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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골목에서 흉기를 든 강도를 만났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고 도망갈 곳도 없다. 어떻게 하겠는가. 말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면 사력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주변에 돌이나 막대기가 있다면 그것이라도 들고 맞서야 한다. 격투 과정에서 강도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겠지만,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일종의 본능 아닐까.

긴급상황에서 자기방어를 하는 행위는 법도 용인한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당방위다. 그런데 법이 인정하는 정당방위는 관문이 너무 좁다. 왜 그럴까. 판결을 통해 알아보자. 도둑 폭행 뇌사사건과 폭력 남편 의식불명사건이다.       

[판결①] 도둑 폭행 뇌사 사건

강원도 원주시에 사는 정우성(가명, 20대)씨는 군입대를 앞둔 친구를 환송하는 술자리에 갔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술을 마셨다. 그러다 보니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바스락 소리가 났다. 인기척 같았다. 정씨는 그때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거실 쪽을 보니 누군가 서랍장을 뒤지고 있었다. 도둑이다!

"당신, 누구야?"

소리를 친 정씨는 곧장 도둑에게 다가가 주먹으로 얼굴을 쳤다. 도둑이 쓰러졌다. 도둑은 넘어진 상태에서 도망가려고 움직였다. 그런 도둑의 뒤통수를 정씨는 여러 차례 걷어찼다. 그러고도 정씨는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알루미늄 빨래 건조대를 집어들고 도둑의 등을 때렸고, 허리에 차고 있던 벨트를 풀어서 휘둘렀다. 도둑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제야 정씨는 공격을 멈췄다. 도둑은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깨어나지 못했다. 도둑은 50대 이창호(가명)씨였다. 

도둑 잡았으나 뇌사 상태, 정당방위 인정? 

정씨는 도둑이 뇌사 상태에 빠지는 바람에 법정에 섰다. 만일 정씨가 이씨를 점잖게 설득했거나 그냥 집밖으로 쫓아내기만 했다면 불상사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현실에선 기대하기 어려운 시나리오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신사적인 방법으로 대응할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새벽녘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만난 도둑을 보고 냉철한 판단을 내리기란 더더욱 어렵다. 이런 상황에선 어떤 방식으로든 물리적 충돌이 생기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물리력의 정도가 문제인데, 정씨의 행동은 정당방위였을까.

먼저 법에서는 어떤 걸 정당방위라고 하는지 살펴보자. 형법을 펼쳐보면 21조에 정당방위가 나온다.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정당방위는 위법한 침해에 맞서기 위한 정당한 방어 행위 정도로 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할 단어는 ① '현재', ② '방위', ③ '상당한 이유'이다. 먼저, 과거에 일어났거나 미래에 생길 침해에 대비하는 건 정당방위가 아니다. 오로지 현재의 침해여야 한다.

또 정당방위는 적극적인 공격이어서는 안 된다. 즉, 상대의 부당한 공격에 맞서는 방어행위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방어행위가 상당한 이유, 다시 말해 사회통념상 허용될 수 있는 수준(상당성)이 되어야 한다.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재판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사례는 극히 적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어제 만난 강도에게 오늘 주먹질을 했다면 ①을 위반한 것이 된다. 다음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상대와 뒤엉켜 치고받기를 했다. 이건 ②에 걸린다. 주먹질은 방어행위인 동시에 공격행위기 때문에 '방위'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슬리퍼를 쥐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건 ③이 없어서 정당방위가 아니다. 

"도망가는 도둑 심하게 폭행, 방위 넘어선 행동"

지난 2014년 10월 31일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집에 들어온 도둑을 알루미늄 빨래건조대로 머리를 내리쳐서 뇌사 판정을 받아 실형을 사게 된 '도둑 뇌사' 사건에 대해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고 있다며 지적하고 있다.
 지난 2014년 10월 31일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집에 들어온 도둑을 알루미늄 빨래건조대로 머리를 내리쳐서 뇌사 판정을 받아 실형을 사게 된 '도둑 뇌사' 사건에 대해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고 있다며 지적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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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건으로 돌아가 상황을 복기해 보자. 정씨는 도둑을 발견하고 때려눕혔다. 도둑은 쓰러져서 도망가려고 했다. 정씨는 그런 도둑을 계속 공격했다. 도둑은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식물인간이 되었다. 법원(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 박병민 판사)은 정당방위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절도범을 제압하기 위해 폭행하였더라도 아무런 저항 없이 도망만 가려고 했던 피해자의 머리 부위를 장시간 심하게 때려 식물인간 상태로 만든 행위는 절도범에 대한 방위행위로서의 한도를 넘어선 것이다."

