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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많은 이들이 정부나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왜 그럴까. 말이나 글로 대통령을 비난하거나 모독하면 형사처벌을 받게 되는 걸까.

미리 확실하게 해 둘 게 있다. 현재 대한민국 법조항 중에 국가원수모독죄와 같은 '불경죄'는 없다는 점이다. 과거 독재시대 때도 마찬가지다. 1975년 형법에는 국가모독죄(104조의 2)가 있긴 했다.

이 죄는 내국인이 국외에서, 또는 국내에서 외국인 등을 이용하여 국가기관을 모욕, 비방하는 행위 등을 처벌했다. 내국인이 국내에서 국가기관을 모욕한 경우에는 적용할 수 없었다. 이마저도 건전한 비판의 자유를 억제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988년 폐지되었다. 결과적으로 국내에서 국가원수를 비판(또는 비난, 비방)한다고 해서 별도로 처벌하는 법은 한 차례도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2015년에도 정부나 대통령 비판에는 전단이 길거리에 뿌려지는 것처럼 비정상적인(?) 방식이 동원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판결 대 판결 19번째 이야기는 대통령 비방 혹은 비판 사건 2가지를 소개한다. 박정희 불륜설 유포 vs 박근혜 비방사건이다. 사건에 휘말린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판결 1] 유신시대, 가정주부 황당한 감옥살이, 이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젊은 시절 모습.
▲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젊은 시절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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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어느날, 수사관들이 주부 박아무개(당시 36세)씨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다짜고짜 박씨를 다그쳤다.

"당신, 각하와 탤런트 정 아무개가 불륜 관계라고 퍼뜨리고 다녔지?"
"저……, 그런 적 없는데요"
"아니, 이 여자가. 우리 다 알고 왔어. 불륜설은 어디서 들었고 누구한테 얘기했어?"
"정말로 기억이 안납니다."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차리겠구만, 이 여자 얼른 끌고가!"

수사기관은 "박씨가 박정희 대통령의 불륜설을 얘기한 적이 있다"는 목격자의 진술 하나만을 근거로 박씨를 체포한다. 조사실로 끌려간 박씨는 수사기관의 요청에 따라 이미 작성된 조서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된다.

1972년 개정된 유신헌법은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명분으로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을 부여한다. 국가비상상황시 신속한 조치를 취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했지만 유신정권은 권한을 남발하여 시도 때도 없이 시민의 자유를 옥죄었다.

1974년 시행된 긴급조치 1호는 헌법의 부정, 반대는 물론, 개정 또는 폐지 주장 자체를 금지하고, 유언비어 날조·유포를 금지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어긴 자는 영장없이 체포, 구속,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는 긴급조치를 비방한 자도 처벌을 받는 무시무시한 조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여자문제 유포" 긴급조치 위반, 징역형

박씨에게 적용된 긴급조치는 9호다. 1975년 시행된 9호는 유언비조를 날조·유포하면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수사기관은 "마치 대통령이 정아무개와 밀접한 교제관계를 맺고 있는 양 허위사실을 날조 유포했다"고 박씨를 기소했다.

긴급조치는 평범한 가정주부를 정치범으로 둔갑시켰다. 정씨는 1심에서 징역 2년 6월에 자격정지 2년 6월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2심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 판결로 풀려날 때까지 정씨는 독방생활을 해야 했다. 박씨가 소문을 퍼뜨렸는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설사 그랬더라도 징역살이를 살아야 할 정도의 중죄라고 그 누구도 수긍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신시대는 상식도 통하지 않는 시대였다.

긴 시간을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박씨는 35년 만에 재심청구를 하였다. 서울고법(제2형사부 재판장 김용빈)은 2014년 3월 무죄를 선고했다. 1년 전 대법원이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라고 판시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민주주의 본질적 요소인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였다"고 판단하였다.

법원은 위헌·무효인 긴급조치를 적용하여 기소하였으므로 애당초 죄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박씨는 칠순이 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 고초를 겪은 박 씨에게 국가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판결 2] "박근혜 님은 한 게 뭐가 있죠?"는 후보자 비방?

2012년 11월, 18대 대선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인터넷에는 대선 후보와 관련된 다양한 글들이 넘쳐났다. A씨가 가입한 인터넷 카페도 마찬가지였다. A씨도 '박근혜님은 한 게 뭐가 있죠?'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박정희, 다카키 마사오... 상관의 성을 따라 오카모토 미노루로 또 변경, 독립 후 살기 위해 남로당 빨갱이 가입, 대세가 기우니 다 팔아먹고 혼자 극적으로 살아남. 일본 군부 출신이라 전쟁 때 간부로 한가닥함. 지지기반 쌓고 나중에 쿠데타로 나라 먹음. 5년을 해도 못했다는 대통령 다카키는 야당의 반대 그런 거 없었음. 왕이었음. 20년 가까운 독재. 안 죽었음 리비아, 이라크, 쿠바처럼 평생 독재 예상...(중략) 박근혜님 친일황군 빨갱이 독재까지 다해본 다카끼 마사오의 따님...(중략) 박근혜는 한 게 뭐가 있는지 알려줄 분 계신가요?"

