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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 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 박노해 '시다의 꿈' 중에서

박노해의 '시다의 꿈'이라는 시 중 일부이다. '시다(しだ)'는 보조원을 뜻하는 일본말이다. 이 단어를 듣는 동시에 '봉제공장' '야학' '쪽방촌' 등의 단어가 떠오른다면 당신은 중년 이상이다. 여기에 더해 '구로공단' '가리봉동' '봉천동' 등의 단어가 연계 되어 떠오른다면 당신은 확실하게 40대 이상이다.

지금은 '구로디지털단지' '가산디지털단지' 등의 새로운 이름을 달고 있는 구로동지역은 이처럼 30~40년 전에는 '시다의 꿈'이 몽글몽글 맺혀 있던 곳이다. 그랬다. 불과 한 세대 전 이 땅의 수많은 누나들은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채 도시로 팔려가 '시다의 꿈'에 청춘을 바쳐야 했다.

미얀마 소녀들에게 '시다의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하루 종일 앉지도 못한 채 미싱 보조 일을 하면서 받는 일당 속에 가족의 희망이 달려 있다.
▲ 시다의 꿈 하루 종일 앉지도 못한 채 미싱 보조 일을 하면서 받는 일당 속에 가족의 희망이 달려 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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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지나간 고생담이자 성장의 역사지만 미얀마 소녀들에게 '시다의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미얀마는 한 때 우리나라보다 더 부유한 나라였다. 하지만 기나긴 군부통치는 모든 것을 거꾸로 돌려놓았다. 성장동력을 잃은 채 국제사회 속 존재감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랬던 미얀마가 최근 다시 이름을 내밀기 시작했다. 현 떼인세인 정권은 2010년 총선을 통해 들어선 표면적 민선 정부다. 취임 후 정부는 본격적인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패한 군부가 실권을 잡고 있어 속도는 느리기만 하다. 그럼에도 5000만 명이 넘는 인구와 저임금 노동력은 세계 많은 기업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냥쉐(Nyaungshwe)에서 만난 소녀 일꾼들,일당 3500짯을 받는다고 했다.
▲ 미얀마 소녀 일당 노동자들 냥쉐(Nyaungshwe)에서 만난 소녀 일꾼들,일당 3500짯을 받는다고 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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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현재 미얀마 평균임금 수준은 100~150달러(US달러) 사이라고 한다. 자료 취합 자체가 어려워 어떤 통계든 아주 정확하지는 않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임금 기준보다 훨씬 저렴한 것만은 사실이다. 미얀마에서 막노동하는 사람의 일당이 3500짯에서 5000짯(1000짯=한화 약 1000원)사이라고 하니 임금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2015년 우리나라 최저임금 기준은 시간당 5580원이다.

이런 이유로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미얀마 곳곳에 터를 잡고 있다. 그 속에는 몇몇 한국기업도 포함되어 있다. 아직은 불안한 정세, 낙후된 산업 인프라, 열악한 전기 사정 등으로 인해 지지부진한 면도 있다. 하지만 분명 몇 년 안에 미얀마의 경제성장은 가속도를 내리라 확신한다.

그 동안 중국이나 베트남 등에 공장을 짓던 기업들은 인건비 상승과 과열경쟁을 피해서 하나 둘 미얀마로 터를 옮기기 시작했다. 위험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기회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랜드의 미얀마 현지법인이 운영하는 제우(Jewoo)봉제 공장도 그 중 하나다.

지금 미얀마에는 30~40년 전의 우리가 있다

거대한 공장 속에 수많은 노동자들을 보면서 개발성장시대 우리 모습이 보였다.
▲ 양곤 근교 이랜드 제우(Jewoo)공장 거대한 공장 속에 수많은 노동자들을 보면서 개발성장시대 우리 모습이 보였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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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소녀들의 손에 가족의 희망이 달려 있다.
▲ 양곤 근교 이랜드 제우(Jewoo)공장2 저 소녀들의 손에 가족의 희망이 달려 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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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곤 근교에 있는 이랜드 제우 공장을 방문했다. 이 공장은 원래 다른 한국 사람이 운영하던 봉제 공장을 이랜드가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이 공장에서는 이랜드 브랜드 이외에도 SPAO, 티니위니, 미쏘 등의 제품을 연간 320만 장이나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연간 매출은 1300만 달러 정도이고 한국인 5명과 2100여 명의 미얀마 직원들이 일하는 제법 규모가 큰 공장이다.

처음 공장에 들어서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좀 잔인한 표현이지만 나도 모르게 양계장이 떠올랐다.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그 위로 예전 우리 누나들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미싱사 옆에 실밥을 따주고 이것저것 잔심부름하는 보조원 속에 30~40년 전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20대 시절 잠깐이지만 보조원 생활을 했었다. 보조원은 참 외롭고 서럽고 힘든 보직이다. 미얀마의 어린 보조원의 모습 속에 20대의 내 모습도 들어 있었다. 뭔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들락거렸다.

