜이 쌓인 고물더미로 휙 던진다. 벽시계 옆에 달린 자그마한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숫자가 찍힌다.

작업은 10분 만에 끝났다. 내일의 노동을 위해선 고물을 담을 마대 자루가 필요하다. 폐품 더미에 놓인 자루를 챙기려 하자, 고물상 주인이 퉁명스레 말했다. "적당히 가져가!" 푸른색 두 자루, 주황색 세 자루를 챙겨 나왔다.

휴대폰 통화를 하며 밖으로 나온 주인이 한 손으로 지폐 뭉치를 건넨다. 5천 원 지폐 한 장과 1천 원 지폐 석 장, 도합 8천 원. 새벽 5시에 집을 나와 여섯 시간에 걸쳐 노동한 대가다. 너무 적은 것 아니냐고 물었다. 이씨가 답했다.

"10㎏에 1천 원인데, 오늘 75㎏를 모았으니 7500원 받아야 돼. 근데 주인이 500원을 더 챙겨준 거야. 원래 그 사람 말이 걸걸해서 그래. 사람은 괜찮아."

고물상을 나온 이씨는 리어카를 인도 아래로 끌어내렸다. 인도에 바짝 붙은 채 아스팔트 도로 차선 위에서 천천히 리어카를 밀었다. 배수구 근처에 버려진 콘크리트 벽돌이 서너 개 보였다. 게 눈 감추듯 주워 담는다.

앞에서 차들이 맹렬하게 돌진한다. 이씨를 발견하곤 뒤늦게 속도를 늦춘다. 아슬아슬하게 옆 차선에 살짝 걸쳐 달린다. 구부정한 등을 좀처럼 펴지 못하는 그의 걸음은 느릿했다. 그렇지만,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삼거리 횡단보도를 건넜다. 30~40초 되는 신호등 초록불이 금세 꺼졌다. 리어카는 횡단보도를 반쯤 지났다. 노란 중앙선 언저리에서 멈췄다. 뒤로 시내버스, 레미콘이 휙휙 스친다. 매서운 먼지 바람이 살결을 찌른다. 조바심에 물었다. "할아버지, 이대로 있어도 괜찮아요?" 이씨는 늘 겪는 일이라는 듯 태연했다. "괜찮어. 차들이 알아서 다 피해 가. 아무도 뭐라 안 해." 아찔한 순간은 그 뒤로도 몇 차례 이어졌다.

이씨의 리어카는 남다르다. 리어카 앞에 널빤지를 이어붙이고, 그 아래 보조바퀴를 달았다. 스스로 연구해서 개조했단다. 다른 이들보다 두세 배 많은 짐을 싣는 장점이 있다. 길쭉한 철제 빔이나 파이프도 가져가기 편하다. 5~6년 전 단돈 5만 원에 샀으니, 본전 다 뽑은 셈이다. 다만 방향 전환이 어렵다. 몸이 부쩍 약해진 탓에 젖먹던 힘을 내기가 시원찮다.

이씨가 입은 모자 달린 감청색 점퍼엔 군데군데 허연 소금기가 슬었다. 황갈색 코듀로이 모자에는 '챔피언(champion) 64'가 적혀 있다. 그의 생애 속에서 챔피언의 왕관을 썼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과연 앞으로 펼쳐질 세상은 그에게 "충분히 잘했다. 열심히 살았다"고 격려를 보낼 수 있을까.

80세 할아버지의 생애, 먹고 살려고 군대에 말뚝 박으려 했지만...

지난 1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어느 도로에서 이태평(가명·80) 할아버지가 리어카를 밀고 있다. 그 옆으로 트럭이 위태롭게 지나간다.
 지난 1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어느 도로에서 이태평(가명·80) 할아버지가 리어카를 밀고 있다. 그 옆으로 트럭이 위태롭게 지나간다.
ⓒ 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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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1938년 강원도 주문진에서 태어났다. 걸어서 30분~40분 거리에 38선이 있는 최전방 어촌에 살았다. 병석에 있던 친어머니는 해방이 되던 해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살림을 차렸다. 친어머니에 관한 기억은 없다. 사진으로만 접한 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명태 덕장을 운영했다. 동해바다에서 잡은 명태들을 한겨울 바닷바람에 말렸다. 얼었다 녹았다 하길 수차례 거듭하며 부풀어 오른 명태는 누런빛을 띤 황태로 익었다. 한창 사업이 잘 될 때는 이북에도 내다 팔았다. 돈벌이가 쏠쏠했다.

