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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병원에서 암 세포 크기를 줄이는 치료를 받던 아버지. 서울 사람처럼 보이는 근사한 가방을 만 원에 샀다고 좋아하셨다.
 서울의 한 병원에서 암 세포 크기를 줄이는 치료를 받던 아버지. 서울 사람처럼 보이는 근사한 가방을 만 원에 샀다고 좋아하셨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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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첫인상처럼 '처음 한 말'도 각인된다. 손주의 손주를 본 할머니도 당신의 첫아기가 "엄마"라고 한 순간을 기억한다. 갑자기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서 젊은 엄마의 얼굴이 된다. "애기가 처음으로 '엄마'라고 부른게는 오지제. 세상이 다 내 것 같제"라고. 어떤 이는 세상을 떠나고서도, 그가 처음 한 말을 사람들 마음속에 두고 간다. 

"야야, 우리는 이렇게 산다."

지난해 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내게 처음 한 말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음식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온다고 하니까는 해줄 것이 없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몇 해 뒤에 나는 그 아버지의 아들과 결혼했다. 남편은 부엌에서 음식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 신혼살림을 맡아서 했다. 아기 이유식도, 소풍 김밥도 남편이 준비했다.

주말이면, 우리는 아버지 집에 갔다. "지금 갈게요"라고 전화만 하면 됐다. 아버지,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놓고 우리 식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명절에는 아버지의 '남바(넘버) 원'인 큰아들네 식구까지 함께 한다. 부엌일에 소질도 없고 눈썰미도 없는 아내를 둔 우리 남편은 형수와 같이 명절음식 준비를 했다.

하는 일 없어도, 며느리로 지내는 명절은 힘들었다. 손이 빠른 남편은 종류별로 전을 부치고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아주버님도 그랬다. 생선을 찌고, 나물을 무친 형님도 조카들을 데리러 갔다. 아버지, 어머니는 찾아온 친척들과 이야기를 했다. 작은 방에서 책을 읽는 나는 외로웠다. 어느 날에는 시가 옆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남편한테 따졌다.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 와 있어? 전 부치고 설거지하면 다냐? 왜 친구 만나러 가서 새벽에 들어오냐고?"   

제사 음식 준비하시던 아버지
 제사 음식 준비하시던 아버지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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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 강호병씨는 13남매 중에 장손으로 태어났다. 종가의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때서 음식을 장만했다. 허리 한 번 펴지 못 하고 전을 부치고 떡을 했다. 아버지는 집 안팎을 청소하고, 음식 만드는 일손을 도왔다. 10여 년간 그렇게 할 일을 해낸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사를 줄이자고 의논했다. 열네 번에서 네 번으로.  

"그런 말은 입에 담는 것부터가 불효여! 조선 팔도에 제사를 그렇게 지내는 집이 어딨어?"

문중의 어르신들은 진노했다. 1970년대였다. 친정 제사에 참석하는 강씨 딸(아버지의 고모)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강씨 집안 며느리들은 대대로 단명했는데 원인 중 하나가 제사라는 거였다. 오십여 명의 친척들이 저녁을 먹고, 밤 12시에 제사 지내고 나서 또 먹고, 한밤 자고 가는 어르신들은 아침까지 먹는다. 그 수발은 아버지, 어머니 몫이었다.

변함없이 아버지, 어머니는 명절을 쇠고 제사를 지냈다. 당신 자식들 어깨에 놓일 짐은 덜어주고 싶어했다. 며느리 둘을 맞이하고도, 명절이나 제사 닥치기 일주일 전부터 미리 음식 준비를 했다. 1년에 네 번 지내던 제사도 두 번으로 줄였다. 한밤중까지 기다리지 않고, 저녁밥 먹는 시간에 제사 지내자는 의견을 내서 합의에 성공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신 아버지. 부엌에 서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셨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신 아버지. 부엌에 서는 걸 자연스럽게 여기셨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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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도 꼬추가 떨어질 일이 없어."

아버지는 평생 동안 당신의 말을 증명하고 살았다. 서울의 큰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고 온 날에도 몸이 약한 어머니의 밥을 차렸다. 병원에서 암세포 줄이는 치료를 받다가 명절 쇠러 와서도,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살피고 준비했다. 음식 좀 덜 하자는 우리 남편에게 "부족하면 안 된다. 넉넉하게 해야 써"라고 했다. 그러나 며느리에게는 아무 요구도 안 했다.   

돌아보면, 아버지는 '친자식'과 '들어온 자식'을 구별했다. 대장암 수술을 하고 운신을 못 할 때, 간호는 '친자식'에게만 허용했다. 넓적다리뼈가 부러져서 세 달간 입원해서 대소변을 받아낼 때도, 당신의 큰딸과 아들 둘에게만 기저귀 가는 것을 허용했다. 사위와 며느리 앞에서는 늘 "허허" 웃었다. 다 괜찮다고만 했다.

병원에 몇 달간 누워계셨던 아버지. '친자식'과 '들어온 자식'을 구분하셨다. 들어온 자식들에게는 늘 "허허" 웃으셨다. 다 괜찮다고만 하셨다.
 병원에 몇 달간 누워계셨던 아버지. '친자식'과 '들어온 자식'을 구분하셨다. 들어온 자식들에게는 늘 "허허" 웃으셨다. 다 괜찮다고만 하셨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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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초겨울, 김장하는 날이었다. 시가 마당에는 천 포기가 넘는 배추가 소금에 절여져 있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몹시 아팠다. 큰시누이를 붙잡고는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좋겄다"고 했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군산에 있는 병원에서라도 피 검사를 해서 서울 병원으로 보내야 했다. 일터에 있던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갔다.

