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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27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운덕 천태종 대종사,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 월간 <신동아> 기자 등과 만났다.
지난 4월 27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운덕 천태종 대종사,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 월간 <신동아> 기자 등과 만났다. ⓒ 월간 <신동아> 제공

[기사수정 : 29일 오전 11시 35분]

- 전두환-광주 화해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나?
"내가 5.18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이라는 핵심 자리에 있었다. 보안반장은 특전사령관보다 실질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리다. 모든 것을 총괄하고 사령관을 감시.감독하고 조언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어느 누구보다 총체적으로 5.18에 관해 많이 안다. 또한 88년 국회 청문회 당시 발포 명령 책임문제와 관련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정호용 장군을 잡는(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 진실을 밝혀야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5.18로 인한 갈등을 해소해야 동서화합과 국민대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소신과 내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 '발포 명령 책임과 관련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호용 장군을 잡았다'는 것이 뭐냐?
"노태우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을 추진할 때 그 조건의 하나로 '정호용을 제거하라'는 내용이 담긴 합의문서가 있다고 한다. 정호용 장군이 다음 대통령이 되면 김영삼·김종필이 다음 대통령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양김이 그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결국 88년 국회 5공 청문회에서 정호용 장군을 발포 책임자로 몰아 국회의원을 사퇴시켜 버렸다. (3당 합당을 위해) 정호용 장군을 제거하려고 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음모와 암투를 밝혀야 했다. 

여기에다 광주 시민들이 너무 억울하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한테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포 명령자는 아니지만 대통령이 되기 위해 했던 일들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적임자는 나였다. 내가 12.12부터 5.18까지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고, 5공세력으로부터 핍박받았기 때문에 광주 사람들과 동병상련할 수 있는 처지였다."

- 그런데 왜 정호용 전 사령관을 적극적으로 해명해주려고 하나?
"내가 (5.18 때) 정호용 장군에게 광주에 왔다갔다 하며 연락병 임무라도 수행하라고 건의했다. 사령부에 건의해서 헬기를 지원받아 광주에 다녀오도록 했다. 결론적으로 정호용 장군이 광주에 가도록 주선한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계엄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호용 장군을 광주에 보낸 것이 아니다. 내가 특전사 보안반장으로서 '당신이 여기에만 앉아 있으면 5.18이 끝난 뒤 완전히 제거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정호용 장군은 12.12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언론통폐합 등 허씨들(허삼수, 허화평, 허문도)이 추진한 정책도 반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호용 장군은 허삼수(전 보안사 인사처장)에게 완전히 찍혀 있었다.

내가 '여기 24시간 앉아있으면 당신은 5.18 수습과 관련해 아무 것도 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연락 업무만이라도 해라'고 조언했다. 당시 유무선 전화가 다 (북한에) 감청돼 보안 유지가 안됐다. 그래서 헬기 타고 직접 광주에 내려가 광주 상황을 확인해서 계엄사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 정호용 전 사령관에게 광주에 가라고 조언했다는 것은 보안사에 보고 안했나?
"보고했다. 정호용 장군이 헬기 타고 광주를 왔다갔다 하면 보안도 유지되는 이점이 있었다. 그래서 보안사에 건의해서 육군항공대로부터 헬기 두 대를 배속받았다. 그 헬기를 타고 광주를 오갔다. 그런데 나중에 정호용 장군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의해 발포 책임자로 찍혔다. 5공 청문회에서 여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호용 장군이 발포를 지시했다고 몰아간 것이다. 김영삼, 김종필과 합당하기 위한 조건으로 정호용 장군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호용 장군이 옷을 벗었다.

내가 광주에 내려 가라고 조언했는데 그것이 빌미가 돼서 정호용 장군이 졸지에 발포 명령자가 됐으니 인간적 의리 차원에서라도 사실을 밝혀줘야 할 것 아닌가. 이것이 내가 이 프로젝트를 추진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정호용 장군은 철천지 원수다. 그래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제일 먼저 (정치적으로) 죽인 사람이 정호용 장군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호용 장군이 노태우 전 대통령보다 먼저 보안사령관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전두환, 그동안 광주에 사과하겠다는 의사 드러낸 적 없었다"

- 왜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정호용 전 사령관은 원수지간이 됐나?
"라이벌이었니까. 차기 대권을 둘러싼 라이벌. 정호용 장군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기가 대통령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 전두환-광주 화해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작년까지 전두환 전 대통령을 직접 만난 적이 있나?
"80년에 만난 이후로 한 번도 안만났다. 하지만 정호용, 이학봉, 고명승 등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은 매년 만났다. 그 화해 프로젝트를 위해서."

- 그 측근들이 보고해서 전두환 전 대통령도 이 프로젝트를 잘 알고 있겠다.
"그렇다. 내가 추진하는 것을 다 알고 있다."

