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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이럴 수가!"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해 고심하다 겨우 생각해낸 말이다. 눈 앞에 펼쳐진 어마어마한 풍광에 복잡했던 이성은 잠시 멈추었고 언어는 굳었다. 오기 전 인터넷이나 책에서 얻은 정보가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게 가능해?'

드넓은 대지에 늘어선 비현실적 황홀경은 아이맥스(EYE MAX) 영화를 실물로 보는 듯 놀라움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가슴속 깊이 밀어 넣었다. 꿈에서나 볼까 말까 한 압도적인 장면은 가난한 여행자의 피로를 몰아내며 한방에 마음을 사로 잡았다.

천상에 있을 법한 신들의 나라 이곳! '바간 (Bagan)'은 잡사에 찌든 여행자의 눈에 분명 신들의 나라였다.

신들의 나라 바간
▲ 바간 파고다 숲1 신들의 나라 바간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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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풍광에 언어는 굳었다.
▲ 바간 파고다 숲2 압도적 풍광에 언어는 굳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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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나라 바간 품에 들다

미얀마의 선물 같은 인레 호수 탐험을 마치고 심야버스에 몸을 실은 일행은 장장 10시간의 울퉁불퉁 멀미 길을 달려 바간에 도착했다. 새벽 5시반 도착을 예상했는데 미얀마 버스답지 않게 너무 일찍(?) 두 시간이나 빨리 도착하는 바람에 우리의 일정은 꼬이기 시작했다. 새벽녘 바간 일출을 보는 것이 첫 일정이었는데 한밤중 배낭과 함께 짐짝 부리듯 내쳐진 일행은 난감해졌다. 하는 수 없이 일출 구경은 포기하고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일단 이동하기로 했다.

도착부터 먹잇감을 향해 끊임없는 사냥을 시도하던 라인까(Line Car-미얀마의 대중교통 수단으로 우리나라 마을버스쯤 되는 작은 트럭을 개조한 미니버스) 호객꾼은 인당 6천짯부터 흥정을 시작했지만 벌써 10일차가 넘은 노련한 여행자의 능숙한 흥정에 결국 인당 1천짯에 합의했다.

반나절 추가비용을 더 지불하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일행은 이내 곯아 떨어졌다. 세 시간 남짓 토막 잠이었지만 한마디로 '꿀잠'이었다. 물먹은 솜 같이 침대에 파고 드는 몸을 깨운 것은 자명종이 아니라 놀랍게도 창문을 두드리는 미얀마 새였다. '새가 창문을 두드리다니' 이 믿지 못할 사건은 삶 속에 보시가 습관화 되어 있는 미얀마 사람들의 작품이었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바 있다 -땅예친 미얀마7/삶 속의 보시 흥애싸). 우여곡절 끝에 입성한 바간에서의 첫 아침은 이처럼 상서로운 기운을 받으며 시작하였다.

"야 달래 밭이다"

지천이 나물 밭인 산골마을인데도 달래는 발견하기 쉽지 않은 나물이었다. 운 좋게 달래가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산삼 찾은 심마니 마냥 '달래 밭'을 외쳤다.

"야 파고다 밭이다"

신비로운 황홀경을 접하고 떠오른 말이 뜬금없는 '달래 밭'임이 조금은 당황스럽지만 바간은 말 그대로 지천이 파고다인 '파고다 밭'이었다. 양곤이나 만달레이, 인레주변 등에서 크고 작은 파고다들을 보았지만 이처럼 수많은 파고다가 한 곳에 널려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천 년을 넘게 버텨온 파고다들이라니.

눈 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장관
▲ 바간 파고다의 숲3 눈 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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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이 파고다인 파고다 밭이다.
▲ 바간 파고다의 숲4 지천이 파고다인 파고다 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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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다의 숲, 천년 고도 바간

바간 파고다의 숲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왓트(Angkor Wat), 인도네시아의 보루부두르(Borobudur)유적과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이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소중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런 소중하고 경이로운 문화유산을 있게 한 이는 바로 미얀마 최초의 통일왕국을 건설한 불세출의 영웅 아노라타(Anawrahta, 1044-1077)왕이다.

이전의 바간 왕조는 소규모 부족 같은 작은 나라였으나 아노라타 왕은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을 벌여 미얀마 전역에 세력을 넓혀갔다. 아노라타 왕은 남쪽(현 몬주)의 따톤(Thaton) 왕국에서 온 신 아라한(Shin Arahan)에 의해 불교신자가 된 다음 강력한 왕권 강화와 바간 왕조 통합을 위해 불교를 왕조의 정식 종교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지침이 될 경전이 없어 따톤 왕국의 마누하 왕에게 필사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화가 난 아노라타 왕은 따톤 왕국을 정복해 버리고 마누하 왕과 함께 수많은 불교건축 기술자들을 포로로 데려왔다. 그렇게 잡혀온 기술자들에 의해 바간의 수많은 파고다들이 지어졌고 이후에도 쿠빌라이 칸에 의해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근 200여 년간 수많은 파고다가 건축 되었다. 그 파고다의 수가 무려 5000여 개였다고 한다. 1975년 대규모 지진으로 수많은 파고다가 파괴되거나 훼손되었으나 현재에도 2300여 개 이상의 파고다들이 천년 고도를 지켜오고 있다.

