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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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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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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2015년 2월 26일 대법원 2호 법정. 한아름(가명, 34)씨는 직접 판결 선고를 듣고도 어리둥절했다. 이겼단 말인가, 졌단 말인가. 법은 항상 이렇게 어렵고 멀리 있었다.

대법원이 말한 '원심'이란 2심을 의미했다. 파기 환송은 재판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니 돌려보낸다는 뜻이다. 2심은 '해고당한 KTX 여승무원들의 복직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는데 대법원은 이게 잘못됐으니 다시 재판을 하라고 했다. 변호사의 설명을 듣고서야 한씨는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제 복직은 물건너간 건가.

KTX 여승무원 1기 출신인 한씨의 눈에선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일터로 돌아가길 고대하며 9년간 싸워왔는데. 1심과 2심 법원이 승소판결을 내렸을 때만 해도 복귀는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다시 3년 반 만에 사실상 패소판결을 내렸다.

지난한 싸움에서 가장 큰 쟁점은 한 가지였다. KTX 여승무원들은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직원인가, 아닌가. 1심과 2심은 맞다고 한 반면, 대법원은 아니라고 했다. 왜일까. 내막을 들여다본다.

KTX 여승무원, 선발은 코레일이 아닌 홍익회가?

'지상의 스튜어디스를 뽑습니다.' 2003년 항공사 승무원시험을 준비하던 스물셋 한씨의 눈을 사로잡은 광고가 있었다. 2004년부터 운행하는 한국형 고속철도 KTX 여승무원 선발 광고였다. 그는 주저없이 지원했다. 그리고 13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한씨는 항공사 승무원시험에도 동시에 합격한 상태였지만 공사인 KTX를 택했다.

2004년 1월 한씨를 비롯한 합격자들은 철도청 경영연수원에 모여 승무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봄, 멋진 제복을 입고 KTX 최초의 승무원으로 투입되었다. 하지만 한씨와 같은 초기 승무원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들의 소속이 당시 철도청이 아닌 홍익회라는 점이었다.

철도청은 철도공사화 방침에 따라 2004년 한국철도공사(코레일)로 바뀐다. 그리고 KTX 개통을 앞두고 기존의 업무 중 승객서비스 업무를 떼어내 외주화를 결정하고, 홍익회에 넘긴다. 이런 배경으로 철도청은 홍익회와 업무위탁협약을 체결했고, 홍익회는 한아름씨를 비롯한 KTX 여승무원을 공개모집했던 것이다.

홍익회는 또 다시 2004년 12월 설립된 한국철도유통(홍익회에서 유통부분이 분리된 코레일의 자회사)에 승객서비스 업무를 넘겨준다. 이에 따라 코레일과 한국철도유통(이하 철도유통)이 다시 위탁협약을 체결하고 여승무원들은 철도유통 소속이 된다.

승무원들은 자신들의 소속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초로 선발할 때 전부 계약직으로 채용되었지만 자신들도 곧 코레일 직원으로 채용이 되고 정규직이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코레일은 2006년 5월 고객서비스 업무를 다시 KTX관광레저에 위탁하기로 결정한다. 철도유통은 승무원들에게 또 다시 이적을 요구했다. 한씨와 동료들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승무원으로 일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자신들을 고용하지 않는 코레일 측에 '위장도급을 그만두고 직접 고용하라'고 요구했다. 여승무원 중 280명은 이적을 거부했다. 그러자 철도유통은 전원 해고라는 강수로 맞섰다.

이때부터 기나긴 싸움이 시작됐다. 여승무원들은 2006년 서울역과 국회 점거농성, 2007년 20여 일간 서울역 단식농성, 2008년 서울역 근처 철탑 고공농성 등을 이어갔다. KTX 여승무원들의 주장은 단순했다. '실질적 사용자인 코레일이 우리를 직접 고용하라!' 800일 넘게 싸워왔지만 코레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사이 동료들은 한 명 두 명 떠나갔다. 남은 자들도 지쳐갔다.

