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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AI(조류 인플루엔자) 여파로 닭을 출하하지 못해 경영난에 시달리던 농부가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는 소식이 전파를 탔다. 연휴를 지나면서 주춤하던 AI가 다시 발생했다는 뉴스도 나온다.

이번 AI 발생 이후 현재까지 살처분 된 닭·오리는 136개 농장의 282만3000마리로 집계됐다. AI가 처음 발생했던 200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2500만 마리의 가금류가 살처분됐다. 뿐만 아니라 2000년 구제역 발생 이후 지금까지 살처분된 소·돼지 숫자도 네 번에 걸쳐 510만2371마리에 이른다.

충격적인 것은 이제껏 살처분된 2500만 마리의 닭·오리 중에 실제 감염이 확인된 것은 121마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살처분 방식도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감염된 동물을 안락사 시킨 후 매립, 소각해야 한다는 매뉴얼은 사문화된 지 오래다.

짧은 시간 안에 수백만, 수천만 마리의 동물을 살처분해야 하니 그냥 땅을 파고 산 채로 묻어 버린다. 소위 '예방적 살처분'의 실체다. 결국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도 않은 수천만 마리의 동물을 잔인하게 학살한 셈이다.

닭·오리만 살처분? 언젠가는 인간도...

<감기>는 치사율 100%에 이르는 감기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국가 재난 사태가 선포되고 도시를 폐쇄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사투를 그린 영화다.
 <감기>는 치사율 100%에 이르는 감기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국가 재난 사태가 선포되고 도시를 폐쇄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사투를 그린 영화다.
ⓒ 아이러브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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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만 마리의 동물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사회에서 인간이 그 대상이 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비약이 너무 심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나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 르완다 내전, 코소보 분쟁 등 '홀로코스트' 잔혹사는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무차별 살육을 감행할 수 있는지 생생히 증거한다.

지난해 개봉했던 영화 <감기>에서도 최악의 상황에서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급기야 인간을 살처분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감기>는 치사율 100%에 이르는 감기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국가 재난 사태가 선포되고 도시를 폐쇄하는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사투를 그린 영화다.

죽은 자와 아직 죽지 않은 자가 뒤엉켜 산을 이루고 매립, 소각당하는 장면을 보면 그 끔찍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인간 살처분 장면에 대해 김성수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돼지들이 꽤에에엑 내뱉는 소리가 마치 '너희 인간들은 안 당하나 봐라'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인간들은 '우리의 안전을 위해 감염됐건 안 됐건 하여간 최대한 많이 죽어줘야겠어'라며 무차별적으로 생매장했다. 지옥과 같은 풍경으로 묘사하고 싶었다."

데카르트에서 들뢰즈, 가타리까지 철학 속 생태 읽기
▲ 신승철의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 데카르트에서 들뢰즈, 가타리까지 철학 속 생태 읽기
ⓒ 이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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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의 포스터 카피처럼 '진짜 재난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이제 소개하려는 책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에서 신승철은 독일의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의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재난의 본질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간 자체에 있다는 것을 꼬집는다.

호르크하이머는 "근대 이성은 부르주아 국가질서의 이데올로기 일부로 편입되어 국가주의와 개인의 이익관심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며 이를 '도구적 이성'이라고 명명했다.

근대의 서구 합리주의는 자연을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철저히 과학과 기술의 도구로 치부한다. 자연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방식의 지배는 생명을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키고 단지 '고기'의 형태로만 존재하게 한다. 자본주의 육식 문명이 빚어낸 비극이다.

사람들은 이미 공장식 축사가 어떤 곳인지를 대개는 알고 있다. 그러나 너무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거니와 생명의 본성과 떨어져 있는 소비문화에 젖어서 그것을 망각해버리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정작 그러한 소비를 위해 직장에서 자동기계처럼 일하는 자신의 상황이 비참하다고 말한다. 정말로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명을 대하는 태도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삶도 바뀔 것이다. 그렇게 자동기계처럼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57쪽)

신승철은 자연을 수단화하는 '생명의 도구화' 현상이 인간 사회에까지 영향을 주어 소수자와 약자를 차별하고 억압하며 도구화하는 사회 시스템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경계한다. 생명을 도구화하는 자본주의 문명의 병리적 현상은 영화 <감기>의 인간 살처분 장면이 상징하는 것처럼 '파시즘'으로 비화할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 감수성 '빵점' 사회 속 '파시즘'의 징후들

