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건강연대는 2013년 산재를 입고 치료 재활중인 노동자들, 치료가 끝나고 생업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는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산재 노동자들은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를 충분히 치료받지 못한 채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개인의 질병도 사회구조와 떨어져서 볼 수 없기에 의료인들이 노동자를 진료할 때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가이드를 만들었습니다. [편집자말] |
노동건강연대는 2013년 산재를 입고 치료 재활 중인 노동자들, 치료가 끝나고 생업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는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산재 노동자들은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를 충분히 치료받지 못한 채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개인의 질병도 사회구조와 떨어져서 볼 수 없기에 의료인들이 노동자를 진료할 때 더 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사람의 인권을 생각하는 의사를 위한 열 개의 가이드'를 만들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이 열 개의 가이드를 나누고자 합니다. - 기자말며칠 전, 사망 사고가 많이 일어나 일간지 사회면에 자주 오르내리는 대기업에 갔습니다. 바닷가를 끼고 들어선 거대한 공장. 그 곳에는 4천여 명의 원청, 정규직 노동자와 그 두 배에 이르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하청업체 노동자 몇 분을 만났습니다. 작업장 안에서 다쳐서 급히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겨도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원청진료소를 이용할 수가 없어, 회사 밖 병원까지 가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하청 노동자들의 산재가 원청기업 산재 수에 포함되기라도 할까봐 그러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습니다.
하청업체들이 둥지를 틀고 일하는 작업장은 어디를 둘러봐도 원청 대기업의 생산시설, 원청 대기업의 재산인데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원청, 하청을 가려서 구분짓고, 대접을 달리 하고 있었습니다. 하청업체들 안에서도 다시 차등을 두어 같은 작업장 안에서 대략 4 ~5단계의 신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사고가 나면 산재보험은 잘 받느냐고 물으니,
"사망 정도가 아니라면 100% 산재를 안 한다고 봐야죠, 하청이니까요. 회사가 조금 보태주거나 개인 돈으로 해요. 다치는 일은 억수로 많아도 산재 안 해요. 근데 신문에서 보니 우리 원청은 산재 줄었다고 보험료 수십억 감면받았더라고요."노동환경이 위험천만한 대공장의 하청노동자들만 산재를 못하고 숨죽이고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덜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는 많은 분들도 자신이 일하는 작업장의 환경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건강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콜센터 노동자들을 만나서 들은 작업장의 환경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감정노동의 어려움을 주로 이야기 하지 않을까 하는 익숙한 생각에서 완전히 비껴갔거든요.
"제가 일하는 곳은 콜센터예요, 책상은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있고, 일하는 사람은 많은데 창문은 닫혀 있고 환기장치도 없어요. 만날 목도 붓고 콧물, 기침을 달고 사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니더라구요, 병원에 가서 처방전 받고 약 지을 때도 사무실공기 나쁘단 생각은 못해봤어요. 물어본 의사도 없고요, 사무실 공기상태 정말 심각해요."생산직이든 사무직이든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다치거나 근육이 아파서 병원에 간다면 50% 이상은 직업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병원에 가는 우리 다수의 노동자들은 산재보험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정부 자료를 분석한 연구 결과를 보면, 손상으로 산재보험을 받아야 할 환자 수가 일년에 10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산재보험을 받는 환자는 7~8만명입니다. 해마다 직업병을 빼고도 100만여 명이 크든 작든 일을 하다 산재로 다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주변에서 산재보험으로 치료받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죠. 다친 사람들의 10분의 1도 산재보험을 안 하니까요.
30년 청춘을 바쳤는데, 6개월에 한 번씩 신체검사 후 재고용
지난 겨울 만났던 나이가 지긋하신 하청 노동자는 이런 얘길 들려주셨습니다.
"30년을 한 공장에서 일했는데 어깨가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산재가 아니랍니다. 왼쪽 어깨 수술하고, 반년 있다가 오른쪽 어깨 수술하고, 나이 60에 또 일을 구해야 하는데, 모아놓은 돈을 병원비로 다 썼어요." 30여년 전 일을 시작할 때는 하청이긴 했지만 월급이나 복지가 원청과 그렇게 큰 차이가 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을 할수록 하는 일은 그대로인데 원청 기업과의 차이는 점점 벌어졌다고 합니다. 퇴직할 때가 다 된 지금 노후대비 같은 건 해 놓은 것이 없다면서 눈빛이 자꾸 바닥으로 향했습니다.
