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불편하게 했던 신부님의 이중적 태도내 세레명은 데레사다. 그러나 성당에 안 가본 지는 십 년이 넘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가톨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 때문일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면 기왕이면 종교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사회활동을 겸하고 싶은 생각이었고, 나는 성당을 다녔다. 그리고 영세를 받기 위해 교리공부를 시작했다.
번민은 그때부터였다. 교리는 보수적이었다. 주님과 성모님에 대한 헌신, 그것 외에 신부님은 낙태금지, 심지어 피임도 나쁜 것이라 했다. 동성애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까지는 참았다.
그러나 사제관에서 직접 개를 키우시는 신부님은 시도 때도 없이 '개고기'를 먹자고 신자들에게 말했다. 하얀색의 긴 털을 가진 그 개는 신자들에게도 귀여움을 받았다. 닭집 하는 신자분이 늘 남은 닭고기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이것은 모순이었다. 내가 키우는 개와 내가 먹는 개가 같은 개라면 우리는 그 개에게 동등한 대우를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 모순에 괴로워했다.
신앙생활은 차츰 멀어졌다. 수년이 흘러 동물보호운동에 뛰어든 이후 시시때때로 회원들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제보를 듣게 되었다.
"우리 성당 신부님이 개고기를 너무 즐겨 드세요. 그것도 공공연하게 신도들과 보신탕집에 다녀요." "우리 성당에서 행사하는데 개고기를 대 놓고 팔아요." 한두 번에 걸친 해프닝이 아니었다. 동물보호단체 내부에서는 가톨릭에 아니 더 나아가 교황청에라도 이 문제를 제기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가톨릭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뭔가 껄끄러운 주제였다. 우리는 시간을 더 두고 보기로 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동물에 대한 연민 문제를 끌어내 준다면 동물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진일보할 것이다"라는 의견은 늘 있었다.
구제역과 AI로 동물들이 한꺼번에 생매장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불교와 천도교 등에서는 동물보호단체에 힘을 실어주었다. 정부에 살처분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고 해결해보자고 제기해 준 것도 조계종 쪽이었다. 공식적이나마 육식을 자제하도록 권유하는 불교로서는 이 문제가 자연스러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와 가톨릭은 달랐다. 심지어 일부 개신교도들은 노골적으로 "동물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먹으라고 주셨다"는 항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개고기를 먹는 개개인에 대해 문제 제기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현존하는 문화를 있는 그대로 따르는 모든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라면 조금 달라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개식용 산업에 반대하는 현실적 이유
교리도 습식도 문화도 변한다. 과거에 어떤 이유로 있었던 간에 문화의 미래 존속 여부는 현재 우리 시대에 맞게 재조명되어야 한다. '왜 개고기에 반대하느냐?'라는 질문에 중요한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사회의 육식 문화는 육류의 원료가 되는 동물을 사육, 운송, 도살하는 시스템을 국가의 관리에서 법제화된 위에서 가능해야 한다. 이는 육류의 특징인 도살 후 부패, 각종 항생제 사용에 따른 인간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우리나라 자체 국내법에 의해 정비하지만, 국제기준에 맞추어 만들어진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육류제품이 국내에서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고, 역으로 많은 외국 축산물이 수입되어 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를 합법적으로 도살, 생산하는 국가는 전 세계에 하나도 없다 보니 우리 정부가 이것을 만들어 보편화하기가 어렵다. 정부 관계자들도 알게 모르게 개고기를 합법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단, 국내에 이를 먹는 사람이 있고 이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보니 단번에 불법화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국가관리 시스템이 없다 보니 당연히 위생적이면서 동물의 복지를 생각한 생산, 유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동물보호단체가 개고기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법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금지시키지 않는 한에서 개식용 산업에서의 동물학대와 비위생적 생산 유통은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개의 생태적 특징 때문이다. 개는 특유의 짖는 습성이 있다. 이는 인간이 오랜 시간 주인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데 개를 이용해 왔던 것과 연관된다. 개는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오면 짖음으로 주인에게 이를 알렸다. 또한 늑대의 후손답게 무리생활을 하며 우두머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성격은 개가 주인만을 따르는 반려동물로서 기능하는 데 중요한 성격이 되었다. 짖음은 낯선 자에 대한 강한 공격성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개를 집단으로 생산하고 사육하는데 공격성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운송하는 과정에서 좁은 곳에 몸이 구겨지도록 끼워 넣는 것은 개들끼리 싸워 생산물(개를 의미)에 상처가 생기면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개식용 산업 종사자들이 개를 다루는데 학대하지 않고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기가 근본적으로 어렵다.
