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대동여지도>의 포스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주제 의식으로 조직화 되지 않으면서 별 감흥을 주지 못하는 영화였다.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포스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주제 의식으로 조직화 되지 않으면서 별 감흥을 주지 못하는 영화였다. ⓒ CJ엔터테인먼트


제작비 이상의 흥행 수입을 거두는 것이 목표인 상업 영화에서 기획은 필수적입니다. 관객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것을 공략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일반적인 소비재를 만드는 회사에서 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타깃이 되는 관객층의 취향과 욕구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지닌 영화를 만든 다음, 효과적인 마케팅을 통해 그 영화의 장점을 부각해야 하지요.

강우석 감독의 신작인 이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 역시 상업 영화로서 기획된 영화입니다. 박범신 작가의 2009년 작 소설 <고산자>를 원작으로 삼았지만, 고산자가 지도 제작에 매달리게 된 트라우마를 설명하는 에피소드와 주요 캐릭터들의 이름, 대동여지도 완성 전후 시점을 다룬다는 것 등이 비슷할 뿐, 전체적인 방향 설정과 분위기는 다릅니다.

면면은 분명 훌륭한데...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한 장면.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한 김정호의 여정을 뒤쫓는 카메라는 우리나라 곳곳의 수려한 풍광을 담아낸다.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 땅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샘솟지만, 그때 뿐이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한 장면.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 위한 김정호의 여정을 뒤쫓는 카메라는 우리나라 곳곳의 수려한 풍광을 담아낸다.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 땅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샘솟지만, 그때 뿐이다. ⓒ CJ엔터테인먼트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흥행 영화가 되기에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현대 지도에 맞먹는 정교한 지도인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가 주인공이고, 김정호의 발길 따라 아름다운 우리 산하를 스크린에 담아냈으며, 김정호의 지도를 욕심내는 권력층도 등장합니다. 또한, 검증된 배우들이 출연하였으며, 관객들이 부담 없이 볼 수 있도록 곳곳에 유머가 가미되어 있고, 고산자의 절절하고 애끊는 부성애가 강조돼 있습니다. 심지어 독도 문제도 등장합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딱히 재미가 없습니다. 어떤 주제 의식을 중심으로 탄탄하게 잘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데 모아 놓기만 했다는 느낌을 받을 뿐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속담이 저절로 떠오를 정도예요.

극의 중심을 잡아 줄 인물들 간의 대립 구도가 좀 더 명확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대원군과의 권력 다툼에 김정호를 끌어들여 박해하는 것은 안동 김씨 가문이지만, 김정호의 진정한 상대는 대원군입니다. 그런데 대원군은 김정호의 지도 작업은 인정하고 지지하면서, 지도를 활용하는 방식에 견해차가 있는 정도로만 태도를 결정하는데 그칩니다. 이렇게 대립 구도가 흐지부지되면서 결말은 대동여지도에 독도를 넣기 위한 김정호의 노력 쪽으로 방향을 틀지요.

박범신의 원작 소설에서 고산자 김정호가 문제를 제기하는 대상은 조선의 무능력한 사회 지배층입니다. 잘못된 지도를 줘서 그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현감이 나중에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이 되어 자신을 붙잡아 놓은 것을 보며 기가 막혀 하고, 천주학을 믿는다는 이유로 끌려간 딸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공고한 신분제 질서의 벽에 가로막히는 경험을 하며 환멸을 느끼거든요.

영화의 정치적인 함의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 정권 아래에서, 원작의 그런 부분을 살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김정호가 너무 정확한 지도를 만든 탓에 국가 기밀을 유출하여 대원군에게 옥사했다는 식의, 일제에 의해 날조된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지금의 플롯은 피했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대동여지도'가 김정호의 혼자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조선 후기에 발달한 지도 제작 기술의 뒷받침과 그와 교류했던 수많은 실학자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학계의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했다면 어땠을까요? 김정호 개인에 대한 신화는 다소 빛이 바랠지 몰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영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상업 영화의 상징 강우석, 욕심이 지나쳤던 걸까

감독 강우석과 배우 차승원 상업 영화 감독으로서 입지전적의 인물인 강우석,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너무 욕심을 부렸던 것일까요. 훌륭한 요소들이 훌륭한 작품이 되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합니다.

▲ 감독 강우석과 배우 차승원 상업 영화감독으로서 입지전적의 인물인 강우석,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너무 욕심을 부렸던 것일까. 훌륭한 요소들이 훌륭한 작품이 되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하다. ⓒ CJ엔터테인먼트


강우석 감독은 지난 20여 년 간 한국의 상업 영화의 상징적인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화도 크게 흥행시켰을 뿐만 아니라, 숱한 후배 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전작인 <전설의 주먹>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과거의 영광을 다시 한 번 이루고자 하는 의욕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의 연출력이 가장 빛을 발할 때는 사회의 모순과 병폐에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개인의 이야기를 다룰 때였습니다. 출세작인 <투캅스>가 그랬고, 그 이전에 나온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등의 초창기 학원물, <공공의 적> 시리즈, <실미도> 등 많은 성공작이 그런 영화였죠.

지금은 사람들이 재밌어 할 것 같은 것을 쫓아다닐 때가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소재와 주제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시대에 맞게 가다듬어 보다 간결하고 임팩트 있는 영화를 만들 때, 강우석 감독은 또다시 자신의 성공 신화를 써 내려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보여 준 방식으로는 미래가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 강우석 차승원 김인권 유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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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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