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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전, '곰씨'와 또 다시 서교동 부동산에서 만났다. 사장님은 "일주일동안 집을 아무리 찾아봐도 이 근처에는 전세매물이 얼마 없더라"면서 연남동 쪽으로 가자고 한다. 요즘은 부동산들 끼리 온라인 네트워크가 잘 구축이 돼있어서 굳이 한 지역에서 여러 부동산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단다. 부동산 사장님의 차를 타고 연남동 쪽으로 가자, 다른 부동산 사장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물 한 살, 얽히고설킨 알록달록한 지하철 노선도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스물 한 살, 얽히고설킨 알록달록한 지하철 노선도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 네이버 지하철 노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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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 겨울, 혼자 새마을호를 타고 서울에 대학 논술시험을 보러 왔을 때가 생각난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알록달록한 지하철 노선도가 어찌나 무섭던지. '지하철은 무섭다(부산에 살 때는 거의 지하철을 안탔다)'며 버스를 타고서는, 불안한 마음에 기사 아저씨 바로 뒷자리에 앉아있는데 아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걱정스러운 아빠의 목소리. 

"진아, 정신 단디(똑바로) 차리라."

서울에서의 생활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서울역에 도착할 때면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 때 마다 "정신 단디 차리라"는 아빠의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토록 '서울 아니면 안 된다'며 재수까지 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찌됐건 부산 토박이였던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직장을 다니고 이제 신혼집까지 구하게 됐다.

"집이 네모반듯하지가 않아", "테이프로 문틈 막아놓은 거 봐"

지난주 망원역 근처에서 집을 볼 때는 신축빌라를 몇 군데 볼 수 있었다. 집이 좀 작기는 해도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곰씨는 6호선 보다는 2호선 라인에 있는 집을 얻고 싶어 했다. 곰씨네 직장은 7호선 학동역 인근.

만약 6호선에 집을 얻는다면 2번을 갈아타고 출퇴근을 해야 한다. 선배들은 "지하철 한 번 더 갈아타면 더 싸고 좋은 집을 얻을 수 있다"고 했지만, 이미 나를 배려해서 우리 회사 근처로 집을 얻기로 한 곰씨에게 또 한 번의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곰씨는 "홍대입구역이나 합정역 근처에도 이런 비슷한 곳이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이날은 연남동, 동교동 쪽에서 집을 다섯 군데 정도 돌아봤다. 기대했던 '깔끔한 빌라'는 없었다. '웬만하면 마음에 든다'는 곰씨와 달리, 나는 어째 보는 집마다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곰팡이 슨 거 봤어? 집이 습한가봐."
"집이 네모반듯하지가 않아."
"주인집 아줌마 바로 밑에 사니까 간섭 많이 할 것 같아."
"테이프로 문틈 막아놓은 거 봐. 외풍이 심하다는 거잖아."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집을 보기 전까지, 나는 내가 이렇게 깐깐하게 집을 고를 줄은 몰랐다. 서울생활을 시작한 이후 10여 년간 나는 이사만 무려 8번을 했다. 하숙집, 고시원, 투룸, 반지하, 원룸...그동안 다달이 낸 월세가 아마 수천만 원은 될 거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집을 신중하게 골랐던 적은 거의 없다.

'어차피 얼마 안 살 집인데 뭐.'
'이 가격에 구할 수 있는 집이 거기서 거기지.'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할 수 없다면, 집에 나를 맞추자'는 마음이었달까. 하지만 1억이 넘는 돈이 들어가는 전세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것도 신혼집이라면 더욱더.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곳, '집다운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여기에는 일종의 '보상심리'도 있었다. 이날 몇 군데의 집을 보면서 느꼈던 '결점'들은 대부분 이전에 살던 집에서 한 번씩 겪었던 고충들이다. 벽에 곰팡이 슬고 외풍 심하고 동네 시끄럽고 주인집에서 사사건건 간섭하고. '완벽한 집'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깐깐하게 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부동산 사장님이 말했다.

"신혼부부는 많은데, 요즘은 2억짜리 전세도 잘 없어요. 주인들이 다들 월세로 받으려고 하거든요. 적어도 1억 4000만 원 정도는 주셔야 신축빌라를 얻을 수 있어요. 예전 같으면, 오래 기다리면 좋은 집이 나올 거라고 했는데 요즘은 그런 말을 못하겠어요. 매물이 없으니까."

