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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 김기춘뎐' #4# "난 깨끗한 비단옷 입은 아낙네" 김기춘 '악의 평범성' 보여주다)

"김영삼이 국가부도로 국가경제를 무너뜨렸다면, 박근혜는 국기문란으로 국민의 영혼을 '결딴'냈다. 김영삼은 박정희 유신정권이 자신을 제명하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어록을 남겼다. 박정희 딸에게는 '칠푼이'라고 독설을 날렸다. 왜 그런 비판과 독설을 했는지 이제 와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박정희가 비명횡사한 10월 26일이 지나고, 우리는 지금 국민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나라가 바로 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부닥쳤다."

필자는 지난해 10월 26일 "김영삼의 '칠푼이' 독설... 이제야 이해가 된다"(http://omn.kr/lffo)에서 이렇게 썼다. 10월 26일은 박근혜 정권의 '조종'을 울린 날이다. 그 이틀 전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을 한 날, JTBC는 최순실의 국정 개입 의혹을 입증하는 태블릿PC 문건을 공개했다. 이튿날 박 대통령은 다시 카메라 앞에 서서 "일부 연설문과 홍보물 표현 등에서 도움받은 적 있다"고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미르-K스포츠재단과 최순실-차은택 자택 등을 압수수색하고, 다음날 '최순실 의혹'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했다.

검찰이 대통령이 지시해 만든 재단을 압수수색한 것은 '조종'을 울리는 신호탄이었다. 공교롭게도 10월 26일은 1979년 아버지 박정희가 심복의 총탄에 쓰러진 날이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동향 출신이고 은인이며 상관이다. 친형제만큼 가까운 관계다. 그러나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10.26사건 촉발한 부마항쟁의 뇌관은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10월 27일자)와 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의 중간수사결과 발표(10월 28일자)를 전한 동아일보 1면. 전두환 합수본부장과 소복 입은 박근혜의 사진이 눈에 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10월 27일자)와 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의 중간수사결과 발표(10월 28일자)를 전한 동아일보 1면. 전두환 합수본부장과 소복 입은 박근혜의 사진이 눈에 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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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사건 이틀 후인 10월 28일 계엄사 합수본부장(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대통령 시해사건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동아일보> 1면에는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 전두환 소장의 사진과 소복을 입고 빈소에서 분향하는 '큰영애 박근혜'의 사진이 실렸다. 이때만 해도 '박정희의 양아들'로 불린 전두환 소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또 한 번의 쿠데타로 집권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최종수사결과 발표에선 김재규가 대통령이 되려는 망상을 갖고 대통령을 시해했다고 발표했다.

10.26사건이 발생한 원인에 대한 분석은 여러 갈래다. 차지철과의 알력과 박정희에 대한 불만의 표출(합수부 발표), 부마사태 현장 시찰 후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에 회의(김재규 주장), 박정희의 핵개발 추진에 따른 미국의 개입-조장설(시중 음모설) 등이다. 그러나 YH사건-김영삼총재 제명파동-부마항쟁으로 이어진 역사의 흐름을 보면, 부마사태가 격화되면서 위기에 직면한 정치권력의 내분이 빚은 필연적 귀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건 발생 당시의 정황을 보면, 김재규는 사건 당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궁정동 별관에 대기시키고,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차지철 살해를 암시하는 등 사전에 '거사'를 기획했다. 그럼에도 만찬 도중에 박정희가 부마사태를 중앙정보부의 정보부재 탓으로 돌려 김재규를 질책하고, 차지철 또한 과격한 어조로 그를 공박한 것이 김재규의 '거사'를 결행토록 만든 비등점이 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부마항쟁의 진압을 둘러싸고 권력 내부에서 온건한 대응이 정국혼란을 키웠다는 강경론(차지철의 "탱크로 확 밀어버리자")이 득세한 가운데, 당일 박정희-차지철이 김재규를 면전에서 질타한 것이 그의 분노의 방아쇠를 격발시킨 것이다. 그 긴박했던 상황 속에서 김재규가 내뱉은 "각하, 이 따위 버러지 같은 놈(차지철)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정치가 올바로 되겠습니까?"라는 격정의 쓴소리 속에 10.26사건이 발생한 배경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10.26사건은 박정희 1인독재 유신체제의 장기화에 따른 정치-경제적 모순이 반정부 시위로 폭발한 가운데 위기를 맞은 권력 내부의 암투와 맞물려 빚어진 필연적 귀결로 볼 수 있다. 그것을 촉발한 닷새 간의 부마항쟁을 격발시킨 뇌관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국회의원직 제명파동이었다. 결국, 박정희가 김영삼이라는 '닭의 모가지'를 비튼 것이, 김재규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원인이 됐다.