가장 오래된 파고다라는 부(Bu Paya)) 파야(좌)와 바간 최대의 사원으로 알려진 탓빈뉴 파야(Thatbyinnyu Paya)
▲ 부 파야와 탓빈뉴 가장 오래된 파고다라는 부(Bu Paya)) 파야(좌)와 바간 최대의 사원으로 알려진 탓빈뉴 파야(Thatbyinnyu P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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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다 내부에는 천 년을 지켜온 각양각색의 색바랜 벽화와 불상들이 들어서 있다.
▲ 천년을 지켜온 벽화와 불상들 파고다 내부에는 천 년을 지켜온 각양각색의 색바랜 벽화와 불상들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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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간 풀숲의 무너진 파고다들(좌), 복원 중인 파고다
▲ 바간 유적들 바간 풀숲의 무너진 파고다들(좌), 복원 중인 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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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조상들의 혼이 깃든 곳 바간

호스까(말이 끄는 마차)도 타보고 전기자전거도 타보며 돌아보는 파고다 순례길은 각양각색의 파고다들을 음미 하느라 뙤약볕 무더위도 잊게 했다. 그게 그거 같은 수많은 파고다 순례길은 지루할 만도 한데 그보다는 오히려 신비감을 더해줬다. 가이드의 설명으로 바간의 역사와 파고다들에 대해 하나둘씩 알아갈수록 그저 불심으로만 지어진 건축물인줄만 알았던 파고다들이 다르게 보였다.

파고다의 웅장함과 아름다움만 보고 그저 여행자의 감상에만 빠질 일은 아니었다. 천 년을 견디며 버텨온 저 파고다에는 수많은 미얀마 조상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층층이 쌓아 올린 파고다 벽돌마다 타향에 끌려와 가족을 그리며 흘렸을 미얀마 조상들의 눈물이 배어 있음을 생각하니 숙연해졌다. 더군다나 이렇게 뙤약볕이 내리쬐는 아열대성 기후에서 강제노역이라니.

20여 년 전 고향어른들을 모시고 대전엑스포 행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거대한 건축물이 늘어선 드넓은 전시장 가득 채운 수많은 인파에 휩쓸려 다니며 하루를 보내고 돌아 오는 버스에서 동네 어르신들의 최첨단 세계박람회를 둘러본 감상소감은 이랬다.

"저거 짓느라고 경장히 고생했겠구먼 그랴"

소감치고는 너무나 극사실적인 표현에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무시무시한 뙤약볕 아래 펼쳐진 어마어마한 파고다 숲에 들어서니 '저거 짓느라 경장히 고생했겠구먼'하는 말이 울림처럼 스쳐갔다.

아무리 불심이 깊고 포로의 신세로 지었다지만 이 수많은 파고다는 그저 왕조의 불심으로만 지어진 게 아니었다. 이 수많은 파고다 숲은 미얀마 조상들의 혼이 지은 것이다. 한여름 땡볕 아래 작업을 해본 사람은 안다. 웬만한 인내심 없이는 흐르는 땀과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이겨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열대의 뙤약볕 대지 위에 세워진 파고다의 벽돌 한 장마다 미얀마 조상들의 피와땀이 배어 있다.
▲ 천 년을 지켜온 바간의 파고다 아열대의 뙤약볕 대지 위에 세워진 파고다의 벽돌 한 장마다 미얀마 조상들의 피와땀이 배어 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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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바간을 알아?

그동안 글을 연재하면서 바간(Bagan) 얘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제일 앞에 나올 얘기가 제일 뒤에 나오게 되었다. 바간은 그만큼 몇 마디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곳이다. 마음 같아선 바간에 대해 수십 꼭지로 소개하고 싶지만 어마어마한 감흥에 압도된 탓인지 이 정도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럼에도 꼭 하고 싶은 말은 바간은 정말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곳이라는 점이다. 드넓은 대지에 펼쳐진 파고다 숲은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고, 천 년을 지켜온 파고다마다 얽힌 전설들은 이곳이 신들의 나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현세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곳, 바간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단언컨대 바간은 미얀마의 대표 얼굴이자 미얀마의 혼이 살아 있는 미얀마의 자존심이다.
미얀마 여행자라면 바간을 보지 않고 미얀마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인레가 '미얀마의 선물이라면 바간은 곧 미얀마다.'

덧붙이는 글 | ※미얀마어 표기는 현지어 발음 중심으로 했으며 일부는 통상적인 표기법에 따랐습니다.



태그:#미얀마, #바간, #땅예친미얀마, #전병호, #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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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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