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 ⓒ 효형평전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을 읽었다. 이 책은 내가 속한 '망우리 인문학 가이드' 스터디 때문에 읽었는데, 첫 시간 주제가 '일본인'이라는 게 많이 불편했다. 개인적인 원한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싫다. 불편했다.
첫 페이지를 읽으며 야나기 무네요시와 관련된 인물인 걸 알고는 더 싫었다. 이런 심한 편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으니, 다쿠미와는 친해질 수 없을 거 같았다.
심지어 첫 챕터부터 칭찬 일색이라 거부감까지 들었다. '그래봐야 일본인일 뿐이다'라는 생각에 반쯤 접고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문장, '조선 옷을 입고, 조선 음식을 먹고, 조선인들 속에서 살았다'에서 첫 편견이 깨졌다.
나는 튀니지,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브라질에서 8년을 살았다. 남의 나라에서 남의 말을 하며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아는 한 사람으로 '어? 이건 쉬운 일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재원이나 이민자들은 21세기 평등과 민주의 기치 아래 살면서도 이상하게도 현지인들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산다. 어쩌면 내가 살았던 나라들이 다 제3세계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런 무시하는 마음으로 현지인과 어울려 현지인처럼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다쿠미가 살던 조선은 후진국이었고 심지어 식민지였지 않나.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조선말을 알아도 사용하지 않았을 것 같다. 더구나 너무나 조선인스러워 일본 순사들에게 검문도 받고 심지어 전차에서 "일어나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니, 진심으로 현지인처럼 살았나보다.
외국에 살 때 난 우리집에 일하러 오는 현지인 아줌마들에게 한국말과 한국음식을 가르쳤다. 현지인처럼 살기보다는 현지인을 한국사람처럼 만들려고 했다. 현지인처럼 산다는 건 겸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다쿠미는 참 겸손한 사람이구나...' '훌륭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쿠미는 조선옷을 즐겨 입고 조선의 음식을 먹으며 조선의 마음으로 살았다. 그러하였기에 조선 사람들 마음 속에서 살 수 있었다. 조선에서 조선인처럼 살았던 일본인은 죽어서도 조선의 흙이 되었다. 그는 40세 한창 일할 시기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옷을 입혀서 조선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조선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망우리 공원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 ⓒ 손안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수많은 조선인이 찾아왔고 서로 상여를 매겠다고 자청했다고 한다. 그는 유언대로 조선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이문동 공동묘지에 조선인들과 같이 묻혔다. 나중에 이문동에 길이 나면서 묘지는 망우리로 옮겨졌다. 망우리 그의 묘역은 임업연구원 퇴직자 모임인 '홍림회'에서 지금까지도 관리하고 있다.
두 번째 편견은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일본의 기독교인 수는 소수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이미 100년 전에 기독교인으로 삶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는데 많이 놀랐다. 일본인은 모두 다 '신도'를 믿을 것이라는 편견이 깨졌다.
더구나 그의 삶이 평신도 선교사라 평하여도 손색이 없는 삶이었다고 해 나를 많이 부끄럽게 하였다. 그는 정복민이었지만, 식민지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생활을 가치있게 여겨 평범한 장인이 만든 생활용품에서 예술적 가치를 찾아냈다. 그가 모으고 정리한 공예품들로 '조선민예관'을 만들었고, 이는 후에 '국립민속박물관'을 만들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명품 중심의 예술사에서 소외됐던 평범한 장인이 만든 불상과 그릇 등에서 미의 극치를 발견하고, 이런 평범한 공예품에 '민예'라는 이름을 부여한, 다쿠미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따뜻한 사람이다. 따뜻한 눈으로 민초들을 바라 보기에 그들이 가지고 향유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의 저서 <조선의 소반>에는 그의 공예관이 잘 드러나 있다.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휘한다. 어떤 의미에서 사용자는 완성자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하고 단정한 자태를 지니면서도 우리 일상 생활에 친숙하게 봉사하고 세월과 더불어 우아한 멋을 더해 가므로 올바른 공예의 표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공예는 일상생활에 사용될 때 완성된다는 말이다. 나는 그릇을 모은다. 예쁜 그릇을 보면 지름신이 강림하여 마음을 단단히 다잡지 않으면 충동구매를 일삼는다. 그렇게 모은 그릇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막상 쓰려면 깨질까 봐, 아까워서 사용하질 못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릇은 음식을 담고 있을 때가 가장 예쁘다. 사용자가 공예품의 완성자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쿠미는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공예품을 '민예'라는 이름으로 모았던 것이다.
