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수(41)씨 다리는 짧지 않다. 5년째 입는 솜바지가 자꾸 흘러내려서 성수씨의 다리를 짧아보이게 만들 뿐이다. 성수씨는 문구점에서 고무 밴드를 사다가 솜바지 허리에 덧댔다. 바늘을 튕기기만 해도 바느질이 되는 신공을 가진 그는 지명수배범. 검찰검거반과 경찰이 연고지로 방문하기 전에 벌금 150만 원을 내라고 문자를 보내와도 '썩소(썩은 미소)'를 날렸다.
'부× 두 쪽, 피켓, 청테이프'가 전 재산인 성수씨, 작년 지방선거 때 '비리를 저질러 공무원직을 그만둔 인물이 시의원 되겠다고 깝죽대는 것을 사전에 응징'하기 위해서 전단지를 돌렸다. 1인시위를 하고 다녔다. 그래서 선거법 위반으로 걸렸다. 성수씨는 벌금을 내는 대신 노역을 살기 위해 군산교도소로 들어갔다. 나와 인터뷰를 한 다음 날(1월 16일)이었다.
"노역은 별 거 아니에요. 교도소 안에 가둬두는 거예요. 자유를 결박당하는 거 말고는 좋죠. 먹을 게 잘 나와요. 운동도 시켜주고, 살도 쪄요. 얼굴까지 하얘져요. 부족한 거 없거든요. 낮에는 싸우느라 길바닥에서 지내고, 저녁에는 낮에 있었던 일을 동영상으로 만드느라 잠을 못 자고 살았거든요. 노역 들어간 김에 쉬었죠. 제주도는 공기까지 좋잖아요."성수씨는 이미 제주교도소에서 노역을 산 적 있다. 문정현 신부님이 그에게 "와서 잡일 좀 해주게"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제주도 강정마을로 갔다. 2년간 마을회관에서 먹고 자며 지냈다. 성수씨는 제주 해군기지 무단침입 혐의로 벌금 150만 원을 선고받았다. 사람들이 미안해하면서도 '내가 도울 게 없다'고 점차 외면하던 2013년 봄, 그는 노역을 살았다.
늦깎이 대학생활 후 복지관 일... 보수적 조직에 실망"막둥이니까 이러고 다닐 수 있죠. 어머니가 마흔 살에 저를 낳았어요."유랑투쟁가 박성수씨는 철공소 집 막내로 태어났다. 형님 세 명과 누나 한 명이 있다. 군산 중앙중 다닐 때 별명이 '까불이', 이 명랑소년은 선생님들한테 자주 맞는 편이었다. 중3 때는 갑자기 공부가 잘해졌다. 담임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성수는 상고 보내서 은행원 시키세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막내아들 성수를 군산상고에 보냈다.
성수는 고등학교 입학하고는 스스로 고립을 선택했다. 여린 성품을 가진 선생님이 수업 중에 울고 나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무심하게 제 공부만 하는 학생들, 한쪽에서는 상처받고 나간 선생님 흉내를 내는 학생들. 반 친구들과 교감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점심시간마다 학교 뒷산에서 '인생이란 뭔가?' 실존을 고민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 청년 성수씨, 1년간 대낮에는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 밤중에만 자전거를 타고서 별 보러 다녔다. 군대 영장이 나오자마자 입대했다. 강원도 양구 12사단에서 불화를 일으키지 않고 부대 생활을 했다. '나가서 뭐 하고 살지?' 고민했다. 이론과 실천이 같이 엮인 공부, 사회복지를 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제대하고는 정읍에 있는 한 슈퍼에서 직원으로 일했어요. 아침 8시부터 밤까지 일하면서 단어장을 외웠어요. 한 달에 월급 30만 원을 받아서 월세 10만 원 내고, 20만 원으로 책 사고 생활을 한 거예요. 그렇게 1년 하고 목포대 사회복지학과에 갔어요. 1998년 20대 중반에 신입생이 됐어요. 학비 버느라 여름에는 서울 가서 막노동을 했고요."성수씨는 학교 다니면서 목포의 한 장애인 복지관에서 2천 시간의 자원활동을 했다. 4학년 때부터는 그 복지관 직원으로 일했다. 그는 활동에 돈이 붙으니까 자발성이 상실되고, 기쁨이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더구나 사회복지 조직은 보수적, 잘못된 제도를 개선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겉으로 예쁜 것만 선호하고, 투쟁은 혐오했다. 확실히 성수씨와 맞지 않았다.
9년째 전국 초등학교 유랑 캠페인... '괄약근' 단련은 덤
2002년, 그는 '1인 사회 활동가'가 되어 고향 군산으로 돌아왔다. 대구지하철참사가 났을 때 처음으로 피켓을 들었다. 텔레비전 보면서 혀를 차며 욕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었다. 열쇠를 갖고 도망간 지하철 기관장이나 책임을 회피하는 지하철공사에게 손가락질하고 있으면 달라지느냐고. 그러는 당신은 놀이터에서 깨진 유리조각 하나라도 치운 적 있느냐고.
그는 생각했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못하면, 어떤 참사든 우리 모두가 공범이라고 여겼다. 그는 토요일마다 옛 군산시청 네거리에서 1인시위를 했다. 일요일에는 미군부대 앞에서 '전쟁반대'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사람과 자연을 죽이는 새만금사업 반대 활동도 했다. 틈틈이 친형님의 건축 현장에서 밥벌이를 했다.
