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건물주들도 나서진 못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위기감을 많이 느껴요. 경쟁력 있는 임차상인들 사라지면 결국엔 상권 자체가 주저앉아 버리잖아요. 결국 장기적으로는 손해죠. 그런데 이렇게 시에서 중재 역할을 해주니까 반기는 사람들이 많아요."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중앙로의 한 부동산중개소. 점포 주인인 이선용씨는 한쪽 벽면에 걸린 지적도의 건물 십여 개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짚어나갔다. 흔히 '이대 앞'이라 불리는 대현동 일대 상가거리에서 서울시와 지난해 '장기안심상가' 협약을 맺은 건물들이다.
이 협약을 맺은 건물주는 리모델링 지원을 받는 대신 5년 동안 마음대로 임대료를 올릴 수 없게 된다. 언뜻 보면 건물주에게 손해일 것 같지만 현장의 반응은 반대다. 이씨는 "뒤늦게 알고서 자기도 참여하고 싶다고 하는 건물주들이 많다"면서 "이 정책으로 이대 상권이 이제 좀 안정적으로 살아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5년간 임대료 묶는 대신 최대 3000만 원 리모델링 지원장기안심상가란 서울시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도심 지역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개발이 가속되고 임대료가 오르면서 원주민이 지역 바깥으로 밀려나는 현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5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정책이다. 건물 안에 상가임대를 하고 있는 건물주가 5년 동안 임대료를 동결, 혹은 3% 전후로 소폭 인상하겠다고 약속하면 서울시가 최대 3000만 원까지 해당 건물의 리모델링 비용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서울시가 낸 예산으로 건물주는 리모델링 비용을 얻고, 임차인은 별도의 부담 없이 최장 5년 동안 마음 편히 장사할 수 있게끔 하자는 게 정책 취지다. 임차인의 사정으로 임대차계약 연장을 포기하면 다음 임차인에게 협약 내용이 자동으로 승계된다.
서울시는 신청 및 자체 심사과정을 거쳐 지난해 35개 상가 건물, 총 128개 상가를 장기안심상가로 선정했다. 이중 절반 가량의 건물이 신촌·이대 상권으로 분류되는 서대문구 대현동과 창천동 일대에 몰려 있다. 이곳 상인들이 발빠르게 움직인 탓이다.
왜 이곳일까. 이씨는 "한 번 몰락을 겪어본 곳이라 그렇다"고 입을 뗐다. 이대 앞은 한때 서울 길거리 패션의 중심지였으나 2000년대 초 인터넷 쇼핑몰의 등장과 함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5년 메르스 사태 이후로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크게 줄어 대로에서 떨어진 건물에서는 상가 공실도 속출했다. 결국 지난해 임대료가 전성기의 40~50% 수준(면적 16.5~19.8㎡ 기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75만 원)으로 뚝 떨어지면서 상가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이대 일대에서 이같은 과정을 지켜본 이씨의 지론은 좋은 상인들이 걱정없이 장사할 수 있어야 지역에서 경제 선순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건물주들도 실력과 특색을 갖춘 가게들이 많아야 상권이 살아나고 상생이 가능하다는 것을 체감했다"고 설명했다.
"홍대 가보면 큰길에는 대기업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다 들어찼잖아요. 근데 상권은 그럼 죽어요. 어딜가나 볼수 있는 프랜차이즈 가게들만 있으면 더 이상 재미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오지 않죠. 이대는 그 과정을 한 번 겪었고요. 건물주들에게 월세 많이 내는 대기업 안테나샵들은 사람 줄면 다 떠나요. 결국 건물주들도 계속 월세 받고 살거라면 지속가능한 상생을 고민해야 하죠. 세입자가 5년은 장사할 수 있게 한 집 두 집이 아니라 한 상권에서 여러 건물이 보장해줘야 해요."이 지역에 건물을 가지고 있는 류아무개(47)씨도 장기안심상가 정책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 역시 리모델링 비용 1000만 원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지난해 서울시와 의무이행약정을 맺었다. 류씨는 "35년 된 건물이라 비 많이오면 곤란했는데 이번에 옥상, 화장실, 외벽방수 공사를 싹 했다"면서 "건물주도 좋고 임차인도 좋은 정책"이라고 말했다.
