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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현실의 권력이 의미를 좌우하기도 한다.
 때로는 현실의 권력이 의미를 좌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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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라고 쓰면 안 돼! 'anarchism'은 '아나키즘'이라구!

무정부주의(아나키즘)를 다루는 글을 읽다 보면 이런 주장을 흔히 접할 수 있다(이를테면 <오마이뉴스>에 실린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라는 서평 기사).

물론 '아나키즘'은 '일체의 정치 권력이나 공공적 강제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려는 사상'(표준국어대사전)이지, "정부가 존재하지 않"(무정부)거나 "아무런 통일적인 제도와 질서가 없이 혼란한"(무정부적) 상태를 지향하는 사상이 아니다. 그래서 나도 며칠 전까지는 '무정부주의'보다는 '아나키즘'이 더 나은 번역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 정부의 상태가 일종의 '무정부'(아나키)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문득 'anarchy'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봤는데, 'anarchy'의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르키아'로, 지도자(아르코스ἀρχός)가 없는(안ἀν) '아나르코스ἄναρχ-ος'의 상태를 뜻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anarchy'는 "정부가 없음, 최고 권력이 없거나 비효율적인 데서 비롯한 무법 상태, 정치적 무질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영어 'anarchism'은 'anarchy-ism', 즉 '아나키주의', …… 바로 '무정부주의'다!

하긴 'anarchist'라는 용어가 영어에서 처음 쓰인 것은 1642년 잉글랜드 내전 때였는데 이때는 왕당파가 의회파를 조롱하는 표현이었다. 이 용어는 프랑스 혁명기에 이르러 긍정적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참고: 위키백과). 영어 'anarchism'은 말 그대로 '아나키주의', 즉 '무정부주의'인데 한국어에서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아나키즘'으로 쓰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영어는 되는데 한국어는 안 된다는 걸까?

영어 화자는 'anarchism'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이것을 'anarchy'와 'ism'으로 분해할까, 아니면 한 덩어리로 인식할까? 만일 분해한다면 영국인과 미국인에게도 'anarchism'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라고 해야 할 것이고, 한 덩어리로 인식한다면 한국어에서도 '무정부주의'는 '무정부 + 주의'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일 뿐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어 '아나키즘'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

그런데 한국어 '아나키즘'은 위상이 독특하다. '아나키 + 이즘'으로 분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행위를 규제하는 공통 가치나 도덕 기준이 없는 혼돈 상태"인 '아노미'와 달리 '아나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려 있지 않다) 그 자체로도 한국어 생태계 안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아나키즘'은 영어 'archichism'(또는 프랑스어 'l'anarchisme')의 번역어로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한국어 '아나키즘'의 의미는 이 단어를, 또는 개념을 수입한 사람들이 결정한다(영어 사전에서 'anarchism'을 찾으면 되지만, 한국어로 사유하고 소통하려면 누군가 이를 번역해야 한다). 김춘수의 꽃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나키즘'은 "내(아나키스트)가 그의 몸짓을 정의하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명명되기 이전의 꽃이 기표 없는 기의라면 정의되기 이전의 '아나키즘'은 기의 없는 기표다(이 문장에서 '꽃'을 따옴표로 묶지 않았으되 '아나키즘'은 묶은 것에 유의할 것). 텅 빈 기표를 채우는 사람이 권력을 얻는다. 문자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이 신비한 기호의 의미는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사제만이 알고 있었다. 사제의 권력은 기호의 의미 없음(또는 의미 독점)에서 비롯한다.

텅 빈 기표의 권력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상 대화에서 상대방이 잘 모르는 전문 용어(또는 은어)를 구사할 때마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대해 권력자가 된다. 물론 이 권력은 사이비 권력이다. 현실의 권력관계 속에서, 이를테면 교수 앞에서 논문을 방어하는 대학원생이 스스로도 잘 모르는 전문 용어를 주워섬겼다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다시 설명해주시겠어요?"라는 핀잔을 듣게 된다.

여담이지만, 진짜 모르는 사람이 "못 알아듣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와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데 반해 아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이 "못 알아듣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네가 똑바로 설명하지 못했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대화 상대방에게는 나를 이해시킬 의무가 있다. 물론 내가 '대상 청자'가 아니라면, 즉 화자가 대화 상대로 의도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이해의 의무가 나에게 부여될 테지만.

언어의 의미, 언어적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때로는 현실의 권력이 의미를 좌우하기도 한다. '역학'은 "물체의 운동에 관한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 물리학의 한 분야"(역학02), "주역의 괘(卦)를 해석하여 음양 변화의 원리와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역학03), "어떤 지역이나 집단 안에서 일어나는 질병의 원인이나 변동 상태를 연구하는 학문"(역학05) 등의 뜻이 있는데, '역학05'를 '역학02'로 오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학계에서는 영어 'epidemiology'를 '역학'으로 번역하지만 일반인은 '전염병학'이라는 용어에 친숙하다.

'역학 조사'라고 하면 "전염병의 발생 원인과 역학적 특성을 밝히는 일"이 아니라 전염병의 역학 관계를 조사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일쑤다. 역학자들로서는 땅을 칠 노릇이다. 하지만 역학05를 다루는 단체와 개인의 힘이 지금보다 커진다면 역학05가 역학02나 역학03 취급을 받는 일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물론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동어 반복이 아니다. 이것 자체가 '아나키즘'의 개념을 올바르게 규정하고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을 바꾸기 위한 언어적 실천이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적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정치적 투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태그:#무정부주의, #아나키즘, #역학, #권력, #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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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라고 생각한다. 번역한 책으로는『새의 감각』『숲에서 우주를 보다』『통증연대기』『측정의 역사』『자연 모방』『만물의 공식』『다윈의 잃어버린 세계』『스토리텔링 애니멀』『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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