박정희 다시 부활시킨 김영삼, 김기춘은 김영삼 당선 일등공신

지난 1989년,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이 검찰청에서 현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지난 1989년,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이 검찰청에서 현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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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죽음으로 1972년 10월 17일(대통령 비상조치)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꼬박 7년간 지속된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인간 박정희'는 심복이 쏜 '흉탄'에 맞은 비극적 죽음으로 인해 신화가 되었다. 유신체제에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행하다가 유폐된 '유신공주 박근혜'도 그와 더불어 유사 신화가 되었다. 그로부터 18년 뒤에 박정희를 부활시킨 것은 단군 이래 최대의 환란(換亂)을 초래한 김영삼 정부였다.

IMF 환란은 70년대부터 누적된 재벌 특혜와 정경유착, 관치 금융이 핵심인 박정희 성장모델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부실한 국정운영 책임이 면제될 순 없었다. 10.26 이후 유폐된 '유신공주'박근혜가 정치의 전면에 나선 계기도 국가 부도 위기였다. 고도성장을 겪다가 난생 처음 마이너스 성장과 환란으로 대량해고에 직면한 대중은 다시 박정희를 소환했다. 박정희를 죽인 것도 김영삼이지만 부활시킨것도 김영삼인 셈이다.

그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은 '우리가 남이가'로 영남 100만표를 더 결집시켜준 고향(거제시 장목면)과 학교(경남고) 후배 김기춘이었다. 김기춘은 유신헌법을 기초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 등 초헌법적 권한과 정수의 1/3에 해당하는 국회의원 및 법관의 임명권을 부여함으로써 대통령 1인독재를 가능케 해준 악법이었다. 김기춘은 나중에 김영삼이 '칠푼이'라고 독설을 날린 박근혜의 비서실장이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박정희는 유신체제 7년을 포함해 무려 18년을 통치했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그에게 원한을 산 사람도 많지만 신세를 진 사람도 많다. 박근혜 정부에선 박정희 시절에 복무한 공직자들의 2세들이 유난히 많이 기용되었다. 이른바 '박정희 키즈'들이다. 서승환 국토교통부장관(서종철 전 국방장관의 아들)과 류길재 통일부장관(류형진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 국민교육헌장 초안 작성), 그리고 김준경 KDI 원장(김정렴 전 비서실장 아들)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인사는 김용준 총리후보자의 낙마와 윤창중 대변인의 성추행 등으로 초장부터 삐걱거렸다. 2세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통솔할 사령탑이 필요했다. 허태열 비서실장이 조기 하차하고 감기춘이 유신공주의 비서실장으로 등장한 배경이다. 5.16장학생 출신인 그는 신직수 법무장관밑에서 유신헌법 초안을 기초했고, 그후 부장검사로 승진해 중앙정보부에서 대공수사국장으로 5년간 근무했다. 그런데 1979년 청와대로 옮겨 드디어 최고 권력자의 지근 거리에서 법률비서관으로 막 비상할 찰나에 10.26사건으로 날개가 꺾였다. '유신공주'도 그때 유폐되었다.

'박정희 키즈'와 '올드 보이' 김기춘의 귀환

절정기에 날개가 꺾인 동병상련의 아픔을 공감했기 때문일까? 일흔다섯의 김기춘을 비서실장으로 앉힌 것은 국민에게 뜻밖의 인선이었지만 유신공주에게는 '뜻한 바'였다. 누가 뭐래도 박근혜는 '박정희의 후광'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대표적 2세 정치인이다. 박정희 유신체제에 복무한 공직자의 2세들을 지휘-통솔하는 데는 유신헌법을 기초하고 유신체제를 유지한 '유신 본당'의 귀환이 제격이었다.

김기춘은 이미 2007년 대선 한나라당 경선 때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위원회부위원장을 맡아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참여했다. 언론은 그와 김용갑 전 의원,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등 박근혜를 도운 원로 자문그룹을 '7인회'라고 불렀다. 특히 김기춘은 2013년 7월 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맡아 박정희-박근혜 2대에 걸쳐 '윗분의 뜻을 받든'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사람들이 '올드 보이'의 귀환을 우려한 것은 박정희 시대로의 회귀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 우려는 반대세력을 긴급조치로 억압했던 박정희 DNA(유전자)가 다시 발현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국의 주요 고비마다 김기춘을 비롯한 7인회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당사자들은 어디까지나 '자문'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분명한 사실은 7인회 멤버 중에서 유신공주의 지근거리에서 직접 국정에 참여한 '올드 보이'는 김기춘이 유일했다는 점이다.