오히려 하청업체는 노동자 나이가 60이 넘으면 6개월에 한 번씩 신체검사를 해 재계약을 통과할 수 있는 노동자를 골라낸답니다. 젊은 육체로 생산의 최전선에서 일하던 노동자는, 노년이 되어서도 쉬지 못하고 6개월간의 노동허가를 받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습니다.
지난 겨울 우리 마음을 춥게 만들었던 엄마와 성인 두 딸의 동반자살 사건에서도 기초수급자가 되려면 당사자가 먼저 '신청'을 해야 하는데 일단 그 단계에서 모멸감, 망설임, 탈락의 두려움이 이미 서류에 담게 됩니다.
무릇 사회보장제도라면 글을 모르는 사람도, 서류가 무서운 사람도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어야 정말 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참 그걸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친절하지 않은 사회입니다. 사람을 위해 제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위해 사람이 있는 모양새입니다.
신청서 썼다가 떨어지면 소송하라는 식이니 소송은 쉬운가요. 법원 다니고, 변호사 사는 일은 월급쟁이 노동자들이 택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아닙니다. 소송에 정신적, 물질적 비용이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불능력이 없는 이들을 내치게 됩니다.
산재 신청 정차가 이처럼 까다로우니 노동자들은 참고 일하거나, 병이 커진 후에 '신청'을 하기도 합니다. 산재신청서를 쓰려고 맘 먹은 순간부터 노동자들은 불안한 일자리가 떠오르고, 부양해야 할 가족의 얼굴이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산재신청서를 쓰겠다는 노동자를 좋아할 기업은 없기 때문입니다.
원청기업이 산재가 많이 일어나는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하는 현실에서, 하청의 하청, 더 불안정한 일용직, 알바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망설임, 탈락의 두려움, 실직의 공포… 산재신청서에 붙어다니는 부정적인 감정들입니다.
이렇게 힘겨운 산재보험이 노동자의 소득보장, 의료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보험제도입니다. 우리의 노동인권 수준입니다. 아래의 가이드는 의대학생, 의대 지망생, 현직 의료진들도 많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이드③ - 시기] "건강이 악화된 후에 병원 찾는 노동자들"의사는 오랜 교육을 통해 전문성을 확립했기에 질병진단, 치료계획, 치료행위를 수행하는 권한을 갖습니다. 의사는 환자가 건강보험 급여범위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고, 서비스의 대가를 건강보험에서 받습니다. 그러나 산재보험에 대해서만은 의사를 보조적인 역할로 제한해 놓았습니다. 별도의 청구 절차를 거쳐야만 산재 여부를 판정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기 때문입니다.
첫 진료 단계에서 산재인지 판단해야 의사는 직업적 특성을 배려한 치료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건강보험과 다른 산재 제도가 초기 대응을 막고 있어 노동자들은 일을 계속해 병이 악화되거나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의사의 역할을 최적화하기 위해서는 유럽 대다수의 국가들처럼 산재보험을 건강보험과 동일한 구조로 바꾸어야 합니다. 건강보험과 산재보험의 구조가 같아져야 의사의 역량이 강화되고, 산재로 아픈 노동자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가이드 ④ - 진료실] "숨통이 트이는 진료실 되어야"건강문제는 병태생리적으로 보면 외부 인자에 의한 인체기능과 구조의 변화를 말하지만, 이 변화가 일어나는 데에는 사회환경이 중요합니다. 치료를 하더라도 환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유사한 상황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건강문제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몸에 표현된 것입니다. 진료실에 온 환자는 신체의 기능문제만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불만을 토로하고 치유받기를 원합니다. 산재로 온 환자는 더 그러합니다. 산재로 다치거나 아픈 노동자는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산재는 나에게 닥쳐온 불안과 고통을 부정하고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의료진과 불편한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료실이 갖고 있는 사회적 기능은 제도에서 배제되고, 해결되지 않은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숨쉬고 소통할 공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료실마저 답답한 공간이 된다면 절망만 남을지도 모릅니다.
덧붙이는 글 | 가이드 3, 4는 노동건강연대 회원(임준 가천의대 교수)의 글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