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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는 인레의 선물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나일강을 처음 만났을 때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의미 차이가 좀 있겠지만, 인레 호수를 처음 만났을 때 '미얀마는 인레의 선물이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인레 호수는 미얀마에서 가장 가슴에 남는 매혹적인 곳이다.

양곤에서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낭쉐에 도착한 때는 오전 7시였다. 오후 7시(원래 6시 차라고 했는데 7시 출발)에 출발했다. 장장 12시간의 대장정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버스 안에서 추위와 온 몸의 흔들림으로 최악의 미얀마 도로 상황을 체험했다. 그야말로 고난의 길이었다.

사투를 이겨내고 새벽녘에 마주한 인레의 땅은 짙게 깔린 호수의 안개 때문에 뭔지 모를 신비감까지 느껴졌다. 예약한 게스트 하우스 젊은 부부의 차를 타고, 뿌연 물안개를 뚫고 인레로 들어갔다. 문득,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주인공 윤희중이 고향 땅으로 스며들어가는 느낌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 김승옥의 <무진기행> 중에서


거대한 호수 인레에는 많은 소수부족들이 의지해 살아 가고 있다.
▲ 인레 호수 거대한 호수 인레에는 많은 소수부족들이 의지해 살아 가고 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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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노를 젓고 독특한 방식으로 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인따족
▲ 인따족 어부 발로 노를 젓고 독특한 방식으로 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인따족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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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오자, 미얀마의 '무진'은 인레 호수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광활한 호수가 어머니처럼 우리를 품었다.

인레 호수는 해발 875m 고원에 있고, 남북으로 22km 동서로 11km에 이르는 거대한 산정호수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인레 호수를 투어했다. 호수에 기대어 사는 여러 소수 부족들을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어느 곳을 방문할 것인지는 가이드겸 보트 운전수 마음이다. 물론 가고 싶은 곳을 말하면 데려다 준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갈까 봐' 사공에 맡기기로 했다.

인레 호수 중앙으로 들어 가는 길은 보트 엔진 소리로 요란했다. 청각은 정신없었지만, 눈 앞에 펼쳐진 호수의 자태와 시원한 바람이 눈과 촉감을 호강 시켜 주었다. 인레의 황홀한 풍광은 그동안 쌓인 여행자의 피로를 달랬다. 많은 여행자들이 왜 인레 호수를 진정한 휴식의 공간으로 칭송하는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호수는 여행자에게 뭔지 모를 편안함을 준다.

발목으로 노 젓는 인레의 어부들

호수로 접어 들자, 발로 노를 젓는 인따(Intha) 족 어부들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인따는 '호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이 이렇게 발로 노를 젓는 이유는 인레 호수가 넓어 방향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서서 노를 저어야 멀리 있는 지형지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이드 설명이다.

보트가 호수 초입으로 들어서자, 대나무 통발을 들고 발로 노를 젓는 인따 어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미얀마를 소개하는 어느 사진 속에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반가운 마음에 멀리서 몇 장 찍고, 가까이서 몇 장 더 찍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근처에 가서 카메라를 들었다가 포기하고 그냥 지나쳤다. 인따 어부들은 사진을 찍기 좋게 연출을 해주고 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던 어부들도 이제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것이 더 수익성이 좋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인레의 어부는 이제 물고기 대신 관광객을 잡는다. 아름답게 보았던 모습들이 갑자기 씁쓸해졌다.

발로 노를 젓는 것만큼 인따족의 독특한 삶의 방식은 바로 '쭌묘(Kyun myaw)'라고 불리는 수상 농장이다. 쭌묘는 호수 주변 갈대와 흙을 이용해 밭을 만들고 대나무의 부력으로 물에 띄워 농사를 짓는 방식이다. 호수 중앙으로 들어가니, 긴 장대를 이용해 수초를 건져 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이드는 수상 농장에서 비료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수초라고 설명했다. 이 수상 농장은 토마토를 재배하는데 비료나 농약을 전혀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야말로 친환경 유기농 토마토다. 낭쉐 시장에는 이곳에서 난 토마토가 많았는데, 안심하고 사 먹어도 될 듯했다.

독특한 노젓기 모습(좌), 인레 호수 기념품들(우)
▲ 인레 호수를 대표 하는 인따족 뱃사공 독특한 노젓기 모습(좌), 인레 호수 기념품들(우)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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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농장 쭌묘에서는 토마토를 재배한다
▲ 이동식 수상 농장 쭌묘 수상 농장 쭌묘에서는 토마토를 재배한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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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선물로 살아가는 수상족

인레 호수 위에는 수상 농장에서 토마토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는 어부도 있지만, 관광객을 대상으로 가내수공업을 생산해 특산품을 파는 사람들도 많았다.

