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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할스만 전시장 입구에 적어놓은 전시구성의 주제어 섹션1 'Jumping', 섹션2 'Dreaming', 섹션3 'Love'가 보인다
 필립 할스만 전시장 입구에 적어놓은 전시구성의 주제어 섹션1 'Jumping', 섹션2 'Dreaming', 섹션3 'Love'가 보인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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헵번, 먼로, 그레이스 켈리, 샤갈, 닉슨 등 유명 인사를 공중에 띄워 놀라움을 준 사진가 필립 할스만의 '세기의 인물과 날다展'이 내년 2월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1층 전시실에서 열린다. 오리지널사진 200점과 그와 관련된 소품도 선보인다. 디지털영상으로 재구성한 것도 볼 수 있고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코너도 있다.

전시는 세기의 인물이 점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섹션1(Jumping)',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감동을 담은 '섹션2(Dreaming')', 은막에선 완벽한 사랑을 이뤘으나 현실에선 그렇지 못한 배우들 사연이 담긴 '섹션3(Love)', 안성기 등 한국 인사의 점핑사진을 소개한 '섹션4', 그리고 관객이 점핑사진의 주인공이 돼보는 '섹션5'로 나뉜다.

20세기 최고의 인물사진가라 불리는 필립 할스만. 이번에 한국에 처음 소개된다. 인간의 표피만 아니라 심층까지도 포착하려는 그의 사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매우 유익하고 유쾌하다. 그리고 틀과 통념에서 벗어나는 즐거움과 영감도 준다.

사진가 필립 할스만은 누구인가

필립 할스만 I '달리_수염사진(Philippe Halsman Looks at Salvador Dali)' 젤라틴 실버 프린트(Gelatin silver print) 1954.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달리와 뒤에서 사진을 찍는 필립 할스만
 필립 할스만 I '달리_수염사진(Philippe Halsman Looks at Salvador Dali)' 젤라틴 실버 프린트(Gelatin silver print) 1954.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달리와 뒤에서 사진을 찍는 필립 할스만
ⓒ Philippe Halsman/Mag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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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덜 알려진 할스만은 어떤 작가인지 그의 연대기를 통해 먼저 알아보자.

필립 할스만(Philippe Halsman, 1906-1979)은 1906년 북구(北歐)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Riga)에서 당대 유명한 치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유태계가정에서 자랐다. 고교 땐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어, 러시아어 등을 배워 국제적 감각을 익혔고, 졸업 후에는 독일로 가 드레스덴기술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22살 때 부친과 함께 오스트리아 티롤(Tyrol)로 가족휴가를 갔다 부친이 급사하는 미스터리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엉뚱하게도 아들인 할스만이 그곳 반유대주의 분위기에 휩싸여 부친을 살인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중형을 언도 받는다. 1931년 복역 중, 그를 위해 사발팔방으로 뛰어다닌 여동생 리우바(Liouba) 공로로 풀려난다.

그녀는 당시 유럽의 유태계 지식인인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 등을 설득해 탄원서를 내게 했고 이게 큰 효과를 발휘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 이후 그는 고향을 다시 찾지 않았다. 이런 경험이 그의 사진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게 한 것 같다.

할스만은 1931년 파리로 이주해 소르본대에서 수학했고 다음해 몽파르나스에 개인 스튜디오도 냈다. 14살부터 사진을 시작해 25살에 독립사진가가 된다. 그가 이렇게 전공을 바꾼 건 사진을 전공한 애인 이본 모제(Y. Moser)의 영향도 있었다.

필립 할스만 I '앙드레 지드(Andre Gide)'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34. 할스만이 1930년대 파리 시절에 찍은 사진
 필립 할스만 I '앙드레 지드(Andre Gide)'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34. 할스만이 1930년대 파리 시절에 찍은 사진
ⓒ Philippe Halsman/Mag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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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34년부터 7년간 보그(Vogue)지에서 일했고 사진가로 크게 인정받는다. 그래서 프랑스문학계 거물인 지드나 말로 등도 찍게 된다. 지드는 그가 찍은 자신의 사진을 '내 생애 최고의 인물사진'이라고 극찬했다. 그런 와중 2차 대전이 터졌고 히틀러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40년 미국행을 결심한다.

딸, 아내, 여동생은 프랑스 시민권자라 미국행이 쉬었으나 할스만은 라트비아 시민권자라 힘들었다. 다행이도 그를 후원한 아인슈타인의 도움으로 비자를 받게 된다. 처음엔 마르세유에서 출발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다시 리스본으로 가 난민선을 타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해 11월, 미리 와 있던 가족과 뉴욕에서 재회한다.

