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은 나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가톨릭대 강의는 화요일만 합니다. 그 외 날에 내가 스쿨 견학도 할 겸 세명대로 갈까요?"인터뷰 요청을 하자 흔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젊은 예비 저널리스트들을 만나고 싶다는 그의 말이 진심으로 들렸다. 17일,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을 방문했다. 이봉수 교수의 <언론과 한국사회> 강좌 중 '언론의 독립과 자유, 책임'이라는 주제에 맞춰 강의 앞부분 잠시 강단에 섰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언론인은 20여 명 청년 저널리스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언론인으로서 30년 생애를 풀어내기에 30분은 짧은 시간이었다.
21년 만에 '날조기자'로 매도우에무라 다카시는 기자는 1982년부터 30년간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일했다. 2014년부터는 고베쇼인여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새 출발을 할 예정이었으나 좌절됐다. 25년 전에 쓴 기사 하나 때문이었다.
1991년, 우에무라는 일본 언론 최초로 '위안부' 관련 보도를 했다. 우에무라의 최초 보도 이후 3일 만에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당시 한일 언론이 일제히 기사로 다뤘다. 아무 문제 없던 이 기사는 2012년 아베가 집권하고, 일본 내 혐한(嫌韓) 정서가 짙어지면서 문제가 됐다.
<주간문춘>이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가 아가씨들의 여자대학 교수로"(2014. 2. 6)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내자 우익의 집요한 공격이 시작됐다. 이들은 우에무라가 거짓 기사로 일본에 망신을 줬다고 주장했다. 고베쇼인여자대학교로 우에무라를 고용하지 말라는 항의 메일이 쏟아졌다. 가족들에 대한 비방도 이어졌다.
항의에 못 이겨 교수직은 포기했지만, '날조기자'라는 꼬리표와 가족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없었다. 다행히 일본 시민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우에무라를 돕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현재 그는 한국 가톨릭대학교에 초빙교수로 머물면서, 자신을 '날조기자'로 몰고 간 도쿄기독교대학교수 니시오카 쓰토무와 그의 글을 실은 <주간문춘> 발행처 문예춘추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1980년대 와세다대학에 재학하던 우에무라는 <아사히신문>에 독자 투고를 했다. '김대중을 석방하지 않으면 한일관계도 좋지 못할 거다'라고 주장한 서툰 글이 신문에 오른 걸 보니 신기했다. 신문기자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82년에 졸업하자마자 <아사히 신문>에 입사했다. 5년간은 '사쓰마와리(경찰서 출입)'를 했다. 회사 지원을 받아 한국 연세대학교에서 어학연수를 하게 된 그는 "사쓰마와리를 안 하니 살 것 같았다"고 말했다.
"1987년 한국은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서울은 마치 축제를 벌이는 것 같았지요. 정의감에 불타던 한국은 민주화 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를 이뤄냈습니다. 제가 대학 시절 구명운동을 한 김대중은 정식으로 정치 무대에 섰고, 형식적으로나마 언론 자유도 누렸지요. 이 시기 한국에 있어 행복했습니다."'위안부' 이슈를 만난 것도 이즈음이다. 사회 격변과 함께 '위안부'가 정치 이슈로 떠올랐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초대 대표를 지낸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 등 지식인들이 나섰다. 그러나 피해자 증언을 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에무라 기자는 "침묵의 시대"로 표현하며 "성폭력 피해자들도 증언하기 어려운 사회였다"고 설명했다. 수소문 끝에 1991년 여름 정대협이 피해 할머니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입수했다. 피해 증언을 한 테이프를 토대로 기사를 썼다. 3일 뒤에는 피해자의 정식 증언이 나왔다. 그렇게 '위안부'를 둘러싼 오랜 침묵의 장막이 걷혔다.
최근 일본 우익들은 이 침묵의 장막을 다시 드리우려 한다. 우에무라의 보도에 25년이 흐른 지금 반박을 가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우익들이 1991년 보도가 '날조'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우에무라가 당시 보도에서 '위안부'가 아닌 '정신대'라는 용어를 썼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 일본 언론도 '정신대'라 표기했고, 한국 정대협 역시 '정신대'라는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근거 없는 트집인 셈이다.