정씨의 행동은 사회통념상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더구나 빨래대와 벨트까지 이용해서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쓰러진 이씨를 계속 폭행한 건 허용할 수 없다는 취지다. 법에는 과잉방위라는 게 있다. 정당방위가 그 정도를 초과한 상태를 말한다. 이때는 형을 깎아주거나 면제할 수 있다. 하지만 법원은 정씨의 행동이 과잉방위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평가를 내렸다.

법원은 정씨에게 상해죄를 인정, 징역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씨의 형은 동생의 병원비 등에 부담을 느끼고 자살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이씨마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재판은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인데 검찰은 죄명을 상해죄에서 상해치사죄로 바꾸었다. 무죄가 나오지 않는 이상, 정씨에겐 1심보다 무거운 형이 내려질 가능성도 있다.

다음 사건은 좀 더 복잡하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남편이 공격하자 아내가 폭행으로 맞선 뒤 남편이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된 안타까운 사건이다. 

[판결②] 폭력 남편 의식불명 사건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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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배주(가명)씨는 지난 2005년부터 알코올 중독치료를 받아왔을 정도로 술에 빠져서 살아왔다. 술에 취하면 문씨는 수시로 아내 서희선(가명)씨를 폭행해 왔다.

사건 당일도 문씨는 술에 취해 서씨에게 계속 시비를 걸어왔다. 신경이 곤두서 있던 서씨는 남편을 애써 무시하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려고 현관을 나섰다. 문씨는 뒤에서 갑자기 손으로 서씨의 뒷머리채를 세게 잡아당겼다. 순간 서씨는 문씨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돌아서서 오른발로 문씨의 배를 걷어찼다. 문씨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다. 

문씨는 다음날 아침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눈이 잘 안 보인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걱정이 된 서씨는 문씨를 데리고 인근 A 병원을 찾았다. 당시 문씨는 열흘 정도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때문에 병원에서도 문씨의 증상이 단순한 숙취인지 아니면 뇌에 이상이 있는 상태인지 바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의사는 일단 급성위염으로 진단하고 영양제 수액주사를 맞도록 했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있던 문씨가 바닥으로 떨어져 또 머리를 부딪쳤다.

그 후 문씨의 호흡이 곤란해지고 동공이 풀렸다. A병원 측은 즉시 B종합병원 응급실로 문씨를 후송했다. 문씨는 종합검진을 받으면서 뇌 CT를 찍었는데 급성경막하출혈이 발견됐다. B병원은 뇌수술을 시행했지만 문씨는 깨어나지 못했다. 

문씨가 뇌사 상태가 된 건 서씨의 폭행 때문일까, 병원침대 낙상사고 때문일까. 아니면 둘 다인가. 검찰은 서씨의 폭행이 직접 원인이라고 보고 서씨를 폭행치상죄로 기소됐다. 

1심 "남편 폭행에 저항... 충분히 그럴 만하다" 무죄 판결

서씨는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술을 마신 남편이 강하게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상황에서 발로 찬 것은 '소극적인 저항'에 불과했고, 남편의 의식불명도 자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법원은 술취한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동으로 인정했을까?

법원의 판단은 1심과 2심이 엇갈렸다. 먼저 1심(서울중앙지법 제29형사부 재판장 천대엽)이다. 1심은 손을 뿌리치는 행위와 발로 차는 행위를 하나의 연결동작으로 보았다. 1심 법원의 해석이다.