민족주의-제국주의, 이미 낡은 사고의 카테고리그 어떤 이슈보다 개식용 문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비아냥은 가장 심하다. 악성 댓글도 제일 많은 편이다. 소, 돼지는 어떻게 하느냐는 거다. 우리는 소, 돼지도 소중한 생명이라고 생각하며 채식을 지향한다는 대답은 듣지도 않고 반복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일반인뿐 아니라 일반 시민단체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장식 축산에는 반대하지만, 개식용 문제는 잘 모르겠다." 환경과 생태를 부르짖는 단체 활동가의 그 발언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왜 그럴까. 환경과 생태라는 카테고리에 왜 '개'라는 동물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
광우병, 구제역, AI 모두 과도한 육식문화의 산물이다. 현재 개식용 문화는 공장식 축산과 무관한 우리 민중의 전통적 식단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보신탕집에서 개고기를 먹는 그 많은 시민들이 모두 단백질이 너무 부족해 그것을 취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 전통인가. 규모면에서 이미 개식용산업도 공장식 축산의 일부가 되었다.
가축 생매장에는 반대한다는 말을 하면서 바로 동료들과 치킨집으로 달려갔다면 그것은 문제의 본질은 보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공장식 축산은 시스템일 뿐 눈에 보이는 실물이 아니다. 시스템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그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실질적인 제도를 파괴하기 위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고 허공에 외치는 공장식 축산 반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가톨릭 사제들에 대한 섭섭함은 비슷한 지점에 있었다. "하나님은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함과 동시에 모두에게 이름을 지어주시지 않았는가?(창세기 1장)" 이 말씀도 있다.
"그때에는 내가 너희와 들짐승들과 새들과 뱀들 사이에 계약을 세워 서로 다정하게 살도록 하겠다. 또 모든 무기를 부수어 전쟁이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여 너희가 평화롭고 안전하며 걱정 근심없이 편히 잠자리에 들게 하겠다"(호세아 2장) 교리도, 전통도, 문화도 변화해야 한다면 기존의 것을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윤리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실천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교황님, 우리 이야기 좀 들어봐 주세요8월에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연일 화제를 몰고 왔다. 말 그대로 낮은 데로 임하는 교황의 말이나 행동은 연습한 것이거나 일시적인 보여주기 식의 쇼가 아니었다. 평상시에 검약한 생활이 몸에 배 있음을 의미했다. 무엇보다 사회의 불평등에 저항하라는 직접적인 메시지는 파격 그 자체였다.
교황의 방한은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세월호 유가족 및 한국의 시민운동과 진보운동에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동물사랑실천협회, 동물을 위한 행동 활동가들은 교황님에게 직접 우리 메시지를 전하기로 했다.
성공회대 박창길 교수님은 우리 행동을 격려해 주셨다. "가톨릭에 우리 의견을 직접 전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정황상 우리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을 것임은 자명했다. 아직 우리 사회에 해결해야 할 현안이 한두 개가 아닌데, 꺼내기조차 남사스러운(?) 개식용 문제라니. 그러나 이것은 행동의 시작이었다.