"장사 잘 하면 노력한 만큼 가져갈 수 있게 해야"건물주들이 이 정책을 반기는 이면에서는 지리적인 특성이 관찰된다. 선정된 상가들은 대부분 지은 지 30년 이상 된 건물들로 구성된 구도심에 위치해 있다. 일반 벽돌 건물의 경우 30년이 넘으면 기본적으로 누수 등의 문제가 생기는데, 공사 비용이 만만치 않아 임대가 웬만큼 잘 되는 건물주가 아니고서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 리모델링 지원이라는 정책 내용이 이같은 오래된 건물 소유주들과 잘 맞아떨어진 셈이다.
신촌에서 1988년 준공된 3층 상가 건물을 운영하는 이아무개(46)씨는 장기안심상가 참여로 지원받은 2000만 원에 자기 돈 1300만 원을 합쳐 지난해 리모델링 공사를 마쳤다. 이씨는 "건물 외벽이 오래돼서 매년 벽을 타고 누수가 발생하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어서 대규모 외장공사를 했다"면서 "리모델링 비용 지원이 없었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씨만 이득을 본 것은 아니다. 현재 이 건물 1층의 임대료는 월 275만 원. 협약에 따르면 이씨의 건물을 임차하는 상인은 재계약을 할 때마다 3% 정도의 임대료 인상만 감당하면 된다. 신촌의 또 다른 건물에서 점포를 임차해 운영하고 있는 박아무개(38)씨는 "임차인들에게는 일단 장사가 잘 돼도 쫓겨날 위험이 적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장사를 안 해 본 사람들은 잘 모르는 부분인데 우리나라는 장사가 잘 되면 건물주가 그거에 비례해서 월세를 올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결국 남는 게 없게 되죠. 그런데 이 협약을 맺은 건물에 들어가면 그럴 위험이 없으니까 자기가 노력한만큼 가져갈 수 있잖아요. 그럼 손님을 대하는 상인들의 서비스도 그만큼 나아질 수밖에 없죠. 그렇게 상권이 활성화되면 결국 건물주, 임차인, 세금걷는 지자체 셋 다 이익이에요."
"임차인과 상생 꿈꾸는 건물주들...서울시가 설득해줬으면"5년 간 임대료를 전혀 올리지 않기로 협약을 맺은 건물주도 있었다. 김대식(52)씨는 "무작정 나만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생각에 흔쾌히 참여했다"면서 "이런 움직임에 건물주들이 다같이 동참하면 거리 전체가 더욱 좋아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씨의 건물은 요즘 '뜨는 지역'으로 꼽히는 성동구 성수동에 위치해 있다. 132㎡(40평) 넓이의 3개 층을 빌려주고 도합 월세 600만 원을 받는다. 애초 임대료도 주변 시세에 비해 저렴한 수준이다. 그는 "사업 실패해본 경험으로 이렇게 (임대료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저도 최근에 강남 도산공원 인근에서 월세 600만 원짜리 카페를 했는데 월세를 못내서 결국 3개월만에 접었어요. 강남에서 두 번 사업해서 두 번 다 실패했지요. 월세가 비싸면 자영업자가 정말 자기가 하고싶은 걸 못 만들어요. 맛에 투자를 해야하는데 월세에 투자하는 것만도 벅차니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그런 카페에 누가 가고 싶겠어요."김씨는 "사실 만나서 얘기해보면 나처럼 상생을 생각하는 건물주가 적지 않다"면서 "서울시가 이 정책을 확대하고 참여를 설득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임차인과 공생하는 마음을 갖고있는 건물주라도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 프랜차이즈 업체가 부르는 거액의 임대료 제안을 잘라 거절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김씨는 "30% 정도의 건물주만 이 취지에 동참한다면 나머지 70% 건물주도 임대료를 마음대로 못 올리고 주변 눈치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젠트리피케이션 해결에서 지자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상권의 흥망이 지역 구성원들의 공동자산과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씨는 "국가에서 리모델링 지원금을 주는 게 어렵다면 상가 번영회와 주민간에 연대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도 개발해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