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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노마드 다큐 제작자 도유진씨.
▲ 디지털 노마드 다큐 제작자 도유진 디지털 노마드 다큐 제작자 도유진씨.
ⓒ 도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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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1~2시간 지옥 같은 출근 전쟁을 거쳐 하루 9시간 또는 업무의 연장 선상인 회식까지 하루 12시간씩 일하는 한국인들의 획일적인 모습, 어때요? 그런데 이런 삶이 과연 자신이 선택한 것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한 번쯤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좀 더 효율적으로 일하는 대안적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한 번쯤 시도해 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18일 제주시 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만난 도유진(29)씨를 한마디로 설명하면 열정적인 한국의 '디지털 노마드'이며, 다큐멘터리 <원 웨이 티켓(One Way Ticket)> 제작자이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 노마드의 삶과 일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방대한 작업을 시도한 아시아 여성에게 <포브스>, <허핑턴포스트> 등 해외 언론이 먼저 주목했다. 국내에서는 최근 한 방송사가 도씨의 티저 동영상을 무단사용해 한바탕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여행도 하고 돈도 버는 멋진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왜곡된 인식을 걷어내고 일과 삶의 한 방식으로서 디지털 노마드를 바라봐달라는 도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먼 나라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곧 다가올 '자기 일'의 미래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학비 걱정했던 '흙수저'가 달라지다

미국과 호주에서 일해온 그녀의 백그라운드가 궁금했다. 분명 부모 잘 만나서 어학연수 다녀온 '금수저'일 것이란 선입견을 가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도씨는 고교 시절 학비 걱정에 대학 포기를 고민하던 '흙수저'였다.

2007년 중국 산둥 대학에 진학해 경영학도 150명 중 유일한 외국인으로서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중국어에 능통했기에 미국 회사의 인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영어학원 한 번 다녀본 적 없고 대학시절 토익시험도 쳐본 적 없었지만, 일을 하면서 영어실력도 키웠다. 중국에서의 대학생활과 미국에서의 직장생활은 그녀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도씨가 다큐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의외로 순진무구하다.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보내는 콘텐츠 하나쯤 만들어보자는 작은 소망에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디지털 노마드적 삶이 높은 실업률, 줄어드는 일자리 등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중국 대학으로 진학하기 전 저도 지방에서 10년 정도 살았어요. 지방에 사는 제 나이 또래 친구들이 서울로 가려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일자리 때문이에요. 어찌해서 그들이 서울에 일자리를 얻어도 비싼 주거비와 생활비 때문에 고통받고 허덕이죠.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들에게 과연 서울에 온 게 100% 자의적 선택인지 묻고 싶어요."

"과연 서울 온 게 100% 자의적 선택이었는가"

2015년 여름 베를린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다큐 쇼케이스 중인 도유진씨.
▲ 도유진 베를린3 2015년 여름 베를린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다큐 쇼케이스 중인 도유진씨.
ⓒ 도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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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 주거비나 일자리 문제는 비단 서울만의 문제가 아니다. 런던이나 샌프란시스코도 같은 문제가 있지만, 기업들이 먼저 원격근무라는 업무방식을 적극 도입하면서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됐음을 다큐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디지털 노마드의 본질은 원격근무(remote work)라는 업무방식에 있습니다. 원격근무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죠. 재택을 하며 육아를 할 수도 있고, 시골에 계신 병든 할머니 간호를 할 수도 있어요. 또 어릴 때부터 나고 자란 고향에 살면서 일하고 싶은 사람도 있어요. 각자 그곳에 사는 목적은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점이죠. 디지털 노마드는 일과 삶의 한 방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일하는 장소(location)로부터의 해방(independence) - 디지털 노마드의 삶은 어쩌면 인류 노동역사의 새 장이 열린 것인지도 모른다. 출근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 화장하고 차려입고 무슨 색깔의 스타킹을 신어야 하나 고민할 시간과 자원을 온전히 일에 돌릴 수 있으니, 효율성으로 치면 최고의 업무방식인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도씨는 또 디지털 노마드의 정의 자체가 우리나라에서는 굉장히 왜곡돼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조직생활을 못 하는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비정규직의 저숙련 기술자 이미지로 각인돼있다는 것. 또 효율성보다 의전과 격식을 중시하는 한국사회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란 주장에 대해서도 단호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은 바뀌고 있고, 싫든 좋든 받아들여야 할 날이 올 겁니다. 마치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우리 삶을 바꾼 것처럼 말이죠."