어릴 적 이씨는 함석지붕을 덮은 한옥에서 살았다. 그 당시 귀한 물건인 라디오도 갖고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가족 모두 바리바리 짐을 싸서 경북 경주 감포읍으로 피란갔다. 다행히 그곳엔 상어잡이 어선 사업을 벌이던 일가친척이 살고 있어, 어려움 없이 지냈다.

3년 1개월에 걸친 전쟁이 막을 내렸다. 주문진으로 돌아왔다. 고향은 폭삭 무너졌다. 총총히 있던 집들은 포격을 맞아 잿더미가 됐다. 천만다행으로 이씨네 집만 무사했다. 이씨는 '아버지 사업 물려받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화투 노름에 빠진 아버지가 일을 내팽개치면서, 사업이 망한 것이다. 한옥을 내다 팔았다. 새어머니는 도망쳤다.

어떻게든 집안 생계를 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폐인으로 전락한 아버지 대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자그마한 목선에 올라 생선을 잡고, 말린 명태를 장에 팔았다. 이 와중에 아버지는 병을 얻어 세상을 등졌다.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느낌이었다. 한동안 놀았다. 한량처럼, 무기력증을 애써 감추면서.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아 '33개월 군 복무'를 하라는 입대 영장이 날아들었다. 논산훈련소로 갔다. 때마침 장기복무자들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다. 냉큼 지원했다. 바깥세상에서 먹고 사는 데 전전긍긍할 바에야, 차라리 군대가 나았다. 밥도 주고, 옷도 주고, 돈도 주는 군대가 좋았다.

요행으로 이씨는 카투사병으로 차출됐다. 학력 제한도 없었고, 상부에서 모집대상으로 설정한 군번 범위에 딱 들어맞았다. 주한미군에 배치돼 1년 반 정도 미군 병사들을 도왔다. 미군들과 말을 섞다 원주에 있는 우리 군부대로 왔다. 연일 이어지는 훈련은 고통스러웠다. 엄한 호통과 가혹한 통제의 연속이었다. 10년 이상 군대 생활을 버틸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제대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사소한 곳에서 발생했다. 육군본부에서 하사 진급 특명이 내려왔고, 중대장은 이씨에게 내무반장직을 맡겼다. 검열이 예정된 어느 날이었다. 관물대에 피복이 빠짐없이 있는지 확인해보라 했다. 그런데 몇몇 사병들의 상·하의가 없었다. 상사로부터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대뜸 이씨더러 매를 맞으라 했단다.

"내무반이 지적 받았으니까 단체 기합을 받아야 되는데, 네가 내무반장이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어느 것으로 맞을래?"

이씨는 잔뜩 겁을 먹었다. 상사가 곡괭이자루를 가져와선, 엎드리라는 거였다. 잘못 맞으면 죽을 판이었다. 그 시절에는 잘못하면 대판 맞는 게 군 생활의 예사였다. 맞아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사연도 심심찮게 들리던 때였다.

매질을 거부하고 달아났다. 영내 상점(PX)에 숨었다. 상사는 거기까지 쫓아왔다. 이씨는 애걸복걸하며 용서를 구했다.

"인사계님, 제가 기합을 받았어도 저는 장기복무자이고 군대 생활을 계속할 사람입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봐줄 수 없다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맥주를 사서 푸짐하게 대접했다. 그제야 상사는 용서를 받아들였다. 이씨는 아직도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면 몸서리친다.

"하, 말뚝 박고 군대 생활하기 싫더라고. 제대하려니까 제대가 안 된대. 큰일 났다니까. 나중에 다행히 '3대 독자인 사람은 제대할 수 있다'는 공문이 내려왔어. 그래서 집성촌에 가서 증명을 떼다가 상부에 올리니까, 일주일 만에 제대 특명이 내려왔지."

제대한 뒤 자유를 만끽하는 나날도 잠시였다. 먹고 사는 문제에 맞닥뜨렸다. 연탄 공장에 들어가서 1년간 짐을 날랐다. 번개탄 공장에서도 몇 년 일했다.

"한번은 원양어선을 타고 싶었어. 시험 쳐서 가려고 했는데, 그때 폐가 좋지 않다고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은 거야. 못 갔지. 그런데 안 가길 잘했어. 원양어선이 바다 한복판에서 침몰했다고. 거기 탄 사람들은 다 죽었어."

이씨는 어엿하게 가정을 꾸렸다. 집사람을 만나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아 길렀다. 국가는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통해 국민을 동원했다. 당신들이 체제에 군말 않고 열심히 일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줬다. 개발의 광풍이 불었다. 아파트 공사현장에 가서 막노동을 했다. 남의 집만 우후죽순 솟구쳤다. 그곳에 내 집은 없었다. 전세방, 월세방을 전전했다.

