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에서 서울은 그야말로 커다랗습니다. 모든 고장에서 모든 길은 서울로 이어집니다. 전국 어디에서나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고, 서울에서는 또 전국 어디로든 가는 버스길이 있어요. 이와 달리 시골에서는 바로 이웃한 다른 고장으로 가는 버스길조차 없기 일쑤입니다.

겉그림
 겉그림
ⓒ 거북이북스

관련사진보기

이를테면 제가 사는 전남 고흥에서는 보성이나 장흥으로 가는 버스길이 없다시피 합니다. 고흥에서 보성하고 장흥은 바로 이웃입니다만, 벌교를 거쳐서 돌아가야 합니다. 게다가 이쪽 시골에서 저쪽 시골로 가는 길은 무척 멀어요. 이를테면 전남 고흥에서 충북 음성으로 가는 길은 아홉 시간 남짓 걸려요. 이리저리 돌고 돌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고흥에서 서울로 가고서, 다시 서울서 음성으로 가면 외려 '고흥에서 음성으로 바로 가려는 길'보다 몇 시간 적게 듭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한국은 서울공화국일 수 있습니다. 모두 서울로 모이고, 모두 서울하고 얽히며, 모두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셈이거든요. 최호철 님이 만화 또는 그림으로 빚은 <을지로 순환선>(거북이북스)은 바로 이 서울공화국 언저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 사는 땅] 도시는 자신을 세워 준 이들의 터전을 숨기며 자란다. 더 커지면 아예 바깥으로 밀어내 버린다. (23쪽)

[3월의 초등학교 앞] 아직 새싹이 돋지 않는 아직 잎사귀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 아래 햇병아리 신입생들을 목빼고 기다리는 어른들. 사랑으로, 걱정으로, 장삿속으로. (26쪽)

처음부터 우람한 몸뚱이는 아니었을 서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다가 시나브로 우람한 몸뚱이가 되었을 테지요. 커지는 도시 서울은 차근차근 '이 커다란 도시를 세워 준 이'를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이른바 재개발이요, 철거입니다.

오늘날 서울이나 둘레 도시에서는 초등학교 마칠 무렵 수많은 사람과 버스와 자동차가 학교 앞에 모인대요. 아이를 데려가려는 어버이가 있고, 학원버스가 매우 많아요. 아이들한테 군것질거리를 팔려는 이도 많고요. 학교 앞은 엄청난 '장사판'이 된답니다. 학교를 둘러싸고 수많은 학원이랑 가게가 얽힙니다.

속그림
 속그림
ⓒ 최호철

관련사진보기


[청계천 복원공사] 이제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물 없는 개천에 지하수를 끌어다 흐르게 할 때쯤이면 주변의 오래된 것들은 모두 떠밀려 가겠지. 저 떠나가는 노점상처럼. (50쪽)

[을지로 순환선] 끊임없이 거대한 도시의 일터와 쉼터 사이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맴도는 을지로 순환선. (55쪽)

군사독재 정권이 올린 청계천 고가도로가 헐렸습니다. 가난한 집들을 가리려는 속셈으로 세웠다는 높직한 고가도로인데, 이 고가도로가 헐린 자리에 '전기로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을 마련했다지요. 숲에서 숲다이 흐르는 냇물이 아닌, 발전소를 돌리고 전기를 끌어들이는 돈으로 땜질한 냇물입니다. 그래도 이만 한 냇물이 어디랴 싶으니, 청계천 둘레는 새로운 공원 구실을 합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은 빙글빙글 돈다고 해요. 어느 모로 보면 쳇바퀴처럼 돌아요. 그래도 지하철 2호선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오기는 하지요. 다른 지하철이나 전철을 탔다가 졸아서 잠들면 그만 다른 끝까지 가 버리고 말아 큰일이 나요.