다소 직설적이긴 했지만, 이런 글이 형사처벌 대상이 될 줄을 A씨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검찰은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박 전 대통령을 비방하였다"며 A씨를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선거법은 후보자 본인뿐만 아니라 배우자, 직계존비속이나 형제자매를 비방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A씨는 글 내용이 진실이고,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어서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선거법의 조문 해석상, 비방의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진실한 사실+공공성'을 갖추면 위법성 조각사유가 되어 처벌을 면하게 된다.

'박정희 친일' 지적이 박근혜 후보자 비방?

수원지법 성남지원(제1형사부 재판장 함석천)은 문장을 하나 하나 나누어 참인지 거짓인지를 따졌다. 그 결과 대체적으로는 객관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해석한다. 우선 일본 이름 다카키 마사오와 남로당 가입 경력은 진실이었다. '남로당 빨갱이 가입', '쿠데타로 나라먹음', '20년 가까운 독재' 등의 표현도 일부 과장이 있다 해도 진실에 어긋난다고 볼 수는 없었다.

'오카모토 미노루로 또 변경'했다는 부분은 글 전체에서 비중이 낮았고 '평생 독재 예상'은 사실의 적시가 아니라 단순한 평가로 보았다. 따라서 "세부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거나 다소 과장된 표현이 있다고 해도 내용 전체의 취지를 살펴볼 때 객관적 사실과 합치한다"는 해석이 가능했다.

일단은 글 내용이 허위라는 누명은 벗은 셈이다. 그렇다면 공익 목적은 인정되었을까. 법원은 "박근혜 후보자에 대한 평가를 저하시키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면서도 "유권자들이 적절하게 선거권을 행사하도록 자료를 제공하려는 동기도 존재한다"고 판시했다. 정리하자면 게시글은 중요한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하고 공익 목적도 인정되므로 무죄였다.

검찰은 이에 불복, 항소했다. 검찰은 이번엔 글 내용 중에서 박근혜 후보와 직접 관련된 내용도 비방에 해당한다며 공소사실을 추가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박근혜님, 친일황군, 빨갱이, 독재까지 다 해본 다카키 마사오의 따님, 돈 뺏을려고 기업과 오너를 조진 정수장학회, 근혜님 형제 자매끼리 육영재단 통으로 먹으려고 가족간 전쟁, 최태민 목사건…

근혜님, 결혼 안 해봄, 직장생활 안 해봄, 돈을 벌어본 적이 없음, 남편도 없고 자녀 키워 본 적도 없음, 공대출신이 이산화까스, 산소까스라고 함, 수첩없인 말도 못 함, 5.16은 어쩔 수 없다 함, 위안부, 인혁당, 정수장학회 건으로 사과도 안 함, 토론에서도 츠키야마 아키히로에게 발림

항소심(서울고법 제2형사부 재판장 김동오)은 다시 이 부분에 대한 진실여부를 따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부분은 진실로 판정됐다. 육영재단 운영권 관련 분쟁, 최태민 목사와의 친분, 박 후보가 미혼이고 직장생활이나 돈을 번 적이 없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또, 2007년 대선후보 경선당시 박 후보가 '이산화까스', '산소까스' 발언을 했고, 수첩공주라는 세간의 비판이 있었다. 인혁당 사건과 정수장학회 사건과 관련된 언급도 "일부 과장된 표현이 있다고 해도 전체의 취지상 객관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2심 역시 내용의 중요 부분이 객관적 사실을 담고 있고 공공의 이익에 관한 글이어서무죄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글은 인터넷 상에서 조회수가 몇 건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글쓴이는 2014년 4월까지 2년 반 동안 법정 공방에 시달려야 했다.

전단 살포, 정작 나라가 걱정해야 할 건

지난 2월 26일 오후 서울 강남역 인근에 한 시민단체가 기습적으로 각종 세금 인상과 복지공약 이행률 등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뿌리고 있다.
▲ 도심에 뿌려진 전단, 무슨 내용이길래... 지난 2월 26일 오후 서울 강남역 인근에 한 시민단체가 기습적으로 각종 세금 인상과 복지공약 이행률 등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뿌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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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부 비판 전단살포를 보면서 서글픈 감정이 든다. 왜냐고? 세상이 거꾸로 가는 듯해서. 지금이 유신시대나 독재시대인가. 언로가 막혀있던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서슬퍼런 정권의 눈을 피해 숨어서 뿌리곤 했던 정부 비판 전단, 몰래 써붙였던 대자보가 표현수단이었다.

그런데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말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시대에 전단이라니. 박근혜 정부 비판 전단은 하루가 멀다하고 전국 방방곡곡 나붙거나 뿌려진다. 그만큼 언로가 막혔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도 수사기관은 전단이 발견되면, 압수수색, 명예훼손, 경범죄처벌법 적용 등으로 신속 대응한다. 그걸로 뭇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을까.

정작 나라가 걱정해야 할 건 위협받고 있는 표현의 자유다.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다.


태그:#표현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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