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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7일 새벽 완도군 완도읍의 한 버스승강장 앞에서 발견된 김신혜 아버지 사체 모습. 누군가 사체를 바닥에서 끌었는지 바지가 약간 내려가 있다.
 2000년 3월 7일 새벽 완도군 완도읍의 한 버스승강장 앞에서 발견된 김신혜 아버지 사체 모습. 누군가 사체를 바닥에서 끌었는지 바지가 약간 내려가 있다.
ⓒ <피디수첩>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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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3월,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를 존속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15년 8개월째 수감중인 '존속살인 여 무기수' 김신혜씨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달되었다. 무료로 김신혜씨의 재심을 도와주고 있는 담당 변호인단이 "오는 11월 18일(수) 낮 1시 30분, 광주지법 해남지원에서 무기수 김신혜씨의 재심 개시 여부를 판단하는 재판이 결정되었다"고 알려온 것이다.

이른바 '완도 존속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지난 2000년 3월 7일 발생한다. 당시 23살(1977생)이었던 김신혜씨는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고향인 전남 완도로 향했다. 서울에서 함께 생활하던 남동생과 일주일 전 고향을 방문했는데, 그때 고향집에 더 있고 싶다는 남동생을 두고 혼자 서울에 올라온 그녀가 다시 남동생을 데려오려고 내려간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 날의 여행은 비극의 출발이 되고 말았다. 김신혜씨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오늘까지 만 15년 8개월간 교도소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다. 고향에 도착한 그날, 불행하게도 김신혜씨의 아버지가 숨진 채 발견되었고 다음날, 경찰이 존속살인범으로 전격 체포한 사람이 사망자의 큰 딸 김신혜씨였기 때문이다.

그날로부터 무려 15년 8개월. 김신혜씨는 1심과 2심, 그리고 대법원까지 내내 자신의 억울함을 절규했다. 하지만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어요'라는 그녀의 절규는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돌아왔다. 과연 그녀는 정말 아버지를 죽인 것일까. 아니면 정말 그녀의 주장처럼 억울한 누명일까.

15년 전 처음 만난 무기수 김신혜, 그녀의 진실은?

내가 무기수 김신혜씨를 처음 만난 때는 2000년 12월 말이었다. 시민단체인 '반부패 국민연대' 민원국장으로 일할 당시 한 통의 이메일을 접하면서 나는 김신혜씨의 사연을 접하게 된다. 이메일을 보낸 이는 당시 19살의 김신혜씨 남동생이었다.

이후 나는 김신혜씨와 수백 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사체가 발견된 현장을 수없이 찾아갔고 또 사건 당일 그녀를 만난 이들을 찾아가 그날의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해 나갔다. 또한 담당 경찰관을 비롯하여 '김신혜가 틀림없는 진범'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말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사건 수사기록과 정보 그리고 증인들의 자료를 토대로 우리나라 대표 시사 프로인 SBS '그것이 알고 싶다'와 '뉴스 추적', 그리고 MBC 'PD 수첩' 등에 이 사건 취재를 요청하기도 했다. 덕분에 많은 국민들이 '존속살인 여 무기수 김신혜 사건'에 대해 상당히 알게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내가 갖게된 확신이 있었다. 단언컨대, 김신혜씨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할 수 없다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적어도 그녀가 범인이라고 판단한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 그리고 이 사건 재판부가 내린 결론은 가능할 수 없는 억지이며 제대로 진실을 봤다고 동의할 수 없다는 확신이었다.

근거는 복잡하지 않다. 당시 수사기관과 재판부는 '김신혜씨가 범인'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직접 증거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다. 고작 내세운 것이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그녀의 초기 자백이었다. 하지만 김신혜씨는 그러한 자백이 "사실은 수사기관에 의해 강요된 허위 자백"이라고 울부짖었다.

"만약 내가 부잣집 딸이었다면, 아니 내 아버지가 죽지 않고 내 곁에만 있었다 해도 그들이 나를 이렇게 했을까요? 아버지는 나에게 소중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을 내가 왜 죽이나요? 나를 때리고, 또 머리를 움켜쥔 채 끌고 다니며 온갖 욕설을 하면서 허위 자백을 강요한 경찰과 검찰에서의 치욕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김신혜씨가 나에게 보내온 수백 여통의 편지 중 한 대목이다. 나는 그녀가 주장하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함께 싸우기로 생각했다. 그 시간이 만 15년 8개월이었다.