그 '올드 보이'가 비서실장으로 재직한 동안 청와대에서는 대기업을 갈취해 미르-K스포츠재단을 만들고,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 '블랙 리스트' 뿐만 아니라 '적군 리스트'까지 만든 사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수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또한 SBS가 입수한 문체부 블랙리스트(타소관 확인리스트)에 따르면, 문체부는 국정원의 첩보로 검증을 받아 리스트를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의 골방에서 기획된 이런 은밀한 정경유착과 문화공안 통치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정보정치와 철권통치의 변주곡이다. 반대세력에 대한 직접적 탄압이 배제와 차별로 세련(?)되게 바뀌었을 뿐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른바 문화융성을 4대 국정지표로 삼아 주요 정책 집행에 수천억 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하지만 김기춘 비서실장은 단지 '윗분'을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적'이나 '불순세력'으로 규정하고 정부예산 집행 대상에서 아예 제외함으로써 국민세금을 사유화한 것이다. 정부에 대한 비판과 이념을 기준으로 국민을 내편과 네편으로 가르는 이런 배제와 차별의 공안통치는 본질적으로 '72년 체제'의 산물이다.

72년체제... 일-중은 국교 정상화, 남북한은 독재 강화해 국민 탄압

[표] '72년 체제'를 만든 사건들
 [표] '72년 체제'를 만든 사건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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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 교수(서울대 사회학과)에 따르면, 72년 체제는 "정치적으로는 유신,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정책, 조세 및 복지정책에서는 소득세와 기업 부담을 줄이고 간접세에 의존하는 저부담 저복지 체제가 도입된 해"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도 유신체제라는 용어는 사용하지만, 장 교수의 말처럼 72년체제는 학문적 시민권을 얻은 적이 없다. 72년 체제는 오히려 국제정치에서 일-중 또는 중-일 관계를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한다.

일-중 관계에서 72년 체제는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2. 21)에 이은 다나카 일본 총리의 중국 방문(9. 25)으로 전격적인 일-중국교정상화(9. 29)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 70년대 초 '아시아는 아시아의 손에 맡긴다'는 닉슨 독트린과 함께 찾아온 데탕트는 주한미군 철수론과 함께 한반도에 충격파를 던졌다. 이때 국제정세 변화의 흐름을 읽은 중국은 대만을 축출하고 UN에 가입한 이후 개혁개방으로 선회한다. 일본은 미-중 관계가 곧 정상화될 것임을 알고 재빠르게 미국보다 먼저 중국과 수교하게 된다.

남북한도 해빙의 흐름을 타고 분단 27년만에 남북 직접 대화로 7.4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는 '국내용'이었음이 머지 않아 드러났다.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궁정동 안가에  '풍년사업'(10월유신) 팀을 가동한 것은 7.4공동성명보다 두 달 앞선 5월 중순께였다. 북한 역시 그해 4월에 김일성에게 이중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4.15를 '민족적 대명절'로 제정해 탄생 60주년기념 행사를 개최하는 등 김일성 우상화를 시작했다.

박정희는 그해 10월 17일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이어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11. 21)해 유신헌법을 제정-공포하고,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사실상 종신 대통령제의 시작이었다. 김일성 역시 비슷한 시기에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12. 25~28일)를 개최해 새 헌법을 공포하고, 주석제를 신설해 국가주석에 올랐다. 북한은 김일성 유일체제로, 남한은 종신 대통령제로 독재정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데탕트와 국민의 통일 염원을 악용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국과 일본이 데탕트라는 국제정세 변화의 흐름을 읽고 치밀한 외교전략으로 자강의 길을 가는 동안, 남북한의 위정자들은 국가의 백년대계보다는 정권을 강화하는 데 급급했다. 그들의 권력의지는 남북간의 적대적 공생-의존 관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작동했다. 북한체제는 경쟁자에 대한 숙청과 술타니즘(Sultanism)을 통해 김일성 우상화를 강화했고, 남한체제는 북한 위협을 전제로 '불순세력'에 대한 탄압을 합리화했다. 이처럼 일-중관계의 72년 체제와 남북한의 72년 체제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87년 체제가 72년 체제에 갇혀 있을 가능성

장 교수가 '72년 체제'를 생각한 배경은 흔히들 거론하는 87년 체제가 실제로는 72년체제에 갇혀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지난해 <경향신문>에 "87년 체제라는 틀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다"면서 자신이 72년 체제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이렇게 썼다.