그는 박정희·박근혜가 자신을 보살폈다고 믿었다

이태평(가명·80) 할아버지가 1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모처에서 폐품 수거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태평(가명·80) 할아버지가 1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모처에서 폐품 수거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 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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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다. 신문 호외엔 굵은 고딕체로 '대통령 유고'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이씨는 만감이 교차한다.

"그 당시 군에 있던 사람들은 혜택을 많이 받았다고. 박정희가 군정(군사정부)을 했기 때문에 (군인들) 돈도 많이 올려줘서 고맙지. 그런데 김재규라는 사람이 박정희를 총으로 쏴 죽였잖아. 대통령을 한 번만 해먹고 말아버리지. 자꾸 욕심 부리면서 계속하다가 죽었다고. 그러니까 사람이 너무 욕심 부리면 안돼."

2017년 3월 10일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됐다. 텔레비전 생방송 화면은 노란 헤드라인체로 쓴 '헌재, 박근혜 대통령 파면' 문구로 장식됐다. 이씨는 씁쓸했다. 그에게 있어 박 대통령은 이씨와 같은 '어르신'을 섬긴 첫 대통령이었다.

"여자 박 대통령이 되고 나서 복지를 한다고, 연금을 16만 원씩 줬어. (노인들이) 혜택을 많이 봤지. 그 전에는 연금이 없었지. 다른 대통령 때는 그런 거 없었다고. 여자 박 대통령 덕분에 우리가 고맙게 받아먹고 있어. 다들 칭찬해. 안 그러면 우리가 어디서 돈 받고 밥 한 그릇 먹겠나?"

이씨에겐 한평생 '힘없고 약한 나'를 보살핀 국가는 박정희-박근혜 정권이었다. 젊은 시절 군인으로, 산업역군으로 일했다. 이씨의 존재를 설명한 것은 박정희의 국가였다. 풍전등화의 조국을 지키고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전사, 황혼에 접어든 그들을 호명하고 '애국자'로 치하한 것은 박근혜의 국가였다.

"대통령이 월급을 많이 받잖아. 아직 결혼도 안 한 여자인데, 충분히 돈을 받아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인데 나쁜 짓을 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최순실과 같이 공모해서 정말 해먹으려 했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 같아."

'장애3급' 판정 받았지만 복지 급여는 못 받아

이씨 할아버지는 폐지를 모으기 전 지역사회 복지관에서 식사를 나르는 근로봉사를 했다. 한 달에 20만 원 받았다. 한 2~3년 일했다. 복지관에서는 더 이상 일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너무 오래 일했단다. 원치 않게 일을 그만뒀다.

아내는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다. 이부자리에 누운 채 꼼짝 못 한다. 설상가상으로 이씨에게는 중풍이 들었다. 어느 날 소주 한 병 마시고 놀다 오는 길이었다. 술기운이 거나하게 돌았다. 어질어질했다. 몇 걸음 못 갔다. 컴퓨터 본체 전원이 꺼지듯 픽 쓰러졌다.

겨우 살아났다. 그런데 오른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추가 수술이 필요하다 했다. 나라는 도와주지 않았다. 내 돈 들여 치료받아야 할 판이었다. 임시방편으로 한의원을 다니며 침을 맞았다. 그렇게 버텼다.

결국 이씨는 장애3급 판정을 받았다.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장애3급이면 주민센터에 복지급여 수급 신청을 해서 약간의 돈을 탈 수 있다는 주변의 이야기에 솔깃했다. 2015년 '혹시나' 싶어 지방자치단체에 손길을 내밀었다.

'역시나' 상담원은 이씨가 복지급여를 받을 수 없다고 답변했다. 세대원으로 있는 성인 자녀들이 '근로능력을 지니고 있는' 탓에 수급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불혹에 접어든 딸은 재작년 인천으로 시집갔다. 마흔셋인 아들은 젊을 적 공장에서 겪은 사고의 트라우마로 온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 일정한 수입이 없지만 정부는 그를 부양가족으로 점찍었다.

자가 소유의 아파트가 있는 것도 문제가 됐다. 5~6년 전 입주한 아파트는 이씨 할아버지가 어렵사리 모은 목돈에다가, 중소기업에 다니는 딸의 도움으로 은행 융자를 받아 마련한 첫 '내 집'이었다. 그러나 1982년 지어진 아파트는 너무 낡았다. 자신 있게 '집'이라 말하기엔 어딘가 결함이 있는 집이었다. 칼로 무 자르듯 기계적 구분으로 일관한 한국의 복지제도는 할아버지를 문전박대했다.