"나도 국민인지 알고 싶다"는 김신혜의 절규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신혜. 김신헤는 2000년 3월 8일 경찰에 체포됐다. 이 사진은 그 즈음의 김신혜 모습이다.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신혜. 김신헤는 2000년 3월 8일 경찰에 체포됐다. 이 사진은 그 즈음의 김신혜 모습이다.
ⓒ 김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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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한 해, 한 해 절망과 실망으로 세월만 흘러가던 그때, '재심사건 전문가'로 유명한 인권 변호사 박준영 변호사와 인연이 이어졌고 그 분의 도움으로 이 사건은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저 꿈처럼 여겨왔던 재심 청구가 현실로 이어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2015년 5월 13일, 광주지법 해남지원에서 김신혜씨의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첫 심문기일이 있었다. 그날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무기수 김신혜씨를 법정에 출석시켰다. 통상 서류로만 판단하던 기존 관행과 달리 청구인에게 직접 재심 청구 사유를 묻겠다는 매우 이례적 결정이었다.

덕분에 무기수 김신혜씨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폭발했다. 조그만 시골 법정이었던 해남 지원에 유수의 언론사 카메라가 등장을 했고, 셔터를 눌러대는 소리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만큼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던 것이다.

나 역시 그 재판에 참여하기 위해 새벽길을 나섰다. 내가 사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전남 해남까지의 길은 참으로 멀고, 또 멀었다. 하지만 그 멀고 먼 시간보다 더 길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김신혜씨와 보낸 지난 15년 세월이었다. 그 15년간 지켜봤던 그녀의 절망과 눈물, 웃음과 낙관이 마치 영화처럼, 그림처럼 떠올랐다.

어쩌면 김신혜씨는 인권운동가인 나보다 더 낙관적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무기수가 다시 재심을 받아 무죄로 석방될 가능성은 흔히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가능성 없는 상상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봐온 대한민국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김신혜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반드시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은 후 저 감옥 문을 나올테니 꼭 수수부꾸미를 사 달라'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몇해 전, '가족 여행을 가서 수수부꾸미를 사 먹었다'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수수부꾸미'라는 음식을 모른다며 "언젠가 꼭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말로 그녀가 답장을 보냈던 것이다. 

이처럼 오히려 너스레를 떠는 그녀에게 나는 늘 무슨 말로 맞장구를 쳐야 할지 난감했다. 그런 근거없는 자신감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가 말한 자신감의 근거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자기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그래서 그런 아버지를 자신도 믿는다고 했다. 정말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그녀라면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그런 그녀를 15년간 지켜봤기에 그녀의 무죄를 확신할 수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낙관주의자' 김신혜씨가 지난 5월 13일 해남지원 법정에서 울부짖었던 절규는 달랐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차디찬 회색의 교도소 면회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람들을 만난 그녀는 연신 자그마한 체구의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그랬다. 그녀의 진술은 그 어떤 비극적인 드라마보다 슬펐다. 한 손에 하얀 손수건을 움켜쥔 채 법정에 들어선 김신혜씨는 "지난 15년간의 수감 생활 동안 심경이 어땠냐"는 박준영 변호사의 첫 질문에 울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죽지 못한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억울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죽지 못했다"는 답변은 생뚱했다. 이에 박준영 변호사가 "왜 아버지 때문에 죽지 못했냐?"고 물으니 김신혜씨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구속된 이유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것이고, 또 내가 그 아버지를 살해한 이유가 나와 내 여동생을 아버지가 성추행했기 때문이라고  검찰과 법원이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여기서 자살해 버린다면 내 아버지는 영원히 딸들을 성추행한 파렴치범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 아버지가 그런 파렴치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장애인이라서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무시당했지만, 그래서 그 아버지의 딸인 나 역시 어려서부터 무시받고 멸시 받았지만 내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죽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무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아버지도 살고, 저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지난 15년간 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죽지 못한 이유입니다."

나는 울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내 옆에 방청객도 울었다. 그날, 방청객으로 온 이들은 다 같이 울었다. 가져간 손수건이 다 젖도록 모두가  펑펑 운 이유였다.

"나는 수사기관에 이렇게 당했다" 김신혜의 증언

지난 1월 15일 밤에 찾은 완도경찰서 출입문. "환한 미소의 당신, 완도 경찰의 얼굴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김신혜 3남매는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1월 15일 밤에 찾은 완도경찰서 출입문. "환한 미소의 당신, 완도 경찰의 얼굴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김신혜 3남매는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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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혜는 말했다. 나에게는 15년 전에도 국가가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국가가 없다고.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로 끌려간 후 그녀의 이름은 사라졌다고 한다. 그 이름을 대신하는 번호가 매겨졌고 따라서 인권도, 명예도, 그리고 존중감도 사라졌다고 한다.