보트가 도착하면 대부분 상점에서 어린 소녀가 나와 짧은 영어로 인사를 하고 차를 내어 주며 반갑게 손님을 맞는다. 파는 물건도 각양각색이다. 담배 잎을 둘둘 말아 만든 잎담배와 닥나무로 만든 종이, 미얀마 전통 수공예 우산이나 나무로 만든 조각품 등 각종 공예품, 은이나 금을 세공한 목걸이나 귀걸이 등 액세서리 등을 팔고 있다. 여러 특산품점 중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곳이 두 곳이나 있었다.

(좌측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수상 가내수공업 가옥,은세공 하는 모습, 금은 세공 장인, 각종 특산품들
▲ 인레 호수 가내수공업 (좌측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수상 가내수공업 가옥,은세공 하는 모습, 금은 세공 장인, 각종 특산품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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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준 옷감

보트 투어 대장이 처음으로 데려간 곳은 수상 가옥 직물 공장이었다. 이곳은 베를 짜서 직물을 파는 공장으로 보여 그저 그랬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아주 신기했다. 옷감 소재가 연꽃 줄기에서 뽑아낸 가느다란 실이었다.

직접 연꽃에서 실을 추출하는 과정과 직물을 짜는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붓다의 나라 미얀마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꽃으로 짠 옷감은 '붓다가 준 선물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이 곧 그들의 밥줄이 되어 주고 있으니 말이다. 공장 옆 호수 위로 솟아 오른 연꽃 봉우리와 붓다는 미얀마 사람들에게 그저 종교적인 의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붓다는 미얀마 사람들의 삶이었다.

친절하게 설명하는 예쁜 소녀 때문에 한 개라도 사려고 했는데, 일행이 출발한다는 소리를 듣고 핑계 삼에 도망치듯 나왔다.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라 그런지 직물 가격은 비싼 편이었다. 하나 사올 걸 하는 아쉬운 생각도 든다. 다음에 방문하면 반드시 사야겠다.

연꽃 줄기에서 가는 실을 뽑아 옷감을 짜고 있다.
▲ 연꽃 줄기로 옷을 만드는 직물공장 연꽃 줄기에서 가는 실을 뽑아 옷감을 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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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 공장 옆에 솟은 연꽃 봉우리를 보니 붓다가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인레의 연꽃 직물 공장 옆에 솟은 연꽃 봉우리를 보니 붓다가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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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로 내려와 상품이 되어버린 고산족 여인들

빠다웅족이 운영하는 특산품점도 기억에 남는다. 빠다웅은 '목이 긴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목에 겹겹이 링을 두르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이나 책으로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목에 링을 두르는 이유는 다른 종족으로부터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설과 산짐승들의 공격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보니 아무리 전통이라도 말리고 싶었다.

빠다웅족은 원래 고산지대에 사는 부족인데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벗어 나기 위해 이렇게 호수가로 내려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상품을 만들어 먹고 살고 있었다. 옷감을 짜고 있던 빠다웅족을 방문하니, 책에서 보았던 낯익은 할머니가 우리를 반겼다.

보트 선착장에는 빠다웅족 어린 소녀 둘이 있었는데, 사진기를 들자 마자 삶에 지친 무표정한 얼굴로 포즈를 취해 주었다. 고산족인 빠다웅족 여인들이 호수로 내려와 관광상품이 되었다. 돈 때문에 박제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니, 왠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 책에서 본 듯한 빠다웅족 여인
▲ 빠다웅족1 어느 책에서 본 듯한 빠다웅족 여인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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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고산족이었던 빠다웅족은 호수로 내려와 관광상품이 되었다. 호수가 그들을 가둔 것인지 그들이 세상을 가둔 것인지...
▲ 빠다웅족 2 원래 고산족이었던 빠다웅족은 호수로 내려와 관광상품이 되었다. 호수가 그들을 가둔 것인지 그들이 세상을 가둔 것인지...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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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호수 위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싶다

인레에는 호수 위에 지어진 그림 같은 호텔들이 있다. 외관은 현지 인따족 집 같지만, 내부는 우아한 원목 인테리어에 욕실까지 갖춰진 최신식 호텔이다. 호수 위에서 지내는 하룻밤은 쌓인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보약이 될 것이다. 많은 여행자들은 이런 이유로 인레 호수를 마지막 여행 일정으로 잡는다.

가난한 여행자에게 가장 큰 고통은 현지의 도로사정이나 언어소통의 불편함이 아니다. 바로 멋진 호텔이나 최고의 여행 코스를 두고, 돈이 없어서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 자료를 통해 익히 알고 갔지만, 인레 호수 위 호텔에서 하룻밤은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붓다가 준 선물 인레! 인레가 준 선물 미얀마! 인레는 분명 미얀마의 선물이다.'

덧붙이는 글 | ※미얀마어 표기는 현지어 발음에 따랐으며 일부는 통상적인 표기법을 따랐습니다.



태그:#미얀마, #땅예친 미얀마, #인레 호수, #인따족, #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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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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