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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이 많은 것도 아닌데, 아내와 단 둘의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아이들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대학생들로 훌쩍 커서 아빠를 잘 찾지 않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에도 함께 놀아주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바빴던지! 그야말로 빵점짜리 가장입니다.

금년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게 있잖아요. 작별을 고할 때의 아쉬움과 슬픔. 감정이 메마른 저에게도 이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어림도 없을 것이었지만 아내의 간절한 청에 영화를 보고 왔으니까요.

제가 살고 있는 김천 지역에 상영관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이 요즈음 프리머스에서 메가박스로 바뀌었더군요. 아마 주인이 바뀐 것인지, 극장 내부도 약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다 밝고 깨끗한 분위기였다고 할까요. 바뀌고 나서 처음 간 것입니다.

<내부자들>이란 영화였는데, 얼마나 사회 흐름을 잘 반영시킨 영화인지 모르겠지만 보는 내내 머리가 아프더군요. 자본주의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엮어놓은 것이어서 실감은 났지만 권모술수와 폭력 그리고 성적 타락이 눈을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극단적 예를 픽션화시킨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와 멀리 떨어져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축복된 삶이고 또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나아가 이런 세상을 순화시키는데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야 하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했습니다. 밝고 따뜻한 사회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잖아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바라는 세상도 여기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글에서 정녕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승용차로 아내와 함께 가는 상영관까지는 집에서 4㎞, 그러니까 우리의 전통 거리 단위로 10리쯤 됩니다. 가는 도중 차창 밖의 상가들을 구경하면서 아내가 걱정스런 투로 제게 말을 해 왔습니다.

"여보 여보, 걱정이에요. 요즘 세탁소가 우후죽순격으로 생기고 있어요. 많은 가운데 또 오다가 보니 두 군데나 새로 생겼더군요. 바로 저기 보세요. '세탁소 개업 준비 중'이라고 써 붙여놓고 있잖아요."

얼핏 듣기로는 경제가 어려운데, 큰 자본 들이지 않고 개업한다고 해도 세탁소가 저렇게 많이 생기면 경쟁이 심해지고 적자생존의 원칙에 따라 문 닫는 곳이 많이 생길 것을 걱정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측면도 전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의 걱정은 따로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농촌 목회를 하다가 은퇴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오고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것이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세탁소를 차려주면 그것은 잘 해 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옷은 잘 다리잖아요. 특히 와이셔츠를."

뚱딴지같은 소리에 기분이 가라 앉았습니다. 그래도 별 응대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어서 이런 셈까지 신나게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복잡한 것 말고 간단한 것, 즉 와이셔츠만 전문으로 받는 거예요. 와이셔츠 하나 세탁해서 다려주는 데 1천 원 받거든요. 당신은 8백 원만 받아요. 다른 곳보다 더 싸게. 1개에 8백원이면 하루 50개를 받는다 해도, (50개X800원=40,000원)X26일(주일 빼고)=1,040,000원. 백만 원이면 넉넉지는 않지만 우리 부부 생활은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내가 공상하고 있는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남편이 목회를 그만 두면 먹고 살 방도를 찾아보아야 하는데, 여러 가지 정황상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기껏 꼽을 수 있는 것이 빨래하는 일이다, 세탁기에 빨래 넣어 돌리고 말리고 다리는 것은 수준급이니까 세탁소를 차리면 굶어죽지는 않겠다.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한 것입니다.

부부의 궁합은 상호보완적이기 쉽습니다. 즉 아내가 잘 하는 것은 남편이 못하고, 남편이 잘 하는 것은 아내가 좀 떨어질 때 부부의 연분이 맞는다고 표현합니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아내가 못하는 것 중 다리미질과 옷 깁는 일 등은 저보다 아주 떨어집니다. 지금도 그런 것은 거의 제가 해 내고 있거든요.

아주 오래 전, 신혼 초의 일입니다. 서로의 솜씨가 채 파악되지도 않은 때 아내에게 떨어진 와이셔츠 소매 단추를 달아달라고 맡긴 적이 있습니다. 아내는 다소곳이 받아 어렵지 않게 달아주는 것 같더군요. 급히 집을 나가 사무실에 가서 소매 단추를 잠그려니 바깥쪽에 달아야 할 것을 안쪽에 달아 잠그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또 언젠가 장인어른이 다니러 오셨을 때, 마침 옷에 단추가 떨어져 딸(제 아내)에게 달아 달라고 내 밀었습니다. 아내는 그런 일이라면 사위가 더 잘 한다면서 제게 미뤘습니다. 제가 해결해 드린 뒤, 장인어른은 사위 칭찬도 못하고 그렇다고 딸 혼도 못 내주고 헛기침만 하신 적도 있습니다.

작은 농촌 교회 목회를 하면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은퇴 연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말이 됩니다. 앞만 보고 살아가다가 지내온 일들을 되돌아보니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것 같군요. 물론 아내와 같이요. 이루어 놓은 것은 없고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가장인 저보다 아내가 더 앞 일이 염려되는 것은 성격 탓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생각해 낸 것이 세탁소입니다. 이런 아내가 세탁소가 새롭게 자꾸 생기는 것에 걱정을 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지 싶습니다. 우리 부부가 은퇴 후 꿈꾸고 있는 유일한 일에 경쟁자가 늘어나는 것이 되니까요. 그래도 아직 몇 년이 남아 있으니 염려할 것 없다고 위로해 주려 합니다.

아내와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즐기러 가서 걱정거리만 안고 돌아왔네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충실하면 내일 할 일은 반드시 예비 될 테니까요. 이럴 땐 낙관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한 구절을 아내에게 들려주려고 하는데, 얼마나 위로가 될지 모르겠네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태그:#은퇴 후의 일, #전문 세탁소, #아내의 염려, #영화 내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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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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