"민주화 이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한국인들 중에서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가치를 내놓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왜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가. 세계 최고 수준의 성장제일주의와 황금만능주의는 왜 사라지기는커녕 갈수록 두드러지는가. OECD에서 압도적 1위인 노인빈곤율과 노인자살률에도 불구하고 고령유권자의 정치적 충성도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복지로 고통받으면서도 복지를 늘리자고 하면 반대가 더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이 바로 '87년 체제가 72년 체제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다. 사람들은 87년 체제를 이야기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른바 386세대들의 열망과 성취만을 담은 역사 해석이고, 1979년 박정희 개인의 사망으로 72년체제가 끝난 것처럼 보인 것이 착시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론이다.

"1979년 박정희라는 개인의 사망과 더불어 이 체제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만약 착시였다면, 그러한 착시를 더욱 부추겼던 것은 두 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나는 72년 체제가 하나의 제도가 되지 못하고 박정희라는 개인의 영웅담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그가 사망하자 72년 체제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다른 하나는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독재자의 드라마틱한 등장이었다. 그는 광주라는 무대를 통해 선명한 혈흔을 묻힌 채 등장했고, 그것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72년 체제가 끝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변주되고 내면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박근혜 탄핵을 지지하는 가운데서도 탄핵에 반대하는 자칭' 애국보수 세력'이 태극기와 함께 미국 성조기를 들고 나서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젊었을 때 박정희의 자주국방에 박수를 쳤던 이들이 나이 들어 노무현의 전시작통권환수는 기를 쓰고 반대하고 사드(THAAD) 배치는 찬성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재심 무죄사건 100건 중 대다수가 72년 체제의 산물

72년 체제가 내세운 핵심 가치는 '반공'과 '안보'였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위해 유신헌법을 선포할 때도, 중화학공업정책을 통한 자주국방을 강조할 때도, 방위세(직접세)를 신설하고 부가가치세(간접세)를 도입할 때도 안보가 우선이었다. 72년 체제 안에서 국가안보는곧 정권안보였다.

그러나 72년 체제 안에서 간첩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40년 뒤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있다. 언론에 보도된 무죄확정 재심 사건만 100건에 이른다. 그중 상당수는 72년 체제 안에서 안보를 팔아 조작된 사건이다. 이처럼 김기춘이 기초한 유신헌법과 비상대권(긴급조치권)은 이미 역사적 심판을 받았을뿐만 아니라, 사법적으로도 악법이었음이 증명되었다.

72년 체제에서 조작된 간첩 가운데 일부는 유죄판결 당시 사형을 당했거나, 옥사를 했거나,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일부는 감시와 냉대 속에서 간첩의 자식 또는 부모로 야만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72년 체제를 담당했던 박정희 정부가 '나쁜 정부'였음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실은 차고 넘친다. 그중에서도 특히 국가배상금관련 통계자료를 보면, 박정희 정부가 역대 정부 가운데서 공권력의 불법행위를 남발한 가장 '나쁜 정부'였음을 알 수 있다(관련기사는 다음 편에 이어짐).

국가예산과 국민세금을 동원한 배제와 차별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반(反)한다. 반헌법이다. 박근혜의 오늘은 '박정희 신화와 그 후광'을 빼놓고 설명이 안 된다. 김기춘은 '대를 이은 나쁜 정권 충성하기'의 표상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와 김기춘은 '우리 안의 박정희'가 키운 괴물일지도 모른다. 79년 10월 김재규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듯이, 우리는 지금 '우리 안의 72년 체제'를 죽이기 위해 '우리안의 박정희'가 키운 박근혜와 김기춘의 목을 비틀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다음 편에는 국정원의 대외비 자료를 근거로 박정희 정부가 얼마나나쁜 정부였는지를 보여주는 신김기춘뎐 마지막회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국가정보원 대외비 자료와 직원 인터뷰를 토대로 '국정원 흑역사'를 파헤친 <시크릿파일 국정원>(메디치미디어, 2016)의 저자로,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본부장(편집국장)을 지냈다.



태그:#김기춘, #박정희, #72년체제, #유신헌법, #10.26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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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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