경찰서에서는 한번도 못본 낯선 남자 수사관들이 자신을 둘러싼 채 함부로 자신의 팔과 머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차마 다 옮길 수 없는 욕설과 모욕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게 이 년, 저 년이라는 욕설로 불리는 가운데 자백을 강요당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고작 23살이었던 그녀에게 수사 경찰들은 정말 가혹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긴 생머리였던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쥔 채 강력계 사무실 여기 저기로 끌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냥 인정해라. 인정하며 그때부터 편해진다"며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고 한다. 이를 거부할 때마다 가혹행위가 반복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경찰서에서 가장 편한 곳이 유치장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적어도 유치장 안으로 들어오면 더 이상 경찰에게 맞지 않아도 되니 그녀는 유치장이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체포되고 며칠이 지나가던 그때 유치장 밖으로 나오라는 경찰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신혜씨는 나가지 않겠다며 버텼다. 또 당할 가혹행위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키 155cm에 40여kg 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체구를 움츠리며 구석으로 붙었는데 그때 들려온 말이 너무도 반가웠다고 한다. "오늘은 검사 만나러 검찰청으로 간다"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순간 김신혜씨는 너무 기뻤다고 한다. 자신이 그동안 당한 가혹행위와 억울함에 대해 '적어도 검사는 자신의 말을 믿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김신혜씨는 그날, 검사와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검사를 만난 후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말하며 살려달라고 매달렸다고 한다.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며, 그런데 경찰이 때리고 욕하고 강제로 서류를 만들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신혜씨가 주장하는 그런 증거 조작은 무엇일까. 대표적인 사례가 구속될 때 작성하는 '긴급 체포서'였다. 긴급 체포 서류는 반드시 자신의 자필 이름과 손가락 무인이 찍혀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김신혜씨의 긴급 체포서는 이상했다. 무인만 있을 뿐 '김신혜'라는 자필 서명이 없었던 것이다. 

변호인이 그 이유를 묻자 이에 대한 김신혜씨의 증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경찰서에 끌려온 직후였다고 한다. 경찰관이 그녀에게 한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거기에 자필로 이름과 무인을 찍으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 서류가 무엇인지 일체의 설명도 없었다고 한다. 문서 제목은 '긴급 체포서'였다. 

난생 처음 경찰서를 갔지만 김신혜씨는 그 서류에 자신의 이름과 무인을 찍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경찰에게 "이게 뭐예요?"라고 물었다는 것. 폭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질문을 하자마자 경찰관은 마치 샌드백치듯 그녀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때렸다고 한다.

"머리털이 있어 상처가 쉽게 보이지 않는 머리를 집중적으로 때린 것"이라고 김신혜씨는 격분하여 외쳤다. 하지만 그녀에게 더 큰 마음의 상처는 따로 있었다. 경찰관의 갑작스러운 폭력에 너무나 아프고 당황하던 그 때 들려온 말은, 그래서 15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질문은 경찰인 나만 하는 거야. 알았어. 넌 질문할 권리가 없어."

하지만 그날, 김신혜씨는 끝내 무인 찍기를 거부한다. 서명을 하는 순간 자기가 아버지를 죽인 혐의를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쏟아지는 가혹행위 앞에서도 끝내 자필 서명과 무인 찍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또 다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서명 날인을 거부하며 저항하자 한 경찰관이 "그냥 강제로 손 잡아서 찍어 버려"라고 말했다는 것. 그러자 우악스러운 한 경찰관이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에게 다가와 오른손을 낚아 챘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힘으로 제압된 상태에서 경찰은 그녀의 엄지 손가락을 강제로 편 후 인주를 묻혀 긴급체포 서류에 지장을 찍었다는 것. 김신혜씨의 법정 진술이었다.

김신혜씨는 '경찰 수사가 모두 이런 식'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만들어진 거짓 서류는 15년이 지난 오늘, 이 사건이 얼마나 엉터리였는가를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었다. 힘으로 무인을 찍는 것까지는 가능했으나 '김신혜'라는 자필 서명은 그곳에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이 자필 서명하라고 건넨 볼펜을 그녀가 거부하자 결국 경찰은 이후 자필 서명란을 공란으로 두게된다. 결국 지장만 있고 자필 이름은 없는 이상한 긴급 체포서. 이 서류는 이날, '경찰의 이 수사가 강압적 수사였다'는 중요한 증거 자료로 재판부에 제출된다.