그는 미국에서도 <보그>지에 입사해 당시 무명모델인 '코니 포드(Connie Ford)'를 선발해 미국성조기를 배경으로 '승리하는 레드(Red)'라는 타이들로 '엘리자베스 아덴' 화장품 립스틱 광고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마침 미국이 2차 대전 참전하기 바로 직전이라 그랬는지 미국인에게 애국심을 촉발시키면서 대히트를 친다.

<라이프지> 표지에 게재된 자신의 사진을 배경으로 찍은 할스만
 <라이프지> 표지에 게재된 자신의 사진을 배경으로 찍은 할스만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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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계기로 그는 포토저널리즘을 지향하는 <라이프>지에서 일하게 됐고 그가 찍은 사진이 1942년 10월 5일 처음으로 표지에 실린다. 그 후 1970년까지 그의 사진이 표지에 101점이나 실려 최다 게재자가 된다. 그는 왕성한 활동으로 1945년엔 미국사진가협회(ASMP)초대회장으로 선출됐고, 3년 후엔 미국 시민권자가 됐다.

할스만은 1951년 11년 만에 유럽으로 가 샤갈, 처칠, 마티스, 바르도, 피카소, 사르트르 등도 찍었다. 1947년 창립한 매그넘에 가입해 이 단체를 통해 그의 사진이 유럽에 보급됐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먼로, 헵번 등을 찍어 <라이프>지에 연재한 사진을 중심으로 1956년에는 '세계의 미녀(Women)' 전을 뉴욕에서 연다.

1958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국사진가협회가 선정한 세계 10대 사진가로 어빙 펜, 리처드 아베든, 안셀 애덤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유세 카슈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린다. 그는 이 분야에서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은 셈이다.

1950대 후반엔 닉슨 부통령, 60년대 초반엔 케네디 대통령도 찍는 영광도 누린다. 1963년엔 스미소니언미술관에서 개인전도 열었고, 1972년엔 저서 <시각과 통찰(sight and insight)>도 낸다. 1973년엔 멀리 동경에서도 전시를 했고 1975년에는 미국사진가협회상을 받는다. 그는 안타깝게도 1979년 6월 25일 뉴욕에서 타계한다.

인간의 본심을 캐려 발명한 '점프사진'

필립 할스만의 '점프사진시리즈'. 전시장 특징에 맞춰 특색 있게 '점프사진'을 공중에 전시하고 있다
 필립 할스만의 '점프사진시리즈'. 전시장 특징에 맞춰 특색 있게 '점프사진'을 공중에 전시하고 있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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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그가 사진가로서 어디에 관심이 있었고 그의 특징이 뭔지 알아보자.

그는 인물사진을 찍는데 얼굴 표정만으로 성이 차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발명한 것이 바로 '점프사진'이다. 권위주의를 탈피하는 몸짓과 표정의 유도라고 할까. 그는 이를 통해 인간의 숨겨진 본심을 포착하려 했다. 그래서 영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점프사진(Jumplogy)'이라는 신조어가 생긴다.

1950년대 초 NBC 등에서 유명 코미디언을 점프케 해서 찍은 사진의 결과가 성공적이자 이를 다른 인물로 확장시킨다. 이런 사진을 구현하기 위해서 초고속 플래시 활용 등 고난도 기술이 요구되는데 다행히 그가 공학도라 이를 쉽게 소화해낸다.

그는 놀라운 설득력과 친화력으로 내성적인 닉슨 대통령도 뛰게 한다. 닉슨은 처음엔 이런 사진을 꺼렸으나 나중엔 이 때문에 대선에도 도움이 됐다. 아무리 대통령이고 유명 인사라도 '점핑사진'에서는 숨겨진 무의식세계도 드러내게 마련이고 가식적 표정도 벗어던지게 된다. 한국에선 아직도 대통령을 점프시키는 사진가가 없어 아쉽다.

필립 할스만 I '마를린 먼로'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59
 필립 할스만 I '마를린 먼로'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59
ⓒ Philippe Halsman/Mag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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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점프사진에 나오는 주인공엔 당대 유명 인사가 다 망라돼 있다. 미국의 전설적 코미디언 밥 호프를 비롯해 살바도르 달리, 닉슨, 헵번, 먼로, 그레이스 케리, 윈저공 부부, 에바 가드너, 바르도, 마리아 펠릭스(영화배우), 모리스 슈발리에(가수), 모하메드 알리, 오펜하이머(물리학자) 등이 그들이다.

그 중에서 할스만은 먼로의 농염한 섹시함을 가장 잘 포착했다. 먼로 역시 그의 점프사진이 의도하는 걸 파악하여 잘 소화해냈다. 할스만은 먼로가 무명 단역배우를 맡을 때부터 알았고 그녀의 매력을 정확하게 감지했다. 섹스심벌로서 그녀의 여성스럽고 관능적인 천진함을 발굴해 20세기 최고의 미인으로 등극시킨다.