1년간 전 세계를 돌며 그녀가 만났던 50여 명의 인터뷰이들은 국적과 연령을 불문하고 이구동성 "한 번 시작하면 다시는 출퇴근하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않을 것"이고 말했다. 그만큼 디지털 노마드 경험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매력이 크기 때문이다.

디지털 노마드에 대한 몇 가지 오해

여러 국가를 돌아다닐 정도로 젊고 IT기술이 있어야만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도씨는 "시장에서 수요가 많은 직군일수록 원격근무에 관해 조직과 협상을 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탓에 아직은 개발자나 디자이너 등 직군이 한정돼 있지만, 연령만큼은 절대 그렇지 않다"며 가장 기억에 남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로펌을 운영하는 60대 미국인 변호사 부부를 꼽았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이 아쉬워 남은 생을 새로운 곳을 탐험하며 살아보기로 했다는 그분의 이야기가 무척 와 닿았어요. 아내는 작가이고 자녀는 독립했지만, 정작 가장 큰 장애는 변호사라는 자신의 직업이었죠. 변호사 일이 과연 원격근무로 가능한지 의심스러웠지만, 그는 20년 넘게 운영해온 로펌을 최근 3년에 걸쳐 원격근무 체제로 바꿨죠. IT에 친숙한 젊은 직원들로 채우고 스스로도 디지털 노마드가 된 것이죠."

그녀가 만나본 인터뷰이들을 통해 디지털 노마드의 삶도 연령대별로 조금씩 다른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싱글인 20대들은 에너지 넘치고 건강하므로 여러 나라를 두루 다녀본다. 그 중에서 자신도 몰랐던 최적의 장소를 만나게 되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곳에서 좀 더 오래 머무르며 살게 된다. 최적의 장소를 발견한 30대 이후엔 천천히 정착할 수도 있다. 결혼을 하고 아기가 생기면 이동속도가 확실히 느려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일에 구애받지 않고 삶의 터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는 그대로다.

도씨는 또 "디지털 노마드라 하면 대부분 내 사업을 하거나 프리랜서만을 생각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없고 아직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업에 고용되는 직원이 될 수밖에 없다"며 디지털 노마드의 삶이 우리나라에도 적용되려면 원격근무 기업들이 늘어나야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1년간 전 세계 돌며 다큐멘터리 제작

다큐멘터리 촬영을 도와주는 핵심멤버 2명과 함께 베를린에서.
▲ 베를린 도유진 다큐멘터리 촬영을 도와주는 핵심멤버 2명과 함께 베를린에서.
ⓒ 도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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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노마드의 첫 번째 전제는 협상력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피고용인이 협상력을 갖기 힘든 것이 사실이죠. 하지만 일자리가 더욱 파편화되면 기업이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가진 인재를 필요한 시간만큼 사게 되고, 개인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협상하게 되는 시대가 곧 오게 될 겁니다. 두 번째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입니다. 원격근무를 시행하는 회사의 경우 직원이 위치한 장소, 즉 국적에 관계없이 채용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양한 국적과 문화권의 동료들, 그리고 고객들과 함께 하는 일이니만큼 영어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난 인터뷰이의 절반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국가 출신이었어요. 최고의 IT 인프라를 갖춘 한국이 유독 영어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이 크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1년간 세계를 돌며 촬영한 78시간 분량의 방대한 인터뷰는 현재 10시간으로 줄였고 60분에서 90분 사이의 최종 다큐멘터리 결과물로 막바지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크라우드펀딩으로 후원한 이들과 대가없이 함께 일해준 동료들의 땀방울이 서린 다큐멘터리 <원 웨이 티켓(One Way Ticket)>은 8월을 목표로 온라인 등 여러 채널을 통해 전 세계에 무료로 공개할 계획이다.

다큐 작업이 끝나는 대로 다시 원격근무 시행사의 직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도씨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왜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가며, 혹시 한 나라에 정착할 생각은 없는지'.

"저는 한국이 무척 좋아요. 친한 친구들이 있고, 일하기 좋고, 건강보험과 인터넷 등 인프라도 최고죠. 하지만 한국에 들어와 처음 마주한 성차별적 광고나 위계질서, 의전 같은 불편함을 느꼈던 것들이 6개월이 넘어가면 익숙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때 무서워져요. 저는 제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돌아다닙니다. 끊임없이 영감을 받고 배우기 위해서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디지털 노마드의 삶이 옳다거나 더 우월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삶의 형태이며 여러분들도 한 번쯤 시도해볼 수 있는 플랜B로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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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디지털 노마드 가능할까?①] 유유자적 일한다? '디지털 노마드' 이해와 오해


태그:#디지털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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