다른 이유는 첫 '위안부' 증인으로 나선 김학순 할머니의 기생학교 재학 경력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 할머니가 애초 증언할 당시 '기생학교에 재학했다'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당연히 다른 언론에서도 대개 이 내용은 누락됐다. 게다가 "김 할머니가 기생학교에 다녔다고 한들 '위안부'로 벌어진 인권침해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게 우에무라 기자의 생각이다.
"기자는 힘들어요. 그러니까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한편으론 진심 어린 충고가 담겨 있었다. 일본 우익의 공격으로 우에무라는 고초를 겪었다. 그를 '날조 기자'라 공격하는 일본 요미우리신문, 산케이신문 등 기자 5명이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 적도 있었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이란 무기가 있기 때문에' 인터뷰에 응했다. 2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했지만,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우에무라 기자는 "일본이 직시하고 반성해야 할 과거'와 '역사의 진실'이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딸까지 죽이겠다고 하면 정말 (기자 하기가) 힘들다"고 털어놨다.
일본 우익의 딸에 대한 공격은 집요했다. 중학생 때 중국어 스피치 콘테스트에서 수상할 때 사진, 고등학생 때 비핵평화운동가로 활동하며 북해도 대사로 제네바에 가게 돼 관청에서 찍은 사진 등이 올라왔다. 2014년 8월부터 미성년자인 딸의 사진이 공개되기 시작하자, 일본 사회에서 우익에 대한 비난이 일기 시작했다. 시민사회에서 100여 명의 변호사가 딸의 변호인단으로 나섰다. 악성 댓글을 단 누리꾼을 찾아 170만 엔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올 8월 최종 승소했다.
"좋은 일본 만들려는 나는 애국자"시민사회는 우에무라를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언론인들 도움이 컸다. 신문노조는 우에무라에 대한 공격을 언론인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조직적으로 도왔다. 일본 저널리스트협회도 그를 지지했다. <아사히신문> 내부뿐 아니라 다른 신문사 기자들도 그에게 힘을 실어줬다.
"국가 이익에 반하는 기사를 쓸 때 걱정되는 점이 있나요?" 학생의 질문에 우에무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국가가 아니라 인간의 이익, 인권의 이익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행동도 크게 보면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믿습니다. 일본이 어두운 역사를 인정해야 더 존경받는 국가가 될 테니까요. 저는 매국노가 아닙니다. 좋은 일본을 만들고자 하는 애국자입니다. 우익들은 '자랑스러운 일본'을 말하는데, 자랑스럽다는 건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부끄러움 없는 삶'은 우에무라의 이상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윤동주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서시' 중). 그가 '날조기자'라는 오명에 맞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에서 다시 기자로 돌아오라는 제안이 있었지만, '날조기자' 꼬리표를 달고 기자를 계속할 수 없는 데다 소송에 쓸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에 거절했다.
"지금 포기하면 날조기자란 오명을 벗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싸움을 포기할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저에겐 진실이라는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해줄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아사히신문> 시절 취재 일화를 들려줬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취재차 들른 그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게 됐다. 기사 송고를 해야 하는데, 당시는 필름카메라를 쓸 때라서 사진을 보내려면 현상할 곳을 찾아야 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사진 현상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걱정하고 있는데 눈앞에 큰 신문사가 보였다. 무작정 찾아간 신문사 안에는 마침 사진 기자가 있었다. 현상을 부탁하고 돈을 내려고 하니 "우리는 같은 저널리스트"라며 돈을 받지 않았다.
"이날 저널리스트 간에 국경 없는 연대를 느꼈습니다. 저널리스트는 진실보도에 있어서는 다 형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우에무라 기자는 저널리스트가 인권과 자유라는 가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형제이자 동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이 저널리스트를 희망하는 것이 정말 기쁘다고도 말했다.
"약한 사람을 탄압하는 것만은 용서하지 않는 언론인이 됐으면 합니다. 휴머니즘과 인권, 평화에 토대한 좋은 저널리스트가 되길 바랍니다."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엄청난 고초를 겪고 있는 중년 언론인의 당부였기에 더욱 묵직하게 들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