현장 검증날, 저항하던 그녀에게 경찰은

'김신혜 사건' 현장검증 모습. 경찰이 작성한 설명에는 "피의자(김신혜)가 피해자(아버지)의 집에서 문을 노크하는 장면"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실제의 사진은 김신혜가 범행을 부인하며 집 앞에 주저앉아 있다.
 '김신혜 사건' 현장검증 모습. 경찰이 작성한 설명에는 "피의자(김신혜)가 피해자(아버지)의 집에서 문을 노크하는 장면"으로 적혀 있다. 하지만 실제의 사진은 김신혜가 범행을 부인하며 집 앞에 주저앉아 있다.
ⓒ 완도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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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검증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날도 역시 김신혜씨는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을 재현하라는 요구를 거부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사건 현장을 가는 것도, 그곳에서 범행 과정을 재현하는 것도 전부 거부한 것이다. 그리고 땅 바닥에 주저 앉거나 강제로 끌고 가는 경찰에 맞서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의 완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고작 키 155cm에 40여kg밖에 안되는 그녀를 경찰은 통째로 들어 사건 현장에 세웠다. 건장한 체격의 강력계 경찰 2명이 양쪽에서 팔짱을 낀 후 발버둥치는 그녀를 허공으로 들어 사건 현장에 세운 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압권은 승용차 운전 장면이었다. 아버지를 살해한 후 자동차를 운전하여 사체를 유기하는 장면이었다. 그녀는 이때 역시 '그런 사실이 없다'며 저항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운전석에 앉히는 경찰에 맞서 그 차량에서 나오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실랑이를 했다고 한다.

자꾸만 차량을 벗어나려는 그녀 때문에 애를 먹게된 경찰중 한 명이 그들로서는 기가막힌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바로 하나의 수갑으로 자동차 핸들과 그녀의 손목을 같이 채우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현장 검증을 하던 경찰관은 '참으로 좋은 아이디어'라며 이내 수갑을 꺼내 들었다고 한다. 잠시 후 김신혜씨의 한쪽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핸들에도 수갑이 채워졌다.

김신혜씨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게 정말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냐"며 법정에서 울부짖었다. 그러면서 수갑이 채워져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그녀가 울며 자신을 그렇게 한 경찰들에게 "도대체 왜 저한테 이러시냐"며, "정말 전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며, "제발 살려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봤다고 한다. 그렇게 수갑이 채워져 매달릴 때 차 밖 유리창 너머로 자신을 내려다 보던 경찰관들의 웃음. 그 비웃음을 지난 15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은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난 15년 전, 존속살인 여 무기수 김신혜씨에게 있었던 사건 중 일부였다.

김신혜씨는 말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은 장애인이었던 아버지를 무시했고, 딸인 자기 앞에서도 아버지를 '병신 새끼'라며 욕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고. 그래서 자신 역시 '병신 새끼의 딸'이라며 무시 받았다고 서럽게 울었다.

그래서 그녀는 꼭 성공하고 싶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완도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12년 내내 '공부 잘하고 상장 많이 받는 학생'으로 유명했다. 김신혜씨 사건이 방송을 통해 알려진 후 나에게는 김신혜 친구라며 연락온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녀의 초중고 동창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불행을 안타까워 하며 "자신이 도울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또 말했다. 정말 성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너무도 가슴 아팠다. 내가 성공한다면 누구도 내 아버지를 더 이상 장애인이라고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내 아버지를 최고로 좋은 차에, 최고로 좋은 음식에, 최고로 좋은 집에서 모시는 것이 자신의 어릴 적부터 꿈이었다고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 꿈은 2000년 3월, 참혹하게 무너졌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로 그녀는 사랑했던 아버지를 잃었고 그후 15년 8개월을 감옥에서 살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그녀는 1심과 2심에서 내내 사형을 구형받았다. 죽지 않고 버텨온 그녀의 15년 8개월.

정말 그녀가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다시 세상에 나와 그녀가 꿈꾼 성공한 딸로서 아버지 앞에 다시 설 수 있을까.

나는 그녀의 무죄를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요구한다. 다시한번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를 달라. 돈이 없어 변호사도 선임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 재심을 받을 기회를 달라. 그리하여 엉터리 증거가 유죄 근거가 되어 무기수가 되어버린 그녀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말할 기회를 달라.

오는 11월 18일(수) 오후 1시 30분. 광주지법 해남지원에서 열리는 김신혜씨의 '재심 개시 여부를 위한 공판' 방청을 위해 나는 다시 새벽 길을 나설 것이다. 그 간절한 기도가 15년 8개월만에 끝나기를 기도할 것이다. 부디 함께 기도해 달라. 그녀를 위한 진실을 위해. 진실의 종아. 울려라!


태그:#김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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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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