속그림
 속그림
ⓒ 최호철

관련사진보기


[도시의 함박눈] 네모난 도시에 동글동글 눈이 내린다. 쌓일 곳도 스며들 땅도 없이 지저분하게 질척대다 하수구로 녹아 내릴 눈이 예쁘게 흩날린다. (60쪽)

[안국동 일본 대사관 앞 663번째 수요집회] 할머니들의 소리가 빗속의 눈물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그날까지. (108쪽)

눈은 시골에만 내리지 않습니다. 눈은 숲이나 바다에만 내리지 않습니다. 눈은 아스팔트 찻길에도 내리고, 높다란 아파트나 주상복합에도 내립니다. 비록 도시에서는 눈을 몹시 성가시게 여겨서, 눈이 내리기 무섭게 몽땅 녹여 없애야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맞이하는 눈은 학원과 입시로 지친 아이들한테 한 줄기 숨통을 틔워 줍니다. 이 겨울에 맞이하는 눈은 '때로는 조금 천천히' 가자는 생각을 북돋아 주어요.

최호철 님이 <을지로 순환선>을 그릴 무렵만 해도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는 663번째였다는데, 어느새 1000번을 넘겼습니다. 이동안 '소녀상'이 일본 대사관 둘레에 서기도 합니다. 비록 제대로 뉘우치는 정치권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대사관 앞 소녀상을 몹시 거북하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할머니들 작은 손길이 모이고 퍼져서 '소녀상'이 섭니다. 평화로운 삶과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따사롭고 너른 마음이 뿌리를 내리려 합니다.

속그림
 속그림
ⓒ 최호철

관련사진보기


[마을버스 종점]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어도 여기가 종점인걸요. 자, 빨리 내려서 올라가셔야죠. 내일 새벽 또 일하러 나오려면요. (126쪽)

[공부] 책상보다도 작은 하늘이지만 이렇게라도 잠깐씩 맛을 보면 몇 시간 버티는 건 문제없다구. (132쪽)

만화책하고 그림책 사이를 가만히 넘나드는 '그림이야기'인 <을지로 순환선>입니다. 우리네 살림이, 서울살이가, 이 나라 이 삶터가, 또 을지로 순환선 같은 도시 얼거리가, 여러모로 만화와 같고 그림과 같지 싶어요. 마치 만화에서 보는 듯한 이야기가 흐르는 삶이요, 그리고 참말 그림으로 그리는 듯한 따사롭거나 아름답거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웃음이 피어나거나 즐거운 수많은 이야기가 넘실거리는 나날입니다.

먼발치 아닌 곁에서 지켜보면서 붓을 쥐는 만화쟁이 또는 그림쟁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구경꾼 아닌 이웃이나 동무로서 바라보는 눈길로 붓놀림을 펼치는 그림쟁이 또는 만화쟁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속그림
 속그림
ⓒ 최호철

관련사진보기


더없이 많은 사람이 복닥거리는 서울 한복판이나 한켠에서 태어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하고 가까운 시골이나 서울하고 매우 먼 시골에서 피어나거나 샘솟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더 높거나 낮은 자리가 없이, 더 크거나 낮은 사람이 없이, 서로 어우러지는 마을이 되고 고장이 되고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은 서울대로 아름답게 맞이하는 하루가 되고, 시골은 시골대로 사랑스럽게 피어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 아닌, 아침마다 기쁜 웃음으로 깨어나는 삶이 되면 좋겠어요. <을지로 순환선>은 바로 이 같은 꿈을 품으며 붓을 쥔 아저씨 한 사람이 따사롭고 살가운 손길로 들려주는 노래가 담긴 만화그림책 또는 그림만화책이리라 봅니다.

덧붙이는 글 | <을지로 순환선>(최호철 글·그림 / 거북이북스 펴냄 / 2008.2.27. / 18000원)



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이야기 그림

최호철 지음, 거북이북스(2008)


태그:#을지로 순환선, #최호철, #서울, #만화책, #삶노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