3월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에서 KTX 승무원 조합원과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부당판결을 규탄하며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3월 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앞에서 KTX 승무원 조합원과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의 부당판결을 규탄하며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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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①] 1심과 2심 "KTX 여승무원 실제 사용자는 코레일"

그때 떠올릴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법이었다. 법의 정의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2008년 11월 승무원 34명은 거리투쟁을 접고 법정투쟁을 시작한다. 코레일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과 임금지급 소송을 낸 것이다. 법은 그들의 편이 돼줬을까.

승무원들은 "형식적으로는 코레일 자회사인 철도유통과 근로계약을 체결했지만 실제 사용자는 코레일이므로 철도유통과 코레일 간의 위탁협약은 '위장도급'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코레일 직원임을 인정하고 해고 이후 임금을 지급하라는 것이 승무원들의 요구였다. 코레일은 수긍하지 않았다. 홍익회나 철도유통은 독립적인 조직이고, 단지 서로 일을 주고 맡긴 도급관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KTX 여승무원들은 코레일 직원일까, 아닐까. 관건은 '홍익회나 철도유통이 독자성과 독립성을 갖춘 회사냐 아니냐'에 있다. 만일 독자성 없이 코레일에 종속된 업체라면 코레일의 노무대행기관 정도로 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여승무원들은 코레일과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된다.

최근 기업들은 고용의 유연화와 고용형태의 다양화를 목적으로 편법을 사용한다. 사용자로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위장도급이라는 방법도 쓴다. 정상적인 도급과 위장도급을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방법이 있을까.

사례를 들어보자. A사와 도급계약을 맺은 B사가 있었다. B사의 역대 대표는 모두 A사 임원출신들이었고, B사 직원들은 A사의 업무만을 도맡아 처리해왔으며, A사가 직원들을 직접 지휘·감독했다. B사의 중요 결정사항도 A사가 처리해왔다. 이 정도면 B사는 독립된 회사로 볼 수 없다. 두 회사는 위장도급관계이며 B사 직원들은 A사와 근로계약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다시 A사를 코레일로, B사를 철도유통으로 대입해보자. 타당하다면 위장도급이고 그렇지 않다면 정상 도급이다. 어떤가. 여승무원들은 코레일의 직원으로 볼 수 있는가.

1심(서울중앙지법 제41민사부 재판장 최승욱)은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코레일이 실제 사용자고 철도유통은 '코레일의 일개 사업부서'나 '노무대행기관'에 불과했다고 평가했다. 왜 그럴까.

우선 철도유통은 코레일의 자회사로, 지분을 코레일이 전부 갖고 있었다. 철도유통의 임원진도 철도청 간부 출신으로 구성돼 있었다. 코레일은 KTX 여승무원 채용이나 면접에 관여하고, 수습교육과 교육평가도 주도했다. 또한 코레일 소속 열차팀장과 여승무원들이 함께 워크숍을 개최하기도 했다.

코레일은 여승무원들 중 우수 인원을 선발하여 해외연수를 보냈다. 코레일 소속인 열차팀장은 여승무원 업무수행을 확인하고 업무평가를 실시했다. 열차팀장은 해당 승무원이 업무에 문제가 있으면 철도유통 측에 시정요구서를 보내 시정결과 통보를 요구하기도 했다.

코레일은 여승무원들에게 인센티브로 수당을 지급하는데, 열차팀장의 평가를 토대로 개인별 차등 지급해왔다. 또한 수당, 퇴직금, 4대 보험료도 코레일이 직접 부담했고, 피복비와 새해 선물도 코레일의 몫이었다.