먼로는 7살 때 성폭행을 당하는 등 아픈 상처를 잊으려는 듯 모든 남자의 사랑을 무한대로 받고 싶어했고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녀는 할스만에게도 사랑의 공세를 펼쳤으나 그는 자신이 기혼자임을 밝히며 이를 만류한다.

할스만, 1941년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다

필립 할스만 I '달리_아토미쿠스(Atomicus)'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48
 필립 할스만 I '달리_아토미쿠스(Atomicus)'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48
ⓒ Philippe Halsman/Mag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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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스만은 살바도르 달리를 1941년 처음 만나 죽을 때까지 우정이 지속된다. 그때부터 그의 사진작업에서 초현실주의 경향을 띠게 된다. 거기에 환상적인 에로티시즘도 더해진다. 요즘 미술계에 협업이 유행인데 그들은 오래 전 이를 시행한 셈이다.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았고 1948년엔 '달리_아토미쿠스'라는 명작을 탄생시킨다.

현실을 초월하여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두 작가의 기발함과 독창성이 뒤섞여있다. 4시간 동안 28번 실패와 시행착오 끝에야 달성한다. 워낙 난해한 시도라 여기에는 할스만의 부인과 조수 등도 총동원된다. 이 사진을 보면 그가 마치 '포토숍'의 원조나 되듯 디지털기술로 합성한 컴퓨터 사진 같다.

필립 할스만 I '달리_해골누드(Skull of Nudes) 혹은 죽음의 욕망(In Voluptas Mors/Voluptuous Death)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51
 필립 할스만 I '달리_해골누드(Skull of Nudes) 혹은 죽음의 욕망(In Voluptas Mors/Voluptuous Death)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51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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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스만은 더 나아가 달리와 합작으로 사진의 한계에 도전한 '달리_해골누드'를 끝내 완성시킨다. 이 사진은 미장센(연출) 사진의 전형으로 위에서 보듯 알몸인 7명의 여자가 모여 해골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사진의 범위와 상상력은 넓고 깊다. 할스만은 이렇게 도무지 사진으로 할 수 없는 것에 도전하기를 즐겼다.

또한 그는 초현실주의 회화와 구분을 없애는 사진이라고 할까 기상천외한 '달리의 콧수염(2번째 사진)' 연작을 발표한다. 그리고 손이 여섯 개인 '장 콕토'의 엽기사진과 서스펜스영화의 거장 '히치콕' 감독이 스릴 넘치는 영상사진도 선보인다. 그리고 그는 당시론 드문 수중촬영 등에도 도전해 사진의 영역을 확장한다.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사진가

필립 할스만 I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51
 필립 할스만 I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51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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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 사진 만한 건 없다. 그런데 사진이 인간의 내밀한 무의식까지 잡아낼 수 있을까. 그는 사진은 기계공학적 빛으로 구현하는 방식이나, 이게 가능하다고 믿은 건지 여기에 과감히 도전한다. "사진에서 내면을 찍기 위해 외면(디자인)을 포기한다"라는 표명 속에 그의 의도가 보인다.

세기의 인물사진가로 그가 남긴 수작이 많지만 사르트르가 유난히 돋보인다. 인류의 숙제를 풀기 위해 고뇌하는 세기의 철학자의 심경을 잘 잡아냈다. 카르티에-브레송의 사르트르 사진도 유명하지만 할스만의 사르트르 사진 또한 정상급이다. 60년대 미국화가 오키프나 앤디 워홀의 인물사진에서도 이런 관점이 반영된다.

할스만은 "사진작업을 할 때 내가 가장 중시하는 건 구도나 다채로운 조명의 위치가 아니다. 이런 요소는 시각적으로 흥미를 끌 뿐 사진의 본질과는 먼 것이다. 좋은 인물사진이란 그 내면의 본질(the essence)을 포착하는데 있다"라고 인물사진론을 펼쳤는데 예술에 대한 그의 소신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철학이 그의 사진을 '심리사진술(Psychological Portraiture)'이라고 불리게 했다. 할스만은 자신과 피사체의 관계에서 마치 심리학자가 내방자와 상담을 하듯 그렇게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보니 촬영시간이 남보다 더 길 수밖에 없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인간의 깊이를 꿰뚫어보는 그만의 관점이 있었기에 이게 가능했으리라.

덧붙이는 글 | 휴관일 없음. 세종문화회관 1층 전시실에서 2월 23일까지 www.jumpingwithlove.co.kr [작품설명] 도슨트 14:00, 19:00 [요금] 성인(19-64세):12,000원, 청소년(13-18세):10,000원, 어린이(7세-12세):7,000원 문의 02-532-4407 [작가의 연대기 참고] http://www.npg.si.edu/exh/halsman/chron.htm



태그:#필립 할스만, #점프사진, #심리사진술, #살바도르 달리, #마릴린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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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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