"서씨는 머리카락이 일부 빠질 정도로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상식 밖의 폭행을 당하자 화가 났다. 그래서 문씨가 움켜쥔 손을 뿌리치는 한편, 계속 덤벼들 것으로 예상되는 문씨로부터 벗어나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기 위한 목적으로 저항한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재판부는 서씨의 행위가 '일반인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인정되는 수준'이므로 상당성이 인정된다고 보았다. 또 "당시 상황이나 이후 사정으로 볼 때 경막하출혈이 서씨의 폭행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침대낙상사고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따라서 서씨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2심 "팔을 뿌리친 것 넘어서 발로 찬 행위는 정당방위 아냐"

하지만 항소심(서울고법 제10형사부 재판장 권기훈)은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린다. 우선 문씨의 의식불명 원인을 서씨의 폭행 때문이라고 보았다. 법원은 ▲ 병원 침대 높이가 낮아 큰 충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낮고 ▲ 문씨가 계속 술을 마셔 신체기능이 감소된 상태에서 폭행으로 충격을 받은 점 ▲ 낙상사고 이전에 이미 고통을 호소한 점 등으로 볼 때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해결과를 서씨도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이른바 '예견가능성'도 1, 2심은 달랐다. 1심은 "설사 경막하혈종이 서씨 때문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중한 상해 결과를 예상할 수는 없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항소심은 계속 술을 마셔 반사신경이 둔해진 문씨의 배를 걷어 찬 점으로 볼 때 "자신의 폭행으로 문씨가 경막하혈종 등의 상해를 입게 될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결정적으로 항소심은 정당방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1심이 문씨의 팔을 뿌리치고 걷어찬 행위를 하나의 연결동작으로 이해하고 정당방위로 본 것과 달리, 2심은 머리채를 잡은 문씨의 손을 뿌리친 시점에서 이미 침해행위는 종료됐다고 보았다. 따라서 여기서 서씨가 멈췄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걸 넘어서 발로 찬 행위는 방어가 아닌 공격이라는 취지다.

서씨는 "남편의 보복이 두려워서 그랬다"고 했지만 2심은 "그와 같은 주관적 평가만으로 미리 공격함으로써 침해행위의 발생을 차단하는 것이 사회통념상 상당성이 있는 행위로서 허용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항소심은 서씨의 죄질이 가볍지 않고 문씨가 의식불명에 이르는 심각한 결과가 초래됐다면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한다. 다만 ▲ 서씨가 전과가 없고 폭행이 우발적인 점 ▲ 문씨가 상황을 악화 시키는 데 기여하였고 ▲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두 자녀를 홀로 부양해야 하는 사정 등을 감안,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사건은 결국 대법원에서 판가름날 전망이다.   

정당방위, 문이 너무 좁다

정당방위 논란 사건 재판 진행 상황
 정당방위 논란 사건 재판 진행 상황
ⓒ 김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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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되면 정당방위로 들어가는 문이 왜 좁은지 알게 되었으리라. 상대가 폭력을 사용했더라도 여기에 소극적으로 방어하거나 최소한 상대 공격보다 낮은 수위로 대응해야 정당방위가 인정된다. 그렇다면 정당방위로 인정된 사례는 어떤 게 있을까.

한밤중 인적 드문 곳에서 남자 2명이 여자 1명을 힘으로 제압하면서 성폭행하려 했다. 이때 여자가 키스를 하는 남자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는데 여자는 정당방위로 무죄가 되었다.
흉기를 소지한 도둑이 침입하자 남성이 도둑과 격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도둑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때는 남성의 행위에 상당성이 인정되어 무죄가 되었다.

재판은 이미 만들어진 법으로 기존의 제도나 질서를 지키려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법원이 창조적인 해석을 하기란 어렵다. 더구나 직접 사건현장에 있지 않았던 판사들로서는 양쪽의 입장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 때문인지 위급한 상황에서 사용된 폭력은 대부분 정당방위가 아닌 범죄행위로 평가된다. 당황과 공포에 휩싸인 긴급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짧은 순간에 이성적 판단을 기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자신을 공격하는 상대가 흉기를 갖고 있을지, 나보다 힘이 셀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신사적인 행동만 하라는 건 비현실적이다. 정당방위의 문은 지금보다는 더 넓혀야 하지 않을까.

○ 편집ㅣ박순옥 기자



태그:#정당방위, #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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