그뿐 아니다. 코레일의 승무원 서비스 매뉴얼에는 여승무원들에 대한 부분도 포함돼 있었고 코레일의 각종 행사에 여승무원들은 수시로 동원되었다. 여승무원들 업무에 필요한 무전기, 승차증, 숙소도 코레일이 직접 제공하였다. 이런 사정을 볼 때 철도유통은 '바지사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코레일과 여승무원들 사이에는 실제 고용관계와 다름없는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성립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승무원들이 KTX 관광레저로 이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한 부분은 어떻게 될까. 법원은 "정당한 이유가 없어서 무효"라고 했다. 승무원들은 그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지급받을 길도 생겼다. 실제 사용자는 코레일이고, 해고는 무효이기 때문에 근로계약관계는 여전히 유효하고, 승무원들이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받을 수 있었던 임금 상당액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항소심 "홍익회는 불법파견사업주... 코레일 노무대행기관 불과"

항소심(서울고법 제15민사부 재판장 김용빈)도 대동소이했다. 이에 반발한 코레일은 "열차 승무원의 업무를 안전업무와 승객서비스 업무로 분리하여 승객서비스 업무만을 위탁하였으므로 정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승무원의 업무를 나누어 그 중 일부만 도급을 줄 수 있는지 의문을 표시했다.

KTX에는 열차팀장과 여승무원들이 팀을 이루어 안전을 책임진다. 법원은 이들의 업무내용을 명확히 나누기 어렵고 공통된 업무가 있기 때문에 "상호 공동업무수행자의 지위"라고 봤다. 따라서 "승객서비스 업무를 열차팀장의 업무에서 떼어내어 도급형식으로 위탁하는 것은 도급계약의 성질상 허용되지 아니한다"고 판단했다.

코레일이 정원조정을 위해 여승무원 업무를 외주화한 것은 일종의 '꼼수'라고 지적했다. 여승무원 업무에는 30분마다 객실순회, 민원요인 사전 방지, 열차 내 질서유지, 화재예방, 구급약 지급 등 승객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도 포함돼 있었다. 또한 비상상황에서는 열차팀장의 지시를 받아 화재진압, 승객대피 보호에 참여하도록 돼 있다.

사실 홍익회나 철도유통은 승무업무와 관련이 없고 사업의 독자성이 의심스러워서 "사실상 불법파견사업주로서 코레일의 노무대행기관"이라는 것이 항소심의 판단이다. 코레일과 철도유통 사이의 업무위탁은 위장도급이다. 여승무원들의 사용자는 코레일이고, 부당해고는 무효다. 이것이 1심과 2심의 결론이다. 다시 열차로 돌아가고 싶다는 한아름씨의 바람은 현실이 되는 듯했다. 이때가 2심 판결이 나온 2011년 8월이다.

[판결②] 대법원 "KTX 여승무원, 철도공사 노동자 아니다"

2008년 8월 서울역 인근 서울고속철도열차승무사업소 인근 40m 높이의 조명철탑에서 KTX 여승무원들이 고공농성을 벌였다.
 2008년 8월 서울역 인근 서울고속철도열차승무사업소 인근 40m 높이의 조명철탑에서 KTX 여승무원들이 고공농성을 벌였다.
ⓒ 오마이뉴스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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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코레일은 복직을 허용하는 대신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대법원은 장고했다. 무려 3년 반이 지난 2015년 2월 26일 대법원 판결은 모든 걸 다시 원점으로 돌려놨다. "KTX 여승무원은 철도공사 노동자로 볼 수 없다." 대법원은 여승무원과 철도공사 사이에 '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있다고 본 2심 판결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어디가 잘못됐다는 걸까.

우선 대법원이 보기에 열차팀장과 여승무원의 담당 업무구분은 가능하다. 즉 출입문 개폐, 신호상태 확인, 제어안전장치 취급 등 안전 부분은 열차팀장이, 객실 온도와 조명, 승객 인사, 노약자 승하차 보조, 안내방송, 승차권 확인 등 안전과 직결되지 않는 승객서비스 부분은 철도유통에 소속된 여승무원이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두 업무가 서로 협조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업무의 내용과 영역이 구분되어 있고 독자적으로 업무를 담당한다"고 봤다. 비상사태가 생길 때 여승무원이 팀장과 함께 승객대피나 화재진압에 나서야 하는 건 어떻게 봐야 할까. 대법원은 "이례적인 상황에서 응당 필요한 조치에 불과하고 여승무원의 고유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다"고 평가했다.