"군산 핵 폐기장 반대활동은 제 문제의식의 전환점이었어요. 2004년이었는데, 세 명이 합쳐서 전과 27범인 행정깡패들이 반대 자체를 못하게 방해했어요. 완전히 북한 공산당 분위기였어요. 저는 전단지를 만들어서 4차선 도로를 끼고 있는 모든 상가를 1년 동안 돌아다녔어요. 나이 든 사람들한테는 얘기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어요. 머리와 가슴이 유연한 아이들에게, 자본과 권력의 마수가 뻗치기 전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인간사랑 자연사랑 캠페인'을 하기 위해 유랑에 나섰다. 2006년 8월 31일이었다. 전국 곳곳의 초등학교를 9년째 걸어 다니고 있다. 눈비가 와도 텐트를 치고 잔다.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가 화장실. 아침부터 속이 부글부글거릴 때는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러나 그는 '급똥' 조절을 몹시 잘한다. 비결은 성수씨 팬티에 있다.
그는 팬티 두 장을 4년째 입고 있다. 걷다 보면, 낡은 팬티는 계속 말려 올라간다. 차가 다니는 도로를 걸으면서 바지 속에 함부로 손을 넣을 수가 없다. 그는 시행착오 끝에 엉덩이에 힘을 주고 걸으면, 팬티가 '똥꼬'에 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괄약근은 비약적으로 단련됐다. 추워서 몇 번이나 깨는 한겨울 노숙, 아침까지 오줌을 참는 능력도 길러졌다.
20킬로그램 배낭 지고 걸으며 노숙... 맛과 멋이 있는 유랑
"텐트 칠 곳 찾기는 발가락으로 젓가락질해서 콩자반 집어먹기라고 보면 돼요."유랑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이 하룻밤 묵을 장소를 찾는 일이다. 텐트 칠 자리는 도시로 갈수록 찾기가 어렵다. 자리 잡고 나서도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다. 텐트에 돌 던지는 학생들을 며칠 만에 검거해서 "앞으로 돌을 던지되, 숨어서 던지지 말고, 정면에서 던지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타이른 적도 있다.
우리나라 지자체는 250여 곳, 그는 2017년까지 다 누빌 작정이다. 학교 앞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인간과 자연을 사랑하자'는 전단지를 나눠주면, 열 명 중 한 명은 엄청나게 관심을 보인다. '이상하게 호감 가는 아저씨'에게 음료수를 건넨다. 해남의 한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성수씨가 하는 활동의 중요성을 깊이 공감해줬다. 그때마다 성수씨는 감동한다.
걷고 있는 그에게 다가와 "둥글이 박성수씨지요?"라고 먼저 알은 척하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에 제천 가면서도 그랬다. 반갑고 기쁜 일이다. 그는 날마다 한없이 혼자 걷는다. 고독하다. 20kg짜리 배낭을 한 몸처럼 지고 다녀서 한쪽 골반 뼈는 성치 않다. 지나던 사람이 "추울 텐데 텐트 쳤네"라고 한마디 한 걸 듣고서 엉엉 울어버린 날도 있다.
그러나 유랑에는 맛과 멋이 있다. 성수씨는 좋아하는 별을 실컷 볼 수 있다. 사진작가가 찍어준 것처럼 '셀카'를 찍을 수도 있다. 발가락이 모기에 물려서 가려움에 고통받던 어느 여름 날 새벽, 발가락에는 성감대가 밀집돼 있어서 간지러움의 고통이 척추를 자극하면서 에로틱한 심경을 증폭시킨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올해 마흔한 살의 총각이다.
"(웃으면서) 연애 많이 해봤어요. 많이는 아니고 몇 번이요. 서른다섯 살에 처음으로 여자 손목을 잡아봤어요. 연애하는 거랑 같이 사는 거랑은 다른 거잖아요. 처음에는 서로 좋죠. 제가 유랑도 몇 년 남았다고 하고 밥벌이도 안 할 것 같으니까, 이래저래 헤어지게 되지요. 근데 어차피 두 마리 토끼는 못 잡잖아요. 저는 제 할 일을 해야죠."
한 달 50만 원 신도들의 헌금으로 생활하는 '둥글교' 교주올해 1월 7일, 그는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는 전단지 4천 장을 만들어서 군산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전단지 뿌리면 잡아간다'고 위축돼 있으니까 '이거 문제없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그랬단다. 국민에게는 대통령을 비판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는 전단지에 그의 사진과 그가 운영하는 '길 위의 평화'라는 인터넷 카페 주소도 함께 실었다.
성수씨에게는 '인류애적 허영'이 있다. 대가 없는 사랑을 꿈꾼다. 끼리끼리 뭉쳐서 되돌아올 것을 전제로 호의를 베푸는 게 정이나 사랑, 우정이라면, 거부한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실천! 술 마시면서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고 거창한 이론을 앞세워 사회비판만 하는 것보다는, 길에서 전단지라도 뿌리고 피켓 드는 것이 세상을 더 이롭게 만든다고 여긴다.
사실 그는 <둥글이의 유랑투쟁기>라는 책을 쓴 '대문호'이자 '둥글교' 교주이다. 인세로 받은 돈은 장애를 입은 이주노동자들에게 쓰도록 송금했다. 그가 유랑하며 쓰는 한 달 50여만 원의 생활비는 '둥글교' 신도들이 내는 헌금이다. 세상에 난무하는 유언비어 속에는 그가 책 팔아서 큰돈 번다는 말도 있다. 교도소 노역 가는 당일, 그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입금천국 불납치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