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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 놓는다. 사랑해.'

깨달음에는 '계기'와 '시간'이 필요하다. 일생 '사랑'이란 단어를 발음하거나 쓰기 부끄러워했던 나다. '사랑'은 내겐 금기어에 가까웠다. 그걸 말하거나 옮겨 적는 게 사내답지 못하다고 믿어왔다.

소설가 P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은 쉰둘이다. 그가 막내라고 하니 오빠와 언니는 육십에 가깝고, 부모는 70대 후반이거나 80대일 터. 그럼에도 그 식구는 만날 때마다 서로에게 "사랑해 OO아", "사랑해 아빠"라며 서로를 안아준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웃었다. 그 무슨 연극 같은 짓이냐고. 그런 건 말 안 해도 다 아는 게 아니냐며.

식구에게 "사랑해"라니, 속으로 웃었는데

2008년 3월 10일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사망 열흘 전부턴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어 거의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거짓말처럼 잠시잠깐 의식이 돌아왔다. 아마 3월 6일이었을 게다. 생전 잡아본 기억이 없는 부친의 손을 잡았다. 무슨 말이건 해야 할 것 같았다. 병실엔 그와 나밖에 없었다. 아래는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

"아버지."
"와?"
"나한테 뭐 할 말 없습니까?"
"와?"
"그냥요."
"없다."

딱 세 마디, 단어를 모두 합해도 네 글자. 그게 아버지의 유언이라면 유언이 되고 말았다. 말을 마친 부친은 내가 잡은 손부터 털어냈다. 나도 그도 손을 잡는 게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왜냐? 이전엔 잡아본 적이 없으니까. 내 아버지 역시 69년 8개월을 사는 동안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올린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애정 표현에 서툴고 인색한 영남의 노인. 그러나, 그와 나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엄마가 대여섯 살 조카와 "사랑해…" 어쩌고저쩌고 할 때면 온몸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맞다. 나는 아버지에게처럼 엄마에게도 그리고, 동생과 조카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연인에게도 마찬가지.

'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 놓는다'... 늦은 깨달음  

지난 17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에서 '세월호' 침몰사고로 실종된 학생과 인솔교사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촛불기도회가 안산지역 시민단체 주최로 열리고 있다.
 지난 17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에서 '세월호' 침몰사고로 실종된 학생과 인솔교사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촛불기도회가 안산지역 시민단체 주최로 열리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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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주. 수학여행에 나선 열일곱, 열여덟 어린 학생들을 태우고 제주도로 가던 여객선이 침몰했다. 믿기지 않도록 지독하고 무서운 악몽처럼. 세월호가 침몰한 첫날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TV 뉴스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차갑고 어두운 바다에 갇힌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힘없고 비겁한 어른'이라는 무력감에 슬픔과 우울함 사이를 반복해 오가던 그때. 배에 탔던 한 아이가 부모에게 남긴 메시지에 관한 보도가 나왔다. 글의 첫머리에 언급된 바로 그 내용이었다. 

'엄마, 내가 말 못할까봐 보내 놓는다. 사랑해.'

앞서도 말했지만 깨달음에는 계기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랑을 표현하고 살아야 한다'는 내 깨달음의 계기는 너무나 커다란 비극 속에서 왔다. 그것도 자그마치 43년 만에. 6년 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보낸 게 후회된다.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엄마는 아직 살아 곁에 있으니 나는 그나마 다행이다.

세월호 사망자와 실종자 모두는 한 명 한 명이 같은 무게의 금으로도 바꾸지 않을 자식들이다. 그런 아이들을 잃은 부모의 절망과 울음의 깊이를, 부모가 돼보지 못한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고래로부터 오늘까지 '사랑의 1순위'는 언제나 부모와 자식, 식구였다. 그들에게 "세상 모두와도 바꿀 수 없을 만치 사랑한다"고 말할 권리를 빼앗아간 그 무언가의, 그 누군가의 멱살이라도 틀어쥐고 싶다.

그리고, 사족처럼 덧붙이는 한 가지.

풍문처럼 들리는 이야기론 영국 귀족들의 평균 키가 눈에 띄게 작아진 건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부터라고 한다. 대부분 장교로 지원하거나 징집된 귀족들은 가장 선두에 서서 평민 출신의 사병들보다 먼저 포탄 터지는 전장으로 뛰어들었고 가장 먼저 목숨을 잃었다.

일상을 살 때는 평민들의 피땀 위에서 편한 삶을 누려왔지만, 위급한 상황에선 태도가 달랐다고 한다. 비교적 좋았던 영양상태 탓에 사망한 귀족들은 대부분 큰 키였다고. 영국에서 키 큰 귀족이 사라진 이유는 그들이 죽음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선장을 포함해 침몰한 제주행 여객선에 탔던 승무원들에게 위와 같은 영국 귀족식의 '목숨을 건 희생'을 원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배에 관해 잘 아는' 그들이, 차가운 바다에 빠질 것이 너무나 자명한 '배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수백 명 아이들의 비명을 뒤로 하고 '나 먼저 탈출'을 했다는 건 최소한 '어른답지도' 못했다. 요 며칠, 나 역시 이 땅의 '어른'이란 사실이 부끄럽다.


태그:#세월호, #사랑,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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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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