또한 철도유통이 코레일의 유관단체나 자회사라는 사실도 "위탁협약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사유가 될 수도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각자의 사업만큼은 독립하여 영위한 것"으로 평가했다.

대법원은 '철도유통은 코레일에 종속돼 독자성이 없다'는 부분도 부정했다. 철도유통도 자체 규정에 따라 KTX 여승무원의 채용, 승진, 직급체계를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단순히 교육이나 선발 과정에 코레일이 참여한 것만으로는 "철도유통이 채용 및 교육의 주체라는 점을 부인하는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고 판시했다.

정리하자면 ▲ 열차팀장과 여승무원의 업무가 구분돼 있고 ▲ 철도유통은 위탁계약에 따라 KTX 승객서비스업을 독립적으로 경영했으며 ▲ 철도유통이 여승무원을 직접 고용하여 관리·감독하면서 인사권을 행사한 점에 비춰 위장도급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KTX 여승무원의 사용자는 철도유통이 맞고 "코레일이 진정한 사용자"라는 2심 판결은 근거가 부족한 의심에 불과하다는 것이 대법원의 결론이다.

KTX 열차에는 코레일에 소속된 열차팀장이 있고, 철도유통에 소속된 여승무원이 있다. 안전은 열차팀장이 책임지고 일반서비스는 여승무원이 담당한다. 이들은 서로 독립된 업무를 한다. 따라서 안전사고가 나면 팀장이 해결해야 하고, 여승무원은 서비스만 담당한다. 이들은 소속도 다르고 업무도 다르다. 팀장은 공사의 지휘를 받고 승무원은 철도유통의 지시를 받는다. 이것이 대법원의 판단이다.

"열차팀장은 안전업무, 여승무원은 서비스" 구분 가능?

하지만 이런 구분은 비현실적이다. 현실에선 서비스와 안전업무를 딱 잘라 구분하기란 불가능하다. 열차 출입문이 안 열려서 도와주면 서비스인가 안전인가, 승객이 아프다고 해서 도움을 주면 서비스인가 안전인가. 한씨는 이렇게 되묻는다. '한 열차당 천 명이 넘는 승객의 안전을 한 명만이 책임질 수 있을까. 여승무원들은 안전업무와 무관한가. 열차사고가 나도 우리는 안전과 관계가 없으니 나 몰라라 해야 하는가.'

법은 여승무원들의 편이 아니었다. 패소 판결도 가혹하지만 10년이 다 되도록 복직투쟁에만 매달린 그들에게 청춘은 상처로 얼룩졌다. 설상가상으로 오래 전 법원의 가처분 결정으로 4년 동안 임금을 받은 이들은 이제 와서 1억 원 가까운 돈을 도로 반납해야 한다. 그 사이 20대 초반이던 한씨는 어느덧 30대 중반의 여성이 됐다. 파기환송심이 남아 있지만 한씨의 눈물을 닦아주리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됐다.

노사 문제를 법의 논리로 해결하는 게 상책일까. 한국 노사관계는 한 치 양보도 없이 대법원 판결까지 가야 끝이 나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 그러면 양쪽 모두에게 상처가 되지만 치명타를 입는 건 노동자 쪽이다.

사측은 재판에서 지더라도 회사 돈으로 손해배상금 물어주면 그만이고 복직시키면 그만이다. 하지만 노동자는 다르다. 승패에 생존권이 걸려 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지면 벼랑 끝에 몰린다. 돈을 물어주거나 인생을 망치거나 혹은 감옥에 가거나. KTX 여승무원 재판도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속 300㎞ 이상 고속으로 달리는 KTX 열차에 정규직 코레일 직원은 단 한 명뿐이다. 그 사람만이 안전을 담당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간접고용, 외주로 돌리면 된다. 그들은 코레일 직원이 아니다. 그래야 비용이 절감된다. 안전은 뒷전이다. 이게 자본의 논리다. 코레일은 자신들을 옹호해준 대법원 판결을 보고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태그:#KTX, #위장도급, #코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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