이렇게 이기적인 나, 56년 더 견뎌줄 수 있겠니

<비포 미드나잇>의 제시와 셀린느. 18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비포 미드나잇>의 제시와 셀린느. 18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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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조차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 집을 다 보고 나왔는데 정말 황당하게도 곰씨에게 짜증이 났다. '그냥 6호선에 있는 집구하면 안 되는 건가. 이왕 양보한 김에 지하철 한 번 더 갈아타면 안 되는 건가.'

아침 출근길 지하철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 그게 얼마나 사람을 진 빠지게 하는지 뻔히 알면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이었나. 뒤틀린 마음에 밥을 먹으러 갈 때쯤에는 곰씨에게 소리까지 지르고 말았다.

'아, 이래서 결혼 준비하다가 싸우는 거구나.'

나는 그 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기분 전환을 위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나는 <비포 미드나잇>이, 곰씨는 <스타트랙 다크니스>가 보고 싶었다. 곰씨는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보지 못했고, 나는 <스타트랙 더비기닝>을 보지 못했다.

전편을 보지 않고 속편을 보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같은 시간대에 각자 따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짜증을 내서 미안한 마음에 영화표는 내가 샀다.

나는 <비포 미드나잇>을, 곰씨는 <스타트랙 다크니스>를 선택했다.
 나는 <비포 미드나잇>을, 곰씨는 <스타트랙 다크니스>를 선택했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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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선셋>은 장면 하나하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을 정도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파리의 그림 같은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 제시와 셀린느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며 쉴 새 없이 나누는 인생과 사랑에 대한 대화, 그 순간 두 사람을 감싸는 공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9년 만에 나온 <비포 미드나잇>에는 <비포선셋>에서 느꼈던 설렘은 사라지고 묵직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프랑스 여자들은 절대 살이 안 찌나봐'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가녀린 줄리 델피는 온데간데없고, '워킹맘'으로 두 쌍둥이 딸을 키우며 미국에 있는 제시의 아들과 전부인까지 신경써야하는 하는 '아줌마' 셀린느가 있었다. 프랑스 여자들도 살이 찌는구나.

18년 전, 비엔나로 가는 열차에서 운명처럼 만난 그들의 삶에는 이제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였다. '일상'이 된 사랑은 더 이상 동화가 아니다. 모처럼 분위기를 내기 위해 찾은 그리스의 한 호텔에서 셀린느와 제시가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나와 곰씨가 오버랩 됐다.

'너는 날 이해 못해.', '너만 힘든 줄 알지?'

지난 8년간 연애를 하면서 지겹게 이어져온 싸움패턴과 어쩜 저렇게 비슷할까.

<비포 미드나잇>을 곰씨와 함께 보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가 너무도 '현실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울하다는 평도 있었고. 하지만 때로는 삶의 무게에 지치고 당장이라도 관계가 끝날 것처럼 싸우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 역시 또 다른 사랑의 단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영화에서도 쉴새없이 이어지는 제시와 셀린느의 대화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배어있는 설렘은 덜했지만, 오래된 연인의 '동지애'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쿨하게' 따로 영화를 보자고 한 것을 후회했다.

극장을 나와 곰씨와 나는 각자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광장시장에 가서 육회와 마약김밥을 먹었다. 시원한 '소맥'을 부딪히며 말했다. '앞으로 우리에게 힘든 일이 많겠지만, 잘 해보자'고. 하이파이브도 했다. 

광장시장 육회. '소맥'을 부딪히며 우리는 '동지애'를 다졌다.
 광장시장 육회. '소맥'을 부딪히며 우리는 '동지애'를 다졌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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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셀린느는 제시에게 묻는다. "앞으로 56년 더 나를 견뎌줄 수 있냐"고. 그래, 결혼이라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다른 서로를 견뎌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곰씨에게도 물어봐야겠다. '이런 나를 견뎌줄 수 있겠냐'고.

참, 여기에 대한 제시의 대답은 이랬다. 

"오히려 더 기대 중이야. 오래된 좋은 와인 같을 테니까."


태그:#결혼, #결혼준비, #소박한 결혼, #비포 미드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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