-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조언해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이런 거였다. '당신은 12.12와 5.18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죄인이다. 하지만 사형수로 죽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죽기 전에 명예회복해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죽어야 할 것 아니냐? 광주문제도 풀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죽는 게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국립묘지도 못간다.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받고 죽어야 할 것 아니냐? 당신이 5.18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지 않으면 명예회복이 절대 안된다. 광주 시민들에게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광주 사람들의 한이 자자손손 역사로 남는다. 전두환이 사과도 안하고 우리는 서러움만 받았다는 좋지 않는 역사를 남기게 된다. 그래서 그분들을 편하게 해줘야 한다. 그리고 광주 문제를 해결해야 박근혜 대통령이 당신을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해준다. 그러니 당신이 본인과 광주,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사과해라.'

측근들을 통해 매번 이렇게 요구해왔다. 그런데 매번 안됐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직접 찾아가야겠다고 해서 찾아간 것이다. 작년 12월에 전두환 전 대통령 쪽에 면담을 신청했다. 내가 '음모와 암투'라는 책을 썼는데 전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판한 내용이다. 그래서 이것을 미리 보여주겠다며 면담을 신청한 것이다. 그런데 답변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 1월부터 월간 <신동아>에 내 책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 지난 5년간(2011년부터 2015년까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해서 사과할 의향을 표시한 적이 있나?
"한 번도 없었다. 2011년에는 정호용, 이학봉을 통해 (화해를) 추진했는데 안됐고, 이후 이학봉도 죽었다(2014년). 2012년과 2013년에는 선거운동을 하느라 (추진을) 안했다. 2014년에는 정호용, 고명승을 통해 추진했는데 이것도 안됐다. 그래서 2015년 말에 직접 면담을 신청한 것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 2014년 4월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호용 장군을 통해 방문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그날이 4월 19일이었다. 그래서 전화했는데 비서가 '지금은 몸이 불편하셔서 다음 기회에 전화주셔서 따로 날짜를 잡자'고 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연락을 안했다. 그리고 올 4월에 다시 시작한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한테는 사과할 용의가 있지만 광주를 방문해 5.18과 관련해 사과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적은 전혀 없었다는 것인가?   
"한 번도 없었다."

"수차례 협의 거쳐 5.18 관련 포괄적으로 유감 표명하기로"

-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동안 왜 그렇게 사과를 안하려고 한 것인가?
"자기가 학살자, 살인자로 몰려 있어서 광주에 가면 맞아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호용 장군은 특전사령관이어서 발포 책임자로 이미 발표됐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광주에 직접 발포하라고 얘기한 적은 없다. 재판에서도 발포 책임자는 없었다. 발포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그 사건 후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내란 음모 등의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이 사형 선고받은 것을 억울해한다. 총을 쏘라고 지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살인자로 낙인찍혀 있어서 광주에 가면 죽이지 살려두겠냐, 그래서 못간다'고 했다."

- 지난 5년간 전두환-광주 화해 프로젝트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당시 대통령으로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포괄적으로 사과할 용의는 있는데 발포자, 학살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광주에 가면 맞아 죽는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다. 이순자 여사도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광주 사람들 한이 풀린다면 가겠다'고 했다(4월 27일 방문 때). 하지만 광주에 간다고한들 광주 사람들 한이 풀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못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발포자로 사과하는 게 아니다, 대통령으로서 총체적 책임을 지고 사과하면 광주에서도 받아줄 것이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권유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과할 용의가 생겼다."

- 전두환-광주 화해 프로젝트는 '박근혜-전두환 화해 프로젝트'와 동시에 추진했던 것 아닌가?
"그렇다. 박근혜-전두환 화해가 먼저였고, 그 다음이 전두환-광주 화해였다."

- 이제 올해 이야기로 넘어가자. 지난 4월 27일 전운덕(전 천태종 총무원장) 천태종 대종사와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했는데 이것은 언제부터 추진했나?
"4월 4일부터다. 내 책을 월간 <신동아>에 연재하려고 하는데 담당 기자(배수강 기자)가 '전두환 전 대통령 쪽 얘기를 듣지 않고는 글을 실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으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하고 인터뷰하게 해 달라, 책 내용이 맞다, 안맞다 확인해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그래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날 때 같이 가기로 했다. 그래서 작년 12월에 전두환 전 대통령 쪽에 면담을 신청했는데 답변이 안왔다. 결국 내 책은 올 1월부터 월간 <신동아>에 연재됐다.