세 번째 '일본인은 모두 제국주의자다'라는 편견이다. 일본인을 싫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이 우리 민족에게 자행했던 잔인한 일들이 오버랩이 되기 때문이다. 큰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해외생활을 시작하여 한국말도 서툴고 한국역사는 배워본 적도 없다.
그런 아이를 서대문형무소에 데리고 갔을 때였다. 단지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고문도구들을 보았을 뿐인데 아이가 일본에 반감을 가지는 것을 보았다. 가르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일본인들이 자행한 만행을 혐오하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과 일본인이 동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모든 일본인은 제국주의자이며 잔인한 고문 기술자라는 편견이 있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다. 알고 있다. 그래도 일본인은 다 똑같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다쿠미는 조선에서 살았다. 조선인의 삶을 보았고 우리의 독립투쟁도 보았다. 그가 우리민족의 편에 서서 같이 싸우진 않았지만 그는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진정한 코스모폴리타니즘(전 인류를 하나로 여기고 개인을 단위로 하는 세계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사상 - 네이버사전)을 실천하였다. 다쿠미의 저서 <조선의 소반>의 서문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늘 나와 가깝게 지내면서 보고 들을 기회를 만들어 주고,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 준 조선의 벗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그분께 이번 기회에 감사의 뜻을 표하며, 한층 더 친해지기를 바랍니다."
'한층 더 친해지기를 바란다' 그는 일본국민으로서의 우월감이나 자긍심으로 이 땅에 살지 않았다. 그의 생각의 기저에는 영토나 문화, 언어를 넘어서 인간존중과 사라지는 문화를 남기고자 하는 시대를 앞선 진정한 세계주의가 있었다. 같은 책의 서문에도 이런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는 조선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미 잊혀진 내용도 적지 않다. 이 책에 실린 사진을 보여주면 우리나라에 이런 훌륭한 물건들이 있었는가 하고 놀라는 청년들도 드물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 이러한 전통문화는 더욱 잊혀질 것이다."
1920년대에 이미 잊히고 있던 우리 전통문화의 가치를 그는 알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그의 기록 덕분에 우린 소중한 우리의 것을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저서 <조선의 소반>과 <조선도자명고>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네 번째 '일본인은 조선의 미덕과 장점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편견이다. 일본인의 식민사관은 아무리 좋은 감정을 가지려 해도 좋게 볼 수 없는 역사관이다. 우리민족을 중국에 종속된, 심지어는 일본에 종속 시켜 노예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술과 예술 모든 좋은 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일본인은 우리의 좋은 점을 볼 의사가 없다는 고정관념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다쿠미는 참 많은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같다. 그는 기생, 비구니, 아이들, 어른들, 심지어 부하 직원과도 친구가 되었다. 타국에서 현지인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삶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다쿠미에게 조선인 친구가 많았다는 것은 그가 조선의 미덕과 장점을 알려고 노력 하였고 이해하였으며 진심으로 사랑하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쿠미는 총독부 산하 임업시험장의 직원이었다. 그는 조선인 일꾼과 자주 숲을 거닐며 대화를 즐겼다고 한다. 어느 날, 조선인 일꾼과 대화 중에 "일부러 심은 씨는 딱딱해서 그해에는 발아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해나 되어야 싹이 틔지요. 그러나 산 속에 떨어진 씨는 자연스럽게 싹이 틔지요"라는 말을 듣고 씨를 자연 상태로 묻었다가 다음해에 씨를 뿌렸더니 그 해에 발아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사용되는 '노천매장법'의 발견이었다. 노천매장법은 잘 자라지 않는 종자를 노천에 모래와 섞어 묻어 두어 숙성 시키는 방법으로 싹이 빨리나게 하며 많은 종자에서 싹을 틔우게 하는 방법이다. 다쿠미가 최초로 보고 하였고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영묘법이다.
이 방법이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다쿠미가 조선인 일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었기 때문이다. 또 그 이야기를 적용하여 실제 실험을 해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적용하여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다쿠미는 열린 마음으로 조선에 대하여 알려고 노력하였고 알게 된 것을 생활에서 적용하려 하였던 사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일본, 일본인에 대한 편견이 많이 깨졌음을 느낀다.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어처구니 없는 억지 주장과 극우의 발현에도 불구하고 이젠 우리도 다쿠미처럼 마음을 열고 코스모폴리타니즘의 관점에서 서로를 알아가려고 노력해야 할 시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쿠미는 조선에서 조선인의 마음으로 살았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일본인을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 그의 삶이 한국과 일본에서 아름다운 열매로 익어가길 소망한다.
한줄 서평: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 속에 살다간 일본인, 한국의 흙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 다카사키 소지 저, 김순희 역, 효형출판, 200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