아버지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았다. 늘 질문이 많던 막내며느리에게 당신이 못 다해준 얘기를 들려주었다. 군대에서 축구선수로 뛴 일과 너무 배고파서 탈영한 일. 장손이니까 제대하고 고향에 남았던 일들을. 추수한 쌀을 군산시내까지 달구지에 싣고 가는 초겨울 새벽, 1시간 넘게 갔는데 쌀가마니 하나가 비었더란다. 아버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꼬랑창'에 처박힌 쌀가마니를 찾아서 지고 달렸다. 동이 터오고 땀이 났다.

"내가 그때만 해도 힘이 장사였느니라. 그런디다가... (웃음) 다들 잘 생겼다고 혔어."
"아버지는 무슨 얘기만 하면 자랑으로 끝나는 거 알아요?"
"이놈의 자식 봐라. 아,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거여!"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아버지가 고통을 참는 게 느껴졌다. 친자식이 모는 차를 탔다면, 눈을 감고 있었겠지. 아버지 며느리로 산 십 수 년 동안, 나는 '들어온 자식'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해마다 우리 친정에 "귀한 딸 보내주셔서 고맙다"고 쌀을 보냈다. 그러니 밥상을 차리라고, 명절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라고 채근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지난해 추석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맞은 첫 명절. 큰시누이는 미리 장을 봐두었다. 김치를 담가놓고, 간장게장도 담가놓고, 방앗간에서 떡도 해놓았다. 남편과 우리 큰애는 마주앉아서 전을 부쳤다. 마당을 청소하면서 사골을 우리고, 거실에 들어와서는 "넉넉히 해야 쓴다"고 말해줄 아버지 자리에는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가 힘없이 앉아있었다.

"제사라는 것은 돌아가신 분을 잊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여. 그럴라고 후손들이 모여서 나눠먹는 거여. 사람은 죽으먼 그만이다. 살아있을 때 재밌게 잘 살아야지, 죽으먼 아무 것도 아니여. 그러니까 내 제사는, 지내도 그만, 안 지내도 그만이다."

장손으로 태어나서 일생 동안 제사를 지낸 아버지의 당부는 '쿨'했다. 우리 식구는 아버지를 사랑한 효자들, 재미를 찾을 줄 안다. 음식 준비를 끝내고는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고서 동네 끝에 있는 '강'에 다녔다. 이제는 행선지가 달라졌다. 아버지가 묻혀 있는 저 너머 동네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하이킹 온 사람들처럼 길에서 멈춰 사진을 찍고 놀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맞은 첫 명절. 우리 식구는 놀러온 사람들처럼 아버지가 묻혀 있는 동네까지 갔다왔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맞은 첫 명절. 우리 식구는 놀러온 사람들처럼 아버지가 묻혀 있는 동네까지 갔다왔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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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날 아침, 친척들도 왔다. 다들 아버지 사진이 있는 제사상을 보고는 울컥했다. 아버지가 다른 세계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자리. 제사는 그러려고 지내는가 보다. 당숙 어른이 아버지 사진에 대고 후손들 잘 되게 해주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살아있을 때처럼, "걱정허들 말어. 다 잘 될 거여. 안 되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라고 했겠지.

그날 점심에는 큰시누이의 아들인 큰조카와 작은조카 부부들도 왔다. 우리 남편은 아버지처럼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도 꼬추가 떨어질 일이 없어"라는 말은 안 한다. 그냥 밥상도 차리고, 설거지도 한다. 작은조카가 자기 색시에게 "삼촌이 설거지 한다"고 말했다. 조카며느리가 일어섰다. 남편은 시외삼촌이니까 근엄하게 말했다. 가서 쉬라고.

오십 살을 바라보는 남편, "명절 힘들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몸도 고되고, 돈도 많이 든다고. 잘 사는 작은할아버지에게 세뱃돈 받으려고 정성껏 절을 하던 어린 날이 그립다고 했다. 남편도 조카손주가 여섯이나 있는 할아버지. 부자하고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조카며느리들 대하는 거 보면, "제규(우리 큰애) 색시 앞에서는 절대로 부엌에 안 들어가"라는 맹세도 못 지킬 것 같다.   

나는 밥상을 걷으며 물었다.

"여보, 하현(큰조카며느리)이랑 단비(작은조카며느리)랑 '남의 집 귀한 딸'이라서 설거지 못 하게 하는 거야?"
"그런 생각 안 해 봤는데? 그냥 하는 거야. 누가 해도 상관없으니까."

밥하는 우리 집 남성동지들. 큰애와 남편, 그리고 꽃차남.
초등학교 1학년인 꽃차남도 여덟 살 때부터 가끔 쌀 씻어서 밥 정도는 한다.
 밥하는 우리 집 남성동지들. 큰애와 남편, 그리고 꽃차남. 초등학교 1학년인 꽃차남도 여덟 살 때부터 가끔 쌀 씻어서 밥 정도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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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며느리는 남의 집 귀한 딸, #명절 음식 준비, #부엌에 들어가도 꼬추가 떨어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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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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