그러다 5.18이 다가오니까 직접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정호용 장군에게 전화했다. '5.18 사과를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건의해보겠소?'라고 물었더니 정호용 장군으로부터 '두 번이나 건의해서 안됐는데 할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서 내가 '그럼 누구한테 얘기하면 좋겠나?'라고 물으니까 '고명승 장군하고 의논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4월에 배수강 기자와 함께 단양에 내려가 전운덕 대종사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당시 배 기자는 천태종과 관련해 전운덕 대종사를 인터뷰하러 갔다). 내 얘기를 듣고 전운덕 대종사가 거들겠다고 하더라. 전운덕 대종사는 박근혜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모두 친했다. 그래서 결국 목사하고 스님 둘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4월 7일 고명승 장군을 만나서 다 얘기했다. 고명승 장군이 '발포자 문제 때문에 내가 사과를 건의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해서 내가 '용기 내서 해보자'고 했다.

결국 4월 15일, 16일, 21일, 25일 팔레스호텔과 한강호텔 등에서 고명승 장군을 수차례 만나 협의했다. 내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내용이 담긴 문건까지 보여줬다. 고명승 장군이 이 문건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여주고 의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는 빼고, 이거는 집어넣으라'고 했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과 관련해 포괄적으로 유감을 표명하기로 합의했다. 당연히 전두환 전 대통령도 승낙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대종사님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전화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빨리 만납시다'라고 얘기해서 4월 27일 오후 2시에 만나게 되었다."

청와대에 보고? "이런 일은 독단적으로 하지 않는다"

- 전두환 전 대통령도 그날 5.18과 관련된 내용이 얘기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
"다 알고 있었다. 다 합의했으니까. 다만 인터뷰 형식이 좀 부담스러우니까 덕담을 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방문하기 전에 내가 고명승 장군에게 '덕담을 나누는 것을 누군가 기록해야 하지 않냐? 기록해서 국민에게 알릴 때가 오면 공개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고명승 장군도 좋다고 해서 이 건을 잘 아는 배수강 기자와 동행했다."

- 그런데 사실 인터뷰하러 간 것 아닌가?
"막상 당일이 되어서 기자 3명(취재기자 2명, 사진기자 1명)을 데려 가니까 인터뷰가 돼 버렸다. 형식상 덕담을 다누는 자리로 마련한 것인데 인터뷰가 된 것이다. 물론 바로 보도하려고 했던 인터뷰는 아니었다. 국민에게 공개할 필요가 있을 때 공개하기로 담당기자와 약속한 터였다."

- 그런데 월간 <신동아>에서 그날 방문 내용이 보도되자 전두환 전 대통령 쪽은 "인터뷰가 아니었다"라고 반박했다.
"(5.18 관련 발언의) 반응을 보면서 한발 빼려고 하는 것이다. 상황이 자기쪽에 불리하면 오리발을 내밀기 위한 작업이다. 처음에 전두환 전 대통령 쪽에서 나를 사기꾼이라고 해서 고발한다고 했다. 나중에 전두환 전 대통령 쪽에서 사과했다. 민정기 (전두환 전 대통령) 비서관은 자기를 경유하지 않고 방문 일정을 짠 것에 감정을 가지고 있다. 참석자들이 허심탄회하게 좋은 이야기를 했다. 공식 인터뷰보다 더 중요한 대화가 있었다. 문제는 언론이 거두절미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난하고, 민정기 비서관이 나를 사기꾼으로 몰았기 때문에 시끄러워진 것이다.  "

- 전운덕 대종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어떤 관계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있을 때 전운덕 대종사가 면회를 많이 갔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면받으려고 했을 때 건의서를 써서 청와대에 전달하는 등 많이 수고했다. 박근혜 대통령과도 친하다. 스님으로서 경륜이 많다. 나 혼자 박근혜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접근할 수 없으니까 전운덕 대종사를 업고 들어가면 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도 친하니까 전운덕 대종사가 적임자였다."

- 전운덕 대종사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와 화해하기 위해 광주를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나?
"그렇다. 나하고 똑같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문제를 풀어야 대한민국이 통일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4월 27일 방문할 때에도 처음 30분은 전운덕 대종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광주와 화해하라'고 설득하는 시간이었다."

- 4월 27일 방문은 청와대에 보고됐나?
"꼭 물어야겠나? 내가 이런 일을 하면 내 독단적으로 하지 않는다. 내가 정보기관에 있던 사람인데 미국에서 와서 독자적으로 행동하겠나? 그것은 상식이다."

- 4월 27일 방문을 청와대도 이미 알고 있었나?
"정보기관에 있었던 사람이 이런 일을 추진할 때 순수하게 김충립 개인으로 했겠나? 역사가 원하고 대통령에게 도움이 되고 국가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 방문한 이후 청와대 반응은 어땠나?
"모른다. 내가 (4월 27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방문한다는 것을) 민원 형식으로 보고했기 때문에 반응을 모르겠다. 청와대가 아무 얘기 안하면 수긍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청와대에서 브레이크를 걸면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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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립#전두환#5.18#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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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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