'지금 저 어린 노동자 손에는 한 가정의 생계가 굴러 가는 것이고, 저 보조원의 손에는 동생의 학비가 달려 있을 것이다. 저 재단사 손에는 한 집안의 생계가 달려 있을 것이다.'

밀려오는 답답함에 공장 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미얀마의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햇빛은 화살처럼 강렬하다. 마음을 풀고자 도망쳐 나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또 하나의 광경에 다시 감정은 요동쳤다. 공장 한 켠에는 개방 된 직원용 식당이 있었다. 수백 개의 도시락이 울긋불긋 수놓은 것처럼 자리마다 놓여 있었다.

직원식당은 맞지만 배식을 하고 식사를 하는 곳이 아니라 도시락을 먹는 장소였다. 아직 기숙사 시설이나 식사제공 직원복지가 없는 여건이라 직원들은 도시락을 싸서 출퇴근 한다고 한다. 울긋불긋 쌓여 있는 도시락을 보니 어머니가 싸주던 도시락 생각도 나고 누나가 아침 출근 준비로 도시락 싸가던 모습도 떠올랐다. 지금 미얀마의 모습 속에는 우리 과거가 들어 있었다. 공장에도 도시락에도 미얀마 사람들 가슴 속에도 바로 우리가 들어 있었다.

대한민국 '누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미얀마 봉제공장 직원들의 도시락, 주인을 기다리는 수백 개의 도시락이 색다른 모습이었다.
▲ 도시락 꽃밭 미얀마 봉제공장 직원들의 도시락, 주인을 기다리는 수백 개의 도시락이 색다른 모습이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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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봉제공장 소녀들 속에 우리의 과거가 들어 있었다.
▲ 미얀마 이랜드 제우(Jewoo)공장 미얀마 봉제공장 소녀들 속에 우리의 과거가 들어 있었다.
ⓒ 전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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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봉제공장 소녀들을 보며 우리나라 누나들을 생각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대한민국 성장의 저변에는 바로 우리 누나들 '시다의 꿈'이 있었다. 그 동안 이 땅 누나들의 노력에 대해서 저평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 발전의 토대로 독재와 싸워온 청년들, 열사의 나라에 파견 되었던 건설 일꾼, 독일 탄광으로 파견되었던 광부들 등을 많이 거론한다.

더 들어가 보면 그들의 뒤에는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들을 위해 양보해야 했던 누나들이 있었고, 대학 간 오빠를 위해 공장에 가 학비를 벌어야 했던 누나들이 있었다. 이 땅 누나들은 그 노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기도 전에 하나 둘 시집 가서 누나에서 아내로 또 엄마로 자리 메김 했다. 그 속에 그들의 노력과 시대적 역할에 대한 평가는 끼일 틈이 없었다.

이제라도 이 나라는 우리의 누나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 자기희생으로 집안의 가난을 온몸으로 막아준 대한민국 누나들에게 감사와 고마움의 마음을 전해보자.

'대한민국 누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린 시절 명절은 기다림과 설렘이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서울로 보낸 딸을 기다리는 부모들의 목은 더욱 길어졌다. 그 옆에 꼬마들도 덩달아 동네 어귀를 지키느라 목이 길어졌다. 명절이 지나면 동네에는 훈훈한 딸 자랑들이 돌아 다녔다.

"답박골 옥자는 돈 벌어 지 아부지 송아지 한 마리 사줬다네 참 효녀지. 암."
"웃골 미자는 지 엄마 금가락지 한 쌍을 해줬다는구먼."

그나저나 옥자 누나, 미자 누나는 잘 사나 모르겠네. 이번 설날에는 미자 누나도 보고 싶고, 옥자 누나도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미얀마 연재기를 쓴다고 하니 친구 중에 하나가 그런다.

"이제는 담배도 제대로 못 피겠고 직장인을 봉으로 아는 이 놈의 나라 떠나든지 해야지 원."
"야 미얀마 가서 ‘노가다’라도 뛰면서 살면 마음이라도 편할 거 같다. 미얀마 같이 갈래?"

지금 쓰는 연재기는 여행자로 느낀 감정을 쓴 것이다. 그곳에서 사는 것은 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기회의 땅임은 틀림없으나 일단 저런 도피성 마음을 먹은 사람이 있다면 미얀마행은 말리고 싶다. 여행자로 방문은 추천하지만 다른 이유 미얀마 행은 신중하길….

그래도 꼭 가겠다면 이것만은 꼭 알고 가자. 미얀마에서 하루 종일 막노동해서 받은 돈으로는 요즘 허니버터칩 대항마로 뜨고 있다는 수미칩 허니머스타드 두 봉지도(한 봉지 2400원) 못 사먹는다.


※미얀마어 표기는 현지 발음 중심으로 표기했으며 일부는 통상적인 표기법에 따랐습니다.



태그:#미얀마, #땅예친 미얀마, #시다의 꿈, #미얀마 평균임금, #미얀마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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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공작소장, 에세이스트, 춤꾼,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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