이씨 할아버지는 올해 다시 복지급여 수급신청을 할 계획이다. 하지만 고생길이 천릿길이다. 어떤 서류를 준비하고, 무엇을 말해야 주민센터에서 자신의 처지를 십분 이해해줄지 근심에 잠겼다. 이씨는 막막하다.

"장애3급은 안 되는데, 4급은 됐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다시 얘기해보려고. 근데 옆에서 꾸준히 (조언) 얘기를 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없어."

"일자리 많이 만들어야 살아나가지"

폐지를 줍는 이태평(가명·80) 할아버지가 거뭇거뭇한 두 손으로 리어카 손잡이를 잡고 있다.
 폐지를 줍는 이태평(가명·80) 할아버지가 거뭇거뭇한 두 손으로 리어카 손잡이를 잡고 있다.
ⓒ 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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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가 코앞이다. 여야 할 것 없이 후보들이 난립한다. 자기 몸값을 올리려고 나온 후보들도 부지기수다. 이씨가 특별히 지지하는 후보는 없다. 하지만 유력주자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 같다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민주당의 문재인이 될 것 같아. 그 사람 지지율이 38%인가. 이 사람이 저번에 한 번 나오려다 못 해 먹었으니까 꼭 대통령 해보겠다 하고, 신경 많이 쓰던데? 찍어주면 대통령 성공할 거라고. 근데 또 모르지. 대통령 해먹다가 박근혜처럼 그리될 수도 있지. 허허허."

이씨 할아버지는 야권 후보들이 앞다퉈 내놓는 복지공약에 내심 쌍수를 들었다. "한 달에 2만 원, 3만 원씩만 줘도 큰 혜택을 받는겨." 하지만 걱정도 앞선다. 나라 곳간은 화수분이 아니다. 공약이 실현되더라도 과연 몇 년 지속될까 하는 우려도 스친다.

"기본소득이니 뭐니 얘기들이 나오잖아. 근데 그게 안 될 거라고. 왜 그런가 하면, 나라가 돈이 없어. 몇 년 가서는 나라가 어렵게 돼서 없어지고 말 거라고. 교회 목사들도 그러더라고. 앞으로 경제가 말이야. 점점 어려워진대. 우리나라가 내년 가서는 먹고 살기 힘들 게 될 거다, 그러는데 나라가 어려운데 무슨 돈을 전 국민한테 일 년에 30만 원 주겠냐? 생각해봐. 몇 년 어물쩍하다 말 거라고."

여든 나이로 날마다 여섯 시간씩 거리를 다니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일하려니 점점 힘에 부친다. 이씨는 하루하루 벼랑 끝으로 몰리는 느낌을 받는다.

"10년 전에 비해서 요새는 돈벌이가 되니까 너도나도 다 파지를 주워가버려. 하도 종이가 없으니까, 일부러 물 묻혀서 무게가 많이 나가게 하는 사람들도 있어."

시민단체 자원재활용연대는 폐지 줍는 노인들의 규모를 약 175만 명으로 추산한다. 지난 2014년 생명나눔재단은 경남 김해시에서 폐지를 모으는 어르신 199명을 상대로 실태조사를 벌였다. 열 명 중 여덟 명이 하루에 많게는 6시간까지 일했다. 응답자의 89.9%가 한 달에 20만 원 남짓 되는 돈을 손에 쥐고 있었다.

노인들의 반절이 빈곤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이씨 할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도, 아들을 위해서도 일자리를 많이 만들겠다고 약속하는 후보를 찍을 생각이다.

"우리 아들은 중학교밖에 못 나왔어. 공장 생활하라니까 수건 만드는 공장, 옷 만드는 공장 들어갔지. 거기서 차 운전하다 사고를 냈어. 사장 회사 차를 갖다가 사고 내서 돈을 2천만 원인가 물어냈어. 거기 다니다가 나와 가지고 이젠 다른 데 들어가지도 않아.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지. 말로만 해선 안 되지. 한다고 하면 해야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젊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벌어 먹고살지. 그래야 살아나가지."

숯검댕이를 바른 것처럼 시커먼 손바닥이 리어카 손잡이로 향했다. 거뭇거뭇하고, 군데군데 패인 자국이 역력한 두 손에 따스한 볕이 들었다.


태그:#대선, #노인, #폐지, #박정희,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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