지난 16일, 가방 안에 플래카드를 넣고 오전 6시 반 광화문으로 향했다. 미리 시복식에 참여하기 위해 신청한 신도들 외에 일반신자들과 시민들은 경찰이 쳐 놓은 바리케이드 밖에서 시복식에 참여해야 했다. 교황님의 퍼레이드 행렬이 지나간다 한 들 글자가 너무 작아 보이기는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동아일보> 사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잠시 후 경찰이 다가왔다.
"여기 앉으시면 안 돼요. 서 계세요."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는 물었다.
"서 있는 것과 앉아 있는 것의 차이가 뭐예요?" 경찰이 말을 못했다. 아마도 상부에서 누군가 사람들이 앉아있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했나보다. 잠시 후 다른 경찰이 왔다.
"경호에 위협이 됩니다.""아니 우리가 무슨 위협이 된다고 그러세요?"시민들이 항의하자 경찰은 이런 말을 했다.
"누군가 돌을 던질 수도 있고...""아니 누가 돌을 던져요?"
시민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경찰은 시민들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 앞에 줄을 지어 섰다. 시민들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신자들과 시민들은 마치 우리를 잠재적 범죄자로 대하는 경찰에 항의했다.
"이 나이에 나는 잃을 것이 없습니다. 목숨은 신의 뜻에 달려있습니다"라며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기를 원해 방탄차도 타지 않으시는 교황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곳에 모인 신자들과 시민들 모두 한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교황님 몸에 손톱만큼이라도 무슨 짓을 하는 자들이라면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퍼레이드가 시작되고 우리는 플래카드를 펼쳤다. 경찰이 저지할까 싶었는데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황님이 우리 메시지를 보셨든 아니든 우리는 이 행동으로 한국 가톨릭에 직접적으로 우리 주장을 펼치기로 했다. 동물사랑실천협회, 동물을 위한 행동, 생명체학대방지포럼 등 동물단체들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회의)에 보낼 공식서한을 준비 중이다.
동물은 우리 시대 최대의 약자... 그들에게도 배려와 관심을 우리들의 메시지 전달은 간단하지만, (일부 성당 행사에서 개고기를 팔지 못하게 하시고 일부 사제들에게 개고기습식을 하지 않도록 지도해주십시오) 이런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한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빈부격차를 부추기는 경제모델을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에 귀를 기울이라는 충고는 우리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일부 사제의 개식용 습식은 전통이 아니라 일부 도시인들의 식도락문화를 관행대로 따르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 습관이 이미 동물학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지구문명을 뒤덮고 있는 과도한 육식문화의 폐해와 관련된다면 주님의 사도가 취해야 할 행동의 방향은 명확합니다. 과도한 육식과 개식용 습관을 멈추고 지구 안에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주십시오."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평원을 지나가다 새들이 떼 지어 있는 것을 보고 설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나의 새 자매들이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옷을 입히시려고 깃을 주셨고, 날아다니도록 날개를 주셨으며,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모두 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물 중에서도 여러분을 특별히 귀하게 만드셨고, 맑은 대기 속에다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여러분을 보살피십니다."그러자 새들은 프란치스코의 말을 경청하며, 그들의 본성대로 목을 늘이거나 날개를 빼고 입을 벌려 기이한 몸짓으로 흥겨워하며 그를 응시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는 수도복 자락으로 새들을 스치며 새들 한가운데를 오갔고 그리고는 십자성호를 그어 새들을 축복하자, 새들은 기쁜 듯이 몸짓을 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고 전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동물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동물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모든 살아있는 생명에 축복하심과 같이 우리 인간이 그들에게 보다 많은 배려와 사랑과 존중을 베풀어야 할 시기가 아닐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시대 우리의 의무과 책임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 먼 옛날 성인 프란치스코님의 말처럼. 주님께서 동물들에게도 평화를 주시기를 기원하며.
덧붙이는 글 | 전채은 기자는 동물을 위한 행동 Action for Animals(http://www.actionforanimals.or.kr)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