생명의 도구화와 생물종의 대량 멸종,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 석유정점과 에너지 위기 속에서 '인권 감수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생태 감수성'이다. 한국사회의 생태 감수성을 점수로 매긴다면 얼마나 될까. 빵점에 가깝지 않을까. 자본주의 석유문명이 가져다 준 '풍요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시점에서, 생태 감수성은 성장과 소비 위주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삶을 담보하는 최소한의 요건이다.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에서 저자는 육식문명뿐만 아니라 탄소 중독 문명과 에너지 위기, 성장의 종말 문제를 생태철학적으로 사유한다. 특히 생태 감수성 빵점 사회가 파시즘적 유혹에 얼마나 허약한지를 고찰하다보면, 자연 생태에 관한 우리 사회의 태도가 정치의 민주주의와도 직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절대국가를 옹호했던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 투쟁하며 전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개개인은 자연권을 포기하고 국가에 권리를 양도하는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봤다.

저자가 보기에 아파트라는 폐쇄공간은 외부에 열린 자세를 갖기 힘든 폐쇄 구조를 만든다. 이 폐쇄성이 사적 이익과 결부될 경우 행동 유형은 극단화되는데, 층간 소음 분쟁처럼 아파트 주민들은 늘 이웃들과의 '전쟁 상태'에 놓여있다.

이러한 구조는 자신의 자연권을 포기하고 초월적인 존재인 국가에 권리를 양도하는 것처럼, 아파트 주민들이 자치와 자율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대신 초월적 권력에 호소해 욕구를 해결하는 성향을 보인다. 신승철은 괴물과도 같은 권력의 지배와 통제에 의존하는 것은 보수적으로 현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국가라는 존재에 환상을 의미한다고 분석한다.

'빨리 빨리'의 원리로 움직이는 자동차 문명은 속도를 개인적으로 점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대중교통은 사람들이 공통의 시간과 공통의 공간 속에서 좀 더 공적인 형태로 속도를 이용하게 하지만, 자가용은 사적인 속도 점유를 통해 가장 이기적으로 속도를 이용하게 한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속도의 정치>에서 파시즘적 전격전과 같은 효율성과 속도의 추구는 시간과 공간의 정치를 박살내고 주체성을 파괴한다고 했다. 지리적 거리를 종식시키는 속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빛의 속도를 내는 원자 폭탄이다. '속도는 생명과 자연에 대한 전쟁이며, 민중에 대한 전쟁'이라고 일갈한 비릴리오는 속도 문명의 최종 종착지를 핵 문명으로 본다. 따라서 저자가 보기에 한국에서의 탈핵 논의는 반생명적인 속도 문명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한다.

생명위기 시대, '나침반'이 될 철학을 읽는다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에는 플라톤, 들뢰즈, 가타리, 칸트,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철학사 전반을 재검토하면서 현대 문명을 진단하고 대안을 찾고자 하는 작업을 수행해냈다. 각각의 생태 문제에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치해 해결의 단초를 찾고자 하는 독창적인 시도라고 생각된다.

저자의 말처럼 생명위기의 시대에 철학이 나침반이자 지도가 될 수 있을까. 위기가 심화되고 불안감이 극대화 될수록 실용과 기술보다는 삶의 근본에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위기의 시대는 철학이, 철학자들이 도서관에서 현실로 걸어나오기를 호출하고 있다.

책의 머리말(7~8쪽)에서 밝힌 저자의 바람대로 이런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 자신의 삶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실천하려는 가정주부.
- 생태적 위기에 눈떠서 자신의 활동을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에서 출발하려는 청년들.
- 기성세대가 알려주는 자본주의의 표준적 인간형을 거부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학생들.
- 철학을 통해 새로운 생각의 경로를 모색하며 자신의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직장인들.
- 경쟁사회의 승자독식에 문제의식을 가지며, 성장보다는 발전을 통해 관계를 성숙시키고자 하는 협동조합의 조합원들.
- 생명과 동물이 처한 상황에 문제의식을 가지며, 생명보호가 인류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하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
- 생명, 생태, 생활을 바꿈으로써 환경위기를 극복하려는 NGO 단체의 활동가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 http://blog.yes24.com/xfile340 에도 게재했습니다.



갈라파고스로 간 철학자 - 데카르트에서 들뢰즈.가타리까지, 철학 속 생태 읽기

신승철 지음, 서해문집(2013)


태그:#생태위기, #생태철학, #생태, #살처분,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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